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얼마 안 걸린댔지? >
*
남자부 경기가 시작하기 얼마 전.
“여자부 쪽은 예상했던 대로 C조의 강수연 선수가 주목할 만하더군요. 그 외에는 A조의 백라윤 선수, D조에서는 이채원 선수 정도. 나머지는 볼 필요도 없어요.”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읊조리듯 말했다.
검은 정장을 입고, 테 없는 안경을 쓴 그녀는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싸늘한 어조만큼이나 선수들을 평가하는 내용도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쭉 경기해 온 서른두 명의 선수 중 세 명을 제외하고는 ‘볼 필요도 없다’라고 하였으니.
스스슥.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재빠르게 수첩에 펜을 놀려 여인의 말을 받아적었다.
그녀가 고른 ‘후보’들의 이름을 적기 위함이었다.
C조의 강수연, A조의 백라연, 이어 D조의 이채원까지 적던 남자가 문득 펜을 멈추더니 말했다.
“D조의 이채원 선수는 ‘리다스’ 측에서 먼저 접촉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리다스에서?”
“예. 접촉 이후 쓰던 장비가 바뀌었다고 하니, 이미 계약을 체결한 게 아닐지···.”
남자의 말에 여성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안경을 쓱 추켜올렸다.
그녀가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리다스가 이미 접촉했다, 라···. 강수연 선수는 안 될 것 같으니 그쪽이라도 먼저 손을 써 보겠다는 거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일단 주시만 하고 있으세요. 계약 체결이 아니라 단순히 선물로 준 장비일 수도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대답했다.
지극히 공손한 자세였는데, 여인의 직급이 그만큼 남자와 비교하면 월등히 높았던 까닭이었다.
심지어 단순히 직급만 높은 게 아니라 능력 또한 출중하니, 상사로서 존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현 스포츠용품 업계 1위 ‘언더키’의 마케팅부 산하 선수후원기획팀 팀장 천수아.
그게 바로 여인의 정체였다.
[남자부 경기 곧 시작합니다. A조 배치되신 남자부 선수분들은 경기장으로 와 주십시오!]
“혹여나 강수연 선수에게 다른 업체가 접촉하려는 것 같으면 즉시 개입하라고 전달하세요. 저는 계속 경기를 보고 있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천수아가 다시금 경기장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서류상으로 A조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별 볼 일 없다 해도, 그녀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기에.
그렇게 경기장을 쭉 훑어보던 그녀의 눈에 문득 들어온 건 이제 막 경기를 시작하려 하는 A조 2번 경기장이었다.
“으음···?”
‘저 선수, 뭔가 이상한데···.’
천수아는 수많은 선수를 보고 그들의 재능을 평가하여 후원 계약을 제의해왔다.
어지간히 보는 눈이 뛰어나지 않고서는 사람의 재능을 평가하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사람을 평가하는 눈이 너무나도 대단했기에.
그게 얼마나 뛰어난지는,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에 쌓은 성과만으로 ‘언더키’의 팀장 직급까지 올랐다는 것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물론 거기에는 그녀가 현 언더키의 회장 손녀라는 게 얼마간 영향을 미치기는 했을 테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그녀의 보는 눈은 뛰어났다.
그런 그녀의 눈에 A조 2번 경기장의 청색 매트에 정좌한 선수가 계속해서 밟힌 것이다.
‘저 선수를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어린 유망주를 평가할 때, 보통 사람들은 ‘원석’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아직 갈고 닦지 않은 보석이라는 뜻이다.
재능만 가지고 경험을 쌓지 못해 성숙하지 못한 유망주에게는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천수아가 보기에 저 선수는 뭔가 달랐다.
‘원석 같은 느낌이 아니야. 오히려, 그보다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장인이 모든 힘을 쏟아 갈고 닦은 최고의 보석.
A조 청색 매트 위의 선수, 이성현에게서 천수아가 받은 인상은 그랬다.
‘A조 2번 청색이면···. 분명 광천고등학교 출신이라고 했는데.’
“저 선수, 혹시 별달리 보고된 것 없나요?”
“아- 이성현 선수 말씀입니까?”
천수아가 성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첩을 빠르게 뒤적거리던 남자가 이내 살짝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얼마 전 광천고와 경중고 연습 시합 때 주전으로 출전했다고 합니다. 출전 순서, 경기 상대, 결과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광천고와 경중고의 연습 경기면··· 무승부라는 결과만 알려진 경기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왜 그 사실이 제게 보고되지 않았죠?”
서늘한 천수아의 추궁에 남자가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관련 사항에 대해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터라···.”
“···알겠어요.”
짤막하게 대꾸한 천수아는 계속해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성현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재’로 유명한 백성호를 봤을 때조차 이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진대!
기대감에 천수아의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보여 줘, 당신의 재능을.’
열기에 찬 시선으로 성현을 바라보는 천수아.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듯, A조 2번 경기장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시작!”
심판의 구령이 울려 퍼지고.
득점까지 걸린 시간은, 단 2초.
찰나라도 해도 좋을 짧은 순간을 똑똑히 보고 있던 천수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시작하는 공세도, 이어지는 머리치기도.
2초에 불과한 순간을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 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천수아는 열에 들뜬 표정으로 성현을 보았다.
주위의 술렁거림에도 담담히 중단세를 취한 채, 다시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녀는 확신했다.
‘반드시 잡아야 해.’
*
“두 판째!”
모두를 경악에 빠뜨린 충격적인 첫판이 지나가고, 이어진 두 번째 판.
상대를 마주한 성현은 단번에 깨달았다.
‘주눅 들었군.’
워낙 순식간에 한판을 빼앗겼기 때문일까?
상대 선수는 주눅 든 것을 넘어, 아예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당장 성현이 죽도를 쓱 움직이기만 해도 기겁해서 물러난 채 경계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검도는 막기만 한다고 해서 승리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특히나 한 점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더욱더.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승리하는 건, 먼저 한 점을 따낸 성현이니까.
“우랴아앗!”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상대 쪽에서 먼저 기부림과 함께 몸을 짓쳐 들었다.
결심은 좋으나, 칭찬할 수는 없는 공격이었다.
공세를 통해 상대의 중심을 흩트리지도 않고 그냥 무턱대고 들이밀어서 점수를 낼 수 있는 건 어지간한 상대뿐이니까.
성현을 상대로 이런 격자를 시도했다는 건 그냥 반격해 달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 해 줘야지.’
상대를 보는 성현의 눈동자가 새까만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에게는 자신을 향해 짓쳐 드는 상대의 모든 것들이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였다.
박차는 왼발, 내디디는 오른발, 죽도를 쥔 손, 휘두르는 팔의 궤적, 그 모든 움직임이 전부.
“하아아압-!”
기부림을 내지르며 마주 나아가는 성현.
그는 상대가 머리를 노리고 낸 죽도를, 자신의 죽도를 비스듬히 드는 것으로 가볍게 튕겨 냈다.
하지만 성현의 죽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듯이 부드럽게 궤적을 그리며 선회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이어지는 허리치기!
타악!그것은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받아 허리치기’였다!
상대의 머리치기를 완벽히 간파해야만 보여 줄 수 있는 기술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내질렀다.
성현이 첫 번째 ‘머리치기’를 통해 빈틈을 노리는 실력과 과감함을 보여 줬다면, 두 번째 ‘받아 허리치기’에서는 상대를 간파하는 눈과 뛰어난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 준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수준으로.
“청색, 허리! 시합 끝!”
주심이 청색 깃발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존심을 지키던 성현은 그제야 중단세를 풀고 죽도를 내렸다.
두 점을 내리 얻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는 그의 승리였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자, 마치 거대한 파문이 일듯이 구경꾼들이 와글와글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쟤 광천고라며. 근데 뭐야, 저건!”
“와, 받아허리 진짜 미쳤다···.”
“광천고 남자 검도부면 아직 언더키랑 계약 안 한 거지? 빨리 알아봐!”
순수하게 실력에 감탄하는 사람.
광천고라는 사실에 다시금 경악하는 사람.
후원 계약을 맺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성현의 경기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단 한 번의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그가 보여 준 실력이 대단했다는 뜻이리라.
하기야, 첫 경기 첫판에서 대회 최단 기록을 갈아치우며 2초 만에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니···.
‘그럭저럭인가.’
물론 성현에게는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지만.
성현은 첫 번째 판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위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무덤덤하게 호면을 벗고 장비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주위 사람들, 특히 스포츠용품 관계자들이 애가 탈 지경이었다.
‘작년에 이어 나온 대어다!’
‘백성호는 언더키에 빼앗겼지만··· 쟤만큼은 어떻게든 계약해야 해!’
그러나 당장에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아직 첫 경기가 끝났을 뿐, 대회 도중이었으니까.
괜히 먼저 나서서 선수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그게 카메라에 촬영되기라도 한다면?
기업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한 후원이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
그랬기에 관계자들은 속 끓는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며, 동시에 주위에 있는 같은 업계 사람들을 견제하기에 바빴다.
“···얼마 안 걸린댔지?”
그렇게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성현이 향한 곳은 수연의 앞이었다.
별일 아니었다는 듯 무덤덤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옆에 앉는 성현을 본 수연이 키득대며 웃었다.
이런 관심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역시나 성현이다 싶었기에.
“···왜?”
“아냐. 아무것도.”
고개를 내저은 수연은 자연스럽게 성현의 오른팔에 매달렸다.
경기에 출전하기 전에도 똑같은 자세로 있었던지라, 성현은 역시나 아무 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주위에 어떻게 보일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로.
애초에 그런 걸 생각할 만한 눈치라는 게 있었으면 그가 칠십 년이 넘도록 모태 솔로로 지내지도 않았으리라.
오직 검도에만 모든 것을 바친 탓에,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아예 말소되어 버린 탓이다.
“참, 첫판 머리치기 대회 최단 시간 득점 기록이래. 1초 76 정도 걸렸다더라.”
수연이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그래? 생각보다 빨랐네.”
“응응! 대단해~”
“근데 어차피 이제 2회밖에 안 된 대회잖아. 기록이 의미가 있나?”
“그래도 대단한 건 맞잖아!”
자신을 대신해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는 수연을 보며 성현이 피식 웃었다.
과거로 돌아온 후에야 느끼는 거지만, 수연은 정말 강아지 같은 매력이 있는 소녀였다.
사소한 일에도 기뻐하고, 남의 일에도 자기 일처럼 즐거워할 줄 안다는 이야기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단지 그가 이겼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처럼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단순히 그것 하나만으로 수연이 이처럼 기뻐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
“광천고가 이겼다고?”
“그래. 장난 아니었다더라. 대회 최단 시간 득점 기록도 갈아치웠다던데?”
“이 대회에 그런 것도 있었어? 아니, 그보다 뻔하네. 그런 기록까지 내줬으면. 그냥 상대가 약해서 운 좋게 이긴 거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