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불의 자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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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부 결승은 광천고의 강수연 선수, 그리고 서울여고의 김민지 선수의 경기입니다.」
「전 경기 2판 승, 그야말로 파죽지세같이 결승에 올라온 강수연 선수와 혈투 끝에 승리를 거두며 올라온 김민지 선수. 어느 쪽이 승리를 거머쥘지··· 정말 기대됩니다.」
관객석에 앉은 성현은 경기장 안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청색 매트 위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호면을 쓰고 있는 터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결승전이라고 해서 긴장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수연이라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적부터 검도를 시작해, 초등학교 때에는 이미 여러 검도 대회에 꾸준히 참가해 왔던 수연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곧장 춘계 전국 대회에 나가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런 만큼, 이제 와 긴장할 리가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본 결승전일 테니까.
「자, 경기 시작합니다. 청색의 강수연, 백색의 김민지. 송학림 해설님은 두 선수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량 측면에서 봤을 때는, 청색의 강수연 선수가 앞서 있지 않나 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뛰어난 유망주로 주목받았던 선수인데, 고등학생이 돼서 기술의 완성도가 더 많이 높아졌어요.」
「네, 그렇군요.」
「하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량에서는 밀리지만, 김민지 선수가 그걸 넘어서는 패기로 경기를 뒤집을 수도 있으니까요.」
“수연이가 이길 수 있겠지?”
옆에 앉아있던 성하가 슬그머니 물었다.
검도에 관해 아는 게 없는 그녀가 봤을 때, 아무래도 상대의 키가 더 크니 문득 불안해졌던 까닭이다.
대개의 투기 종목들은 체급이 크면 그만큼 더 유리하였으므로.
“물론이지.”
성현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언했다
수연의 승리를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상대가 수연이보다 덩치가 더 크잖아. 좀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아. 그래도 수연이가 이겨.”
“맞아요, 언니. 상대도 잘하긴 하는데, 그래도 수연이한테는 안 돼요.”
짧은 시간 동안 성하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하윤이 슬쩍 거들었다.
그녀는 무기술에서는 체급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실제로 펜싱에서도 체급을 구분하지 않는다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분명 체격이 크면 유리한 건 맞지만 기술적 기량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도.
하윤의 설명을 들은 성하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했다.
결승까지 간 동생에 대해 대우가 너무 박하다고 생각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린 성현은 경기에 집중했다.
“히야아앗-!”
경기는 일방적인 수연의 우세로 진행되고 있었다.
상대인 김민지는 자신의 기량이 수연과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는지, 수비적인 태도로 경기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먼저 나서서 때리기보다는 상대의 격자 이후의 빈틈을 노리는 방식.
송곳니를 숨긴 채, 언제든 빈틈을 드러내는 순간, 가차 없이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이다.
「밀어붙이는 강수연 선수! 주도권을 잡은 뒤 기회를 내주고 있지 않습니다.」
「김민지 선수가 잘 막고는 있는데, 막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거든요? 반격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틈을 파고들어야 해요.」
‘드디어!’
한순간, 김민지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짧게나마 드러난 수연의 빈틈을 파악한 까닭이다.
숨죽이고 기다려 온 찰나.
그녀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이야아앗-!”
사나운 기부림을 내뱉으며 땅을 박차는 김민지.
그것은 막 죽도를 거두던 수연의 허점을 제대로 찌르는 것처럼 보였다.
관객석에서 지켜보던 성하가 저도 모르게 “어, 안 돼-!” 하고 벌떡 일어났을 때.
‘이걸 기다렸어!’
씩 웃은 수연이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상대를 정면으로 대하면서, 오른발을 크게 옆쪽으로 내밀고, 자연스럽게 왼발을 끌어당긴 것이다.
그것은 성현이 하윤과 대련할 때 보여 줬던 ‘벌려 걷기’였다.
비록 그의 것처럼 상대의 시야에서 귀신같이 사라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훈련해 온 게 드러나는 굉장히 숙달된 걸음!
하필이면 찌름을 시도하고 있던 김민지였기에, 그 한 걸음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
“히야아앗-!”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피하는 것을 본 김민지가 당황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죽도를 거두며 자세를 추스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수연의 죽도가 벌써 그녀의 허리를 정확히 타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악.
정확하게 울려 퍼지는 타격음.
지켜보던 심판들이 동시에 청색 깃발을 들었다.
“청색, 허리!”
「옆으로 피해서, 허리! 굉장히 깔끔하게 한판을 따 가는 강수연 선수!」
「빈틈을 노려 김민지 선수가 찌름을 시도했는데, 강수연 선수가 기다렸다는 듯 피해서 허리를 쳤습니다. 반격을 노리고 있던 것 같습니다.」
「반격이라. 어쩐지 같은 학교의 이성현 선수가 떠오르는데요?」
「같은 학교인 만큼 교류가 많았겠지요. 실제로 쉬는 시간에 같이 있는 장면이 여러 번 목격되었다고도 합니다.」
「하하, 그렇군요!」
“쟤가! 언니 심장 떨리게 하고 있어!”
성하가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성현과 하윤이 마주 본 채 키득대며 웃었다.
순간적으로 수연의 위기라고 생각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하의 모습이 퍽 재밌었던 까닭이다.
“저거 그때 그거 맞지?”
“네, 그렇네요.”
“흐- 역시 수연이야. 잘 배운다니까.”
성현과의 대련을 떠올린 하윤이 미소 지었다.
비록 그때의 그녀는 저 벌려 걷기를 예상하지 못해 졌지만, 그걸 보고 배운 수연이 승리를 거둔다면 얼마든지 다시 질 의향이 있었다.
하윤은 후배의 실력이 늘어나는 걸 견제하기보다는 응원하는 참된 선배였으니까.
‘나중에 대련해 봐야지.’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후배와 대련하여 꺾는 게 하윤만의 즐거움이기도 했고.
성현은 관객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수연이가 한판 따냈으니 뭐, 끝났네.”
“응? 왜? 2점 얻어야 하는 거 아니야?”
“상대가 여태까지 버틴 게 0 대 0이라 방어를 굳혀서 그런 건데, 이제 그게 안 되잖아. 한 판을 뺏겼으니까. 그럼 기량 차이로 수연이가 이기지.”
그리고 성현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김민지가 기량 차이를 어떻게든 버텨 낸 건 그의 말마따나 어디까지나 공격을 거의 하지 않고, 방어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한데 1점을 이미 뺏긴 상황에서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공격에 나선 김민지는 수연과의 기량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수연이 시도한 손목-머리-허리의 3단 치기에 그대로 한판을 내주고 말았다.
“청색 허리! 시합 끝!”
「강수연 선수 2 대 0으로 김민지 선수를 물리치고, 자신이 이번 연도 여자 고교 검도 선수 중 최고의 유망주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걸로 2년 연속 여자부 최고 유망주는 광천고등학교 여자 검도부에서 가져가는군요. 역시 전통의 강호라고 할 만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꺄-! 수연이 우승!"
수연이 우승을 거머쥐는 걸 본 성하가 신나서 피켓을 흔들었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하윤도 후배가 자신의 뒤를 이어 우승을 한 게 기쁜 듯, 밝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럼 이제 나도 가 볼게.”
쏟아지는 박수 갈채 속에서 결승전을 치른 수연과 김민지가 물러나는 것을 본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잠깐의 휴식 시간 이후, 그가 출전하는 남자부 결승이 진행되는 까닭이었다.
곧바로 수연이에게 우승을 축하해 주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결승을 미룰 수는 없었으니까.
“너도 우승하고 와라. 수연이한테 안 부끄럽게!”
“힘내! 꼭 우승하고 와!”
“예, 하윤 선배. 꼭 우승하겠습니다.”
“뭐야, 내 말은 왜 무시해!”
“그래, 그래. 알았어. 힘낼게.”
성현은 성하와 하윤의 응원을 뒤로한 채 장비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시끌시끌한 관객석을 지나, 경기장으로 내려온 그는 매트 위에 정좌한 채 가져왔던 호구를 차분한 손길로 착용했다.
시합 시작 전, 각자 경기장 옆에 놓인 매트 위에서 호면과 호완을 착용했던 이전 경기와는 달리, 결승전은 착용한 상태로 가서 곧장 시합이 시작되는 까닭이었다.
면수건을 쓴 뒤, 호면의 끈을 질끈 묶고, 이내 호완까지 착용을 끝냈을 무렵. 스태프 한 명이 그를 향해 다가와 시합 준비가 끝났냐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내쉰 성현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났습니다.”
성현의 대답을 들은 스태프가 떠나고, 얼마 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성현은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내리쬐는 조명의 환한 빛, 관객석의 시끌시끌한 소리, 심판의 매서운 시선까지,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압박하려 들었다.
준결승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결승전만의 위압감!
그러나 그 앞에 선 성현은 되레 미소 지었다.
‘그리운 느낌이구나.’
모름지기 대회라면 이 정도 압박감은 당연한 일.
‘전’에는 적지인 일본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까지 나갔던 성현이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 결승전의 압박감에 무너질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는 이 알 수 없는 압력을 반겼다.
이제야 비로소 대회에 나왔다는 실감이 든 까닭이다.
“······.”
그리고 저 투지에 불타는 시선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성현이 저런 시선과 마주하는 것도 거의 이십여 년 만이었다.
오십 대까지는 대회에 나가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성현도 결국 육체의 열화를 이겨 내지 못하고 대회 참가를 줄여 나갔기 때문이다.
다른 이와 겨루기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보다 갈고닦는 방향으로, 그렇게 검도 하기를 이십 년이 훌쩍 지났으니까.
그래서 백지호가 드러내는 투혼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청색, 백색. 인사!”
다소 떨어진 거리에 선 성현이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투쟁심에 불타던 백지호도 마찬가지.
당장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어찌 되었든 상호 간에 예를 취하는 건 그만큼 검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었으니까.
「남자부 결승 경기입니다! 광천고의 이성현 선수, 경중고의 백지호 선수가 결승에 올라왔습니다.」
「대회에서 가장 큰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올라온 선수와 전년도 대회 우승자의 동생이 맞붙네요. 과연 어느 쪽이 승리를 거머쥘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
인사를 마친 성현이 천천히 시작 선에 다가갔다.
그 앞에 선 그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고, 곧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그가 자세를 취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목덜미를 세워 턱을 당긴다.
오른손이 이마와 대각선 앞으로 한 주먹 떨어진 거리에서 죽도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은 그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손잡이의 끝부분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앞으로 반보 앞서는 것은 왼발이며, 뒤로 물러선 오른발은 당장이라도 땅을 박찰 수 있을 것처럼 반쯤 뒤꿈치를 든다.
그리하여 죽도는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다.
당장이라도 떨어져 내릴 벼락과도 같이.이것을 검도에서는 상단세(上段勢)라 칭하니.
천지인(天地人)의 천(天)- 하늘의 자세이자, 오행의 다섯 가지 겨눔세 중 타오르는 불꽃처럼 공격적이라 하여 불의 자세라고도 하였다.
「어···. 상단세? 지금 이성현 선수가 기묘하게도 상단세를 취했습니다?」
「여태까지 계속해서 중단세만 취했던 이성현 선수가 갑자기 왜···. 상단세를 잘하는 선수였나요? 결승전까지 와서 상단세라니. 이게 대체 무슨···.」
“상단? 여기서 상단이라고?”
“대체 왜 저런 짓을···.”
“상대를 무시하는 짓 아닙니까, 저건!”
이번 대회를 통틀어 성현이 처음으로 보이는 자세에 모두가 당황했다.
지켜보던 중계진도, 관객석의 사람들도, 상대로 나온 백지호도, 심지어는 주변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던 심판들마저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태까지 중단세로 이겨 오던 그가 갑자기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상단세라니!
“······.”
하지만 성현은 그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백지호뿐이었다.
몸의 모든 신경이, 하나로 모인 정신이, 온전히 상대에게만 집중된 상태였기에.
그러한 그의 모습에 주심이 눈을 빛냈다.
지금 취한 상단세가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시 부심들과 시선을 나눈 그는, 이내 강한 힘을 담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작!”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