< 30화: 맹화 >
*
시작 선 앞에 선 성현이 상단세를 취했을 때.
상대인 백지호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당황이었다.
심지어 취하고 있던 중단세마저 흐트러졌을 정도였으니 그의 당혹스러움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가 느낀 건, 분노였다.
거친 파도처럼 밀려드는 커다란 분노.
한 달 전 주장 순서로 연습 경기를 했을 때도, 그리고 대회 결승전까지 올라오면서도, 성현은 상단세를 단 한 번도 사용한 바 없었다.
한데 결승전에서 갑작스럽게 상단세라니?
어지간히 그를 무시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빠드득.
이를 간 백지호가 성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호면 면금 너머로 보이는 담담한 표정이 더욱 그의 울화를 돋웠다.
그를 결승전 상대로도 인정하지 않는 듯했기에.
아니고서야 어찌 준결승전까지만 해도 쓰지 않았던 상단세를 여기서 쓰려 한단 말인가?
‘···개새끼. 죽여 버린다.’
연습 경기 주장전에서 패배한 이후.
백지호는 쉬지 않고 실력을 갈고닦으며 다시금 성현과 붙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했던 그때의 굴욕을 씻어 내고, 성현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를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지금 그를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으니, 눈이 돌아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작!”
백지호의 생각이 또 한 번 뒤바뀐 건, 주심이 시합 개시를 알리는 구령을 외쳤을 때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무덤덤하게 상단세를 취하고 있던 성현의 분위기가 한순간 아주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분명, 똑같은 자세, 똑같은 모습이건만.
풍기는 기세가 바뀌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오싹.
등골을 타고 확 끼쳐 오는 소름.
시끄럽던 주위가 고요해지고, 귓가에 울리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불길하게 들려왔다.
상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식은땀이 흘러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 지경이었다.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와 같은 자리에 있는 기분이 이러할까.
‘이건-’
백지호가 떨리는 눈빛으로 성현을 보았다.
상단세를 취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하나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불꽃이었다.
아주 거칠고, 사나운.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그런 불꽃.‘···불의 자세···.’
상단세를 설명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나오는 말이 바로 ‘불의 자세’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하는 공격적인 겨눔세라는 표현이었다.
설령 자신의 틈을 모두 내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에게 공격을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극단적인 겨눔세!
그것이 바로 불의 자세, 상단세였다.
주춤.
백지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상대가 더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는 건 그저 불꽃이었다.
한없이 포악하게 타오르고 있는 맹화(猛火)!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처음, 분노를 느낄 때만 해도, 당장에 뛰어들어 가려 했던 백지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 발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상대의 죽도가 그를 불태워 버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몸이 굳어지듯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의 모습이 점점 커지는 듯했다.
필시, 기세에서 그가 밀리고 있다는 뜻이리라···.
「백지호 선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성현 선수에게서 뭔가를 느낀 걸까요? 송학림 해설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송학림 해설님?」
「네? 아, 죄송합니다. 이성현 선수의 상단세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무심코 집중해 버렸군요.」
「인상적이라 하심은?」
「하루 이틀 갈고 닦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성현 선수의 본래 자세는 중단이 아니라 상단일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말이죠.」
“으랴아앗-!”
백지호가 강렬하게 기부림을 내질렀다.
슬금슬금 그를 좀먹어 오는 상대의 위압감을 기력으로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하나 이전의 연습 경기에서도 그랬듯이, 이미 마음이 압도된 상태에서 내지르는 기부림은 그저 공허할 따름이니.
“···크.”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백지호는 침음을 흘렸다.
이 무슨 어마어마한 압박감이란 말인가?
그러다가 문득, 그는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단지 기세에서 억눌려서 상대를 크게 보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제로도 상대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차!’
뒤늦게 백지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몸 넣기’라는 검도의 기술이었다.
겨눔세를 취한 상태로 상대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타돌이 가능한 거리까지 들어가는 기술!
성현은 바로 이것을 사용하여 슬그머니 거리를 좁혀 그를 향해 다가선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 백지호가 움직였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미 성현은 그의 죽도가 닿는 범위까지─ 즉 타돌 가능 거리까지 다가온 후였기에.
순간, 성현의 두 눈에 새카만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아아앗-!”
세찬 기부림과 더불어.
죽도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휘둘러졌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죽도가 휘어질 리는 없으니, 그건 분명 눈의 착각이리라.
하나 중요한 건 그 단단한 죽도가 휘어져 보일 만큼 내리치는 속도가 빨랐다는 점이다.
백지호로서는 감히 피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 같았다.
찰나에 저 높은 하늘에서 가장 낮은 땅까지 이르는 한 줄기 낙뢰(落雷)!타아악-!
성현의 죽도가 백지호의 머리를 강타했다.
감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격자였다.
“청색, 머리!”
주심이 청색 깃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성현 선수의 머리치기! 백지호 선수 막아 내지 못하고 점수를 내주고 맙니다!」
「허- 죽도의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릅니다. 마치 번개 같았어요. 아무래도 이성현 선수, 본래 사용하던 자세가 상단세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방금 일격이 도저히 설명이 안 됩니다!」
상단세의 또 다른 별명은 하늘(天)의 자세.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수 있는 일검이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죽도는 그만큼 위력적이었기에.
“하···.”
예삿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물러나는 성현을 보며 백지호가 탄식을 내뱉었다.
온몸의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벼락 같은 머리치기를 맞고 나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현의 본래 겨눔세는 상단세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는 진짜 실력을 내지도 않은 성현에게 연습 경기에서 그토록 압도적으로 깨졌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는 것에 백지호는 의지가 꺾일 것만 같았다.
아무리 노력한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대로 진심을 내지 않은 상대에게조차 범접할 수 없건만.
감히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격차.
그 앞에 선 그는 산산이 부서져 내렸─
‘─아니. 아니야.’
백지호가 이를 악물었다.
재능의 벽을 실감한 게 어디 오늘뿐이던가.
천재를 형으로 둔 동생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 좌절하기를 반복하게 되기 마련.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코 굴하는 일 없이, 계속해서 죽도를 휘둘렀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검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설령 재능의 벽 앞에 가로막혀, 몇 번이나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다시 죽도를 손에 쥘 만큼!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백지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인 백성호를 보며 느꼈던 좌절감과 지금의 좌절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태까지 계속 그래 왔듯이.
조용히 그가 속으로 되뇐 건 가장 감명 깊게 봤던 만화의 대사였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
즉, 포기하지 않으면.
시합은 끝나지 않는다.
“······.”
당당한 걸음으로 시작 선 앞에 도달한 백지호.
그를 본 성현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그에게서 꺼지지 않은 투쟁심을 발견한 까닭이다.
‘전’에 만났던 수많은 검도인과는 달리, 백지호는 그의 맹화를 보고도 심지가 꺾이지 않은 것이다.
‘훌륭하다.’
성현은 확신했다.
당장의 실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백지호는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라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는 끝내 그 마음에 어울리는 강함을 손에 넣기 마련이니까.
분명 훗날의 백지호는 손에 꼽힐 만큼 강한 검도인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마음가짐의 강함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기에.
다만, 성현이 해줄 수 있는 건 전력을 다해 상대해주는 일 뿐이었다······.
「백지호 선수, 아직 한 판을 빼앗겼을 뿐입니다. 충분히 역전할 수 있어요.」
「맞습니다.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상단세는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만큼 빈틈도 많거든요? 그걸 잘 파악하기만 한다면 역전, 분명히 가능합니다!」
“두 판째!”
두 사람이 재차 시작 선에 서서 겨눔세를 취하자, 주심이 재빨리 구령을 외쳤다.
그리고 즉시, 성현이 움직였다.
성큼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타돌 가능 거리까지 파고들어 가는 한 걸음!
“우랴앗-!”
순간적으로 빈틈을 포착한 백지호가 마주 움직였다.
그는 기부림을 내지르며 앞으로 나서며 드러난 성현의 손목을 노렸다.
제대로 혼을 실어,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죽도!
하나, 그에게는 실로 안타깝게도.
이미 성현의 ‘눈’은 상대의 대처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니.
스윽.
가볍게 손을 위로 들어 주는 것만으로 회피.
내지른 죽도가 허공을 가르며, 백지호에게서는 몇 개나 되는 빈틈이 드러났다.
이내 성현의 두 눈동자에 재차 검은 불꽃이 피어나고.
동시에, 벌어진 그의 입에서 강렬한 기부림이 내질러졌다.
“하아아아앗-!”
상단세가 추구하는 것은 ‘궁극의 일격’.
첫 일격에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야말로 상단세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빈틈마저 얼마든지 내준다.
필요한 것은 오직 단 한 번의 휘두름이기에.
그렇기에 상단세는 불꽃이다.
상대가 타오르거나, 혹은 자신이 타오르기 전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
타아악-!
번개같이 내리쳐진 성현의 죽도가 백지호의 머리를 두들겼다.
정말이지, 완벽한 득점이었다.
성현은 시합 시작 후 단 한 번 검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그야말로 상단세의 본질과 같은 검이었다···.
“청색, 머리! 시합 끝!”
심판이 청색 깃발을 들어 올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성현의 승리를 알렸다.
2020 고등학교 검도 유망주 대회의 남자부 우승자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후우···.”
자세를 푼 성현이 차분하게 호흡을 골랐다.
만약, 그가 상단세를 드러내 전력을 다하지 않았더라도, 결승전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은 그였을 것이다.
애초에 그와 백지호 사이에는 그만한 기량 차이가 있었기에.
하지만 그런데도 성현은 상단세를 꺼내 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음에도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선전포고!
검도 유망주 대회는 S 방송사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는 대회다.
그리고 대부분의 검도인은 이 대회를 꼭 보곤 했다.
유망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혹은 눈에 띄는 적을 찾기 위해서.
그렇기에 그는 결승전이라는 결정적인 무대에서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실력 있는 자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으로서.
이것이 나의 전력이니, 한 번 제대로 덤벼보라는 뜻이었다.
‘이걸로 어설프게 얕보면서 방심하는 녀석들은 줄어들겠지.’
「이성현 선수-! 2 대 0으로 백지호 선수를 물리칩니다. 이로써 이번 연도 남자 고교 검도 선수 중 최고의 유망주가 자신임을 완벽하게 증명해 내는군요!」
「여자부, 남자부 모두 광천고 선수가 우승을 거머쥐네요. 올해의 광천고는 고교 검도계에 어마어마한 돌풍을 불러일으킬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전국 고등학교 검도 유망주 대회의 우승자가 모두 가려졌습니다. 여자부에서는 광천고 강수연 선수, 남자부에서는 광천고 이성현 선수입니다!」
짝짝짝짝-!
쏟아지는 관중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몸가짐을 정리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
인사를 마친 백지호는 패자임에도 당당한 걸음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성현은 그 뒷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라는 벽 앞에 산산이 부서지는 게 아니라, 다시금 일어서서 투지를 불태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칭찬받아 마땅하였기에.
‘전’에 그가 상대했던 검도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맹화가 보여 주는 격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검을 꺾었던가?
그들을 생각해 보면, 저 고등학생 소년의 의지는 실로 훌륭한 것이었다···.
“바로 시상식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