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점심 식사 >
*
“청색, 허리!”
남자부 8강 경기.
관객석에서 성현이 반격에 성공하여 득점하는 것을 본 하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절로 감탄이 나올 만한 대단한 실력이었으니까.
막아 내는 방어도, 거기서 곧바로 이어진 반격도 모두 말이다.
“성현 후배, 대단하지 않아요?”
“음···.”
짤막한 침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건, 하윤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었다.
각진 턱에 부리부리한 눈, 고집스레 굳게 닫힌 입까지, 그야말로 ‘무뚝뚝한 남자’를 형상화한 듯한 이 사내는 하윤의 아버지, 임정호였다.
한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거머쥐었던 현역 선수이며, 이제는 검도장 관장을 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힐끔 본 하윤이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화제의 중심이 될 줄은 몰랐어요.”
“으음···.”
“32강에서 대회 최단 득점 기록을 갈아치우고, 16강에서 우승 후보를 압살한 데다가, 8강도 무난히 통과···. 대단하죠?”
“으으음···.”
계속해서 침음만 흘리는 임정호.
그런 아버지의 의아한 반응에 하윤이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빠?”
“으으음-”
팔짱을 낀 임정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소 재능 있는 유망주들을 볼 때면 환한 얼굴로 웃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윤은 경기장으로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경기 진행이 뭔가 아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나 했기에.
“청색, 손목! 시합 끝!”
그러나 성현은 기어코 손목 치기로 2점째의 득점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가져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기술은 완벽, 그 자체.
가장 기본적인 기검체 일치부터, 마지막 존심까지 더할 나위가 없었다.
검도인이라면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 없는 모습이었건만···.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요?”
“아니,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최소한 내가 봤던 애 중에서는 제일 잘하는구나.”
“그렇죠? 아빠가 봤을 때도 그렇죠?”
“그래. 다만─”
임정호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해진 하윤이 잽싸게 물었다.
“다만, 뭐예요. 아빠. 빨리 말해 주세요.”
“저놈 저거. 관상을 보니 눈치가 없어 어지간히도 속을 썩일 팔자야.”
단정하듯 말하는 임정호.
마침 경기가 끝나, 호면을 벗고 있던 성현의 얼굴을 그는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경기 시작 전 묵상할 때 봤던 것처럼.
“···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에 하윤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갑자기 관상은 무슨 소리고 눈치가 없어 속을 썩일 팔자라는 건 또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검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무슨···.
하지만 그녀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임정호는 말을 이었다.
“여자 쪽이 먼저 다가서서 뭔가 하지 않으면 나이 일흔 넘어서까지 연애 한 번 못 해볼 놈이다.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어.”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빠!”
“게다가 여복이 얼굴 그득한 것이, 저 녀석과 엮이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래서 더 속 터지게 할 거다.”
하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자신의 아빠를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임정호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한참을 더 눈치가 없고, 여복이 터졌다는 걸 강조한 그가 하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아빠는 반대다.”
“뭐가요.”
슬슬 정신을 놓을 것 같은 기분이 된 하윤이 힘없이 되물었다.
“저놈이랑 만나는 거 반대라고.”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가 성현 후배랑 왜 만나요!”
“왜긴. 네 이상형이 너보다 검도 잘하는 남자애라며. 딱 저놈이잖냐.”
임정호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하윤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그렇긴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이상형을 자신보다 검도를 잘하는 남자라고 말하고 다녔었다.
그것도 그냥 어중간하게 더 잘하는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한 사람.
그러나 여자 검도인 중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는 그녀를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남자가 존재할 리가 없잖은가.
이 탓에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사귈 생각이 없다’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였더랬다.
하지만 성현은 어떤가.
하윤이 평소에 떠들고 다니던 이상형과 완전히 일치하는 실력을 갖췄고, 얼굴도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실로 금상첨화라 할 만했다!
‘하지만, 성현 후배는 수연이랑 사귀고 있을─’
-아, 아, 아- 아니에요! 남친이라뇨! 그, 아직 아니에요!
문득 하윤의 뇌리를 스친 건, 남자친구라는 말에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수연이 했던 말이었다.
아직 남친이 아니라는 그 말.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직 그녀에게도 한 번의 기회가 있다는-
‘아니! 기회는 무슨!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게 다 아빠가 이상한 소리를 한 탓이었다!
하윤이 날카롭게 뜬 눈으로 임정호를 바라볼 때, 임정호는 이제까지 침통한 표정이 장난이었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성현을 보고 있었다.
그는 성현이 ‘자신이 봤던 애 중에서’ 제일 잘한다고 말했지만, 실상 그것은 굉장히 낮춰 말한 것에 불과했다.
‘내가 본 검도인 중에서도 손꼽혀. 그것도 최소한 다섯 손가락 안에. 그런 느낌이 든다.’
상대가 고등학생이라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뿐.
만약 성인이 상대였다면 어떨까.
그것도 현역 선수급인 상대였다면?
상대를 바꿔 가정해도 저 소년이 패배하는 그림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임정호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수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성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아빠는 반대다.”
“그러니까, 아니라고요!”
*
“수연이야 원래 잘했다 쳐도··· 이성현 네가 뭔 일이냐. 준결승까지 진출하고.”
여자부에 이어 남자부 8강 경기까지 마무리되고, 점심 식사를 위해 주어진 휴식 시간.
관객석 아래쪽으로 내려온 성하가 성현을 보고 가장 먼저 한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성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나 재능 있다고.”
“당연히 구란 줄 알았지. 네 말을 어떻게 믿냐.”
“동생 말 하나 안 믿어 주다니. 슬프네.”
성하가 코웃음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현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린─물론 경기 중에는 정말 열심히 응원했지만─성하는 수연을 보았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녀가 수연을 자신의 품 안에 덥석 끌어안았다.
“우리 수연이~ 진짜 잘하더라!”
“언니이- 언니가 태워 주신 덕분에 이겼어요!”
“그래그래. 말도 잘 듣네. 이대로 우승까지 가서 소감으로 내 이름 말해 줄 거지?”
“물론이죠, 언니!”
실로 노골적인 차별 대우에 성현이 피식 웃었다.
성하는 늘 이상하게도 동생인 그를 대할 때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이곤 했다.
속으로는 분명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런 모습을 자주 보여 주고 있음에도 말이다.
‘설마 내가 눈치 못 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렇게 대놓고 행동하는데 그럴 리가!
···라고 생각한 성현이었지만, 그는 몰랐다.
그 기묘하게도 한 부분에서 눈치 없는 게 자신과 굉장히 닮았다는 것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하와 성현은 남매였다.
“슬슬 점심 먹어야지?”
“그럴까요? 혹시 언니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요 근처에 식당 확인해 볼게요.”
“그럴 필요 없어. 안 그래도─”
“-수연아!”
수연과 성하가 점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성하와 마찬가지로 관객석 아래쪽으로 내려온 하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함께 있던 임정호는 젊은 애들 사이에 껴서 뭘 하겠느냐며 사라져서 혼자가 된 상태로.
수연의 이름을 부른 그녀는 그 앞에 서 있던 성하를 보며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수연이랑 성현 후배의 같은 학교 선배인 임하윤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성현이 누나인 이성하라고 해요. 한데, 무슨 일로···.”
“후배들이랑 같이 식사나 할까 해서 왔는데···.”
하윤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관객석에서 내려오느라 성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다가온 게 실수였다.
다른 가족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냥 아빠와 식사를 했을 터인데···.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것일까?
성하가 시원하게 말했다.
“그럼 식사 같이하시죠.”
“네? 그래도 될까요?”
“괜찮아요. 안 그래도 엄마가 속 든든하게 채워야 한다고 엄청나게 챙겨 주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성하가 들어 올린 건 가방이었다.
일행의 시선이 가방으로 향했다.
성하는 보란 듯이 지퍼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손수 만든 것으로 보이는 샌드위치들이 한가득 들어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께서 성현과 수연의 대회라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하신 점심이었다.
“제, 제가 같이 먹어도 될까요?”
“안 될 거 없죠. 안 그래?”
“그렇지. 하윤 선배도 같이 드시죠.”
성하와 성현이 그렇게 말하고, 수연도 은근히 다가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자, 결국 하윤은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네 사람의 식사 시간.
그들은 관객석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 말하는 건 세 명의 여자들이었고, 성현은 조용히 귀를 연 채 샌드위치만 먹고 있었지만.
“그럼 저 녀석이 진짜 재능이 있다는 건가요?”
“네, 물론이죠. 천재라고 불러도 될 정도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하는 하윤을 본 성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성현이 경기에서 연달아서 이긴 건 보긴 봤다.
하지만 검도의 ㄱ자도 모르는 성하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이야 스스로 재능이 있네 없네 하지만, 그런 자신감은 걸러 듣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수연의 의견도 성현을 워낙에 좋아해 나쁜 말을 거의 안 하다 보니 썩 믿기 어려웠고.
그런데 지금 이 학교 선배라는 여자애도 재능이 있다고, 심지어 ‘천재’라고 해도 좋을 정도라고 성현을 극찬하고 있었다.
그제야 성현의 대단함을 실감한 성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미련한 동생을 바라봤다.
‘진짜 검도 잘하는 거였네···.’
“성현 후배는 기술적 완성도가 엄청나요. 행동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는 것도 대단하고. 보는 눈도 굉장히 뛰어난 데다가, 특히 전에 대련했을 때 본 건─”
열에 들뜬 얼굴로 성현을 추어올리는 하윤.
문득, 성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쏟아지는 칭찬 속에 담긴 기묘한 느낌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단순히 뛰어난 후배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뭔가 조금 다른 뉘앙스의─
“잠시만, 천천히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좀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데.”
하윤에게 샌드위치를 건넨 성하가 말했다.
“저는 수연이 편이에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하윤.
성하의 말뜻을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수연이 편입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아닌가?’
성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하윤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곧 그녀는 자신이 느낀 게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성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 하윤 선배? 바로 앞에서 그렇게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면 낯부끄럽습니다만···.”
“왜? 사실이잖아.”
“맞아, 맞아! 잘하니까 잘한다고 하지!”
능청스러운 하윤의 대꾸에 꼽사리 낀 수연이 잽싸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화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결국, 성현은 입을 다물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그들의 대화 주제는 곧 대회의 다음 경기 상대로 이어졌다.
그들에 대해 미리 알아 온 하윤이 청산유수처럼 정보들을 쏟아냈다.
“준결승 상대는 상포고 2학년이야. 작년에 출전 안 했었나 봐. 나름대로 실력 있는 상대라 하더라. 그리고 결승 상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아마 백지호가 올라올 것 같아.”
“백지호면, 전에 경중고 연습 경기에서 상대였다는 사람이죠? 그때 성현이가 이겼었잖아요.”
수연의 질문에 하윤이 긍정했다.
“맞아. 아마 제대로 칼을 갈고 준비했을 거야. 한 번 이겼다고 방심해서는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현이 불쑥 말했다.
그의 두 눈에 새카만 불꽃이 피어올랐다.
“결승에서는 제대로 해 볼 생각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