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거대한 파문 >
*
“올해는 여자부 경기가 먼저인가. 참, 수연이 너는 몇조 경기랬지?”
“C조 3번 경기!”
“C조? 그럼 다다음 조네. 그래도 바로 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다.”
“응응!”
네 개로 나뉜 코트를 봤을 때 성현이 예상했던 대로, 고교 검도 유망주 대회는 A, B, C, D 각 네 개의 조로 나뉘어 치러졌다.
그리고 수연의 경기 순서는 C조 3번.
즉, 현재 치러지는 A조 경기와 그다음에 있을 B조 경기가 끝난 이후에야 그녀의 차례가 온다는 이야기다.
그건 다시 말해 혹시 있을지 모를 긴장을 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맞다, 성현이 너 관객석의 성하 언니 봤어?”
“응. 봤어. 눈에 확 띄어서 안 볼 수가 없더라.”
수연이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과연 성현의 말대로였던 까닭이다.
그만큼 큰 피켓을 한 개도 아니고 무려 두 개나 들고 있다니.
관객석을 한 번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죄다 성하의 모습이 뇌리에 각인되고 말았으리라.
“나 언니가 피켓 들고 있는 거 보자마자 빵 터졌잖아. 역시 성하 언니다 싶더라.”
“나도 그래.”
“···솔직히 말해서, 살짝 부러웠어. 나는 외동이니까, 그렇게 응원해 줄 언니나 동생이 없잖아.”
수연의 이야기를 들은 성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응원해 줄 언니나 동생이 없으면, 대신 응원해 줄 사람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럼 내가 응원해 줄게.”
“응?”
“생일은 내가 더 빠르잖아. 오빠가 응원한다고 생각하고 힘내.”
정말이지, 엉망진창인 논리였다.
물론 성현도 진심으로 그리 말한 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형제자매의 응원을 바라는 수연을 격려하기 위해 한 농담이었을 뿐.
그것을 알고 있는 수연은 꺄르륵 웃고 말았다.
“뭐야- 나보다 생일 한 달밖에 안 빠르면서.”
“한 달이면 충분히 오빠지.”
“아니거든! 아무튼, 응원은 고마워. 힘내 볼게.”
주먹을 꼭 쥐며 배시시 웃는 수연.
꽃이 피어나듯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에 성현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둘이서 얼마나 떠들고 있었을까.
곧 잠실 학생 체육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C조 경기 곧 시작합니다! C조 배치되신 여자부 선수분들은 경기장으로 와 주십시오!]
“내 차례다! 갔다 올게!”
“그래. 힘내고, 꼭 이겨. 같이 우승해야지.”
“응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수연이 자신이 경기를 치를 장소로 달려갔다.
네 개로 나뉘어 있는 코트 중 세 번째 경기장.
이제 막 B조 경기가 끝난 듯 어수선한 분위기에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그녀가 두리번거리고 있자, 스태프 중 한 명이 잽싸게 다가왔다.
“C조 3번 경기에 출전하시나요?”
“네, 네! 맞아요!”
“정유화 선수?”
“아뇨, 강수연이에요!”
“강수연 선수···. 네, 확인했습니다. 청색이시네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스태프의 인도에 따라 이동한 곳은 3번 경기장의 좌측, 청색 매트가 깔린 곳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이미 여러 대회를 나가며 좋은 성적을 거둔 바 있는 수연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가져온 호면과 호완, 죽도를 내려두며 정좌했다.
익숙한 듯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스태프도 별말 하지 않고 사라졌고, 덕분에 그녀는 차분하게 시합을 대비할 수 있었다.
“후우우- 좋아.”
수연이 작게 속삭이며 호흡을 골랐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성현이와 즐겁게 대화했었기 때문일까?
경기 직전이면 늘 몸을 굳게 만들었던 긴장감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까지 치렀던 어느 경기 때보다 더 몸 상태가 좋았다.
마치 성현이 해 준 응원이 효과를 발휘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이성현.
그 이름을 떠올린 수연의 얼굴이 묘해졌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을 알고 지낸 소꿉친구이자, 그녀가 은근히 마음에 품고 있는 사내아이.
‘요즘 많이 변했지.’
수연은 성현의 변화를 분명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았고, 또 그만큼 가까이 지낸 사이다.
그의 변화를 깨닫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굳이 그녀가 그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지금의 성현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매일 다투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무리 수연이 성현을 짝사랑한다고 해도, 말만 걸어도 투덜대거나 심술궂게 무시하는 행동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럴 때면 더 속이 상하고 화가 나곤 했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다투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변한 성현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은근히 그녀를 존중해 주기도 했다.
평소에는 학을 뗐을 팔짱도 별말 없이 받아 주었으니 말 다 했다.
마음에 품은 상대가 괜히 짓궂게 대하는 것과 친근하게 대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을 택할지는 뻔한 노릇 아닌가?
괴롭힘당하는 걸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후자를 택하리라.
그것은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둘째는, 변화 속에서도 성현이 이상한 곳에서는 예전과 완벽히 똑같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눈치 없는 거.’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도.
말수가 이상할 만큼 적어져도.
또 은근히 할아버지같이 행동할 때조차도.
딱 그거 하나만큼은 예전의 성현과 똑같았다.
아무리 변해도 성현은 성현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수연은 성현에게 왜 변했냐고 묻는 대신, 가만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든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기에.
‘그래, 맞아.’
성현이 변해도, 그녀는 변하지 않는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언제나 그랬듯이.
“─준비 끝나셨나요?”
“네? 아, 네! 끝났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수연을 일깨운 건 어느새 다가온 스태프의 물음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스태프가 경기장 중앙에 서 있던 주심에게 다가가 무어라 속닥거렸다.
곧이어 주심이 양손에 있는 깃발을 들어 올렸고, 그것을 본 수연이 미리 꺼내 둔 죽도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 하얀 매트에 있던 상대 또한 마찬가지.
각자 정좌하고 있던 매트에서 두어 걸음 걸어 나온 그들을 보며 주심이 강하게 소리쳤다.
“청색, 백색, 인사!”
수연과 상대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가까이 다가와, 미리 흰색 테이프로 표시해 둔 시작 선에서 죽도를 들어 중단세를 취했다.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주심이 강한 어조로 구령을 외친 건 그때였다.
“시작!”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
직후, 수연의 눈빛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방금까지 짝사랑하던 사내아이를 생각하던 소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확연한 변화.
그곳에 있는 건 이제 사랑에 빠진 소녀가 아니라, 수많은 여자 고등학교 검도부원 중 천재 칭호가 허락된 단 두 명뿐인 검도인이었다!
“스으읍-”
차분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수연.
주말 동안 항상 성현과 함께 눈을 트는 훈련을 했던 덕분일까?
상대의 몸짓이 유독 잘 보이는 기분이었다.
느릿하게 내디디는 발도, 흔들리는 죽도의 끝도, 호면 속에 가려진 상대의 얼굴까지도.
그 끝에 든 건 확신이었다.
‘칠 수 있어.’
그리하여, 수연이 움직였다.
“히야아앗-!”
타악!
강한 힘을 담은 기부림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겨눠진 죽도의 끝을 쳐내듯 내리누른다.
상대는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건 다시 말해 다음으로 이어진 수연의 공격도 막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오른발을 빠르게 내디디는 것과 동시에 양팔을 쭉 펼치는 찌름!
“꺄악!”
비명과 함께 상대의 몸이 뒤로 밀쳐질 때.
수연은 재빠르게 내밀었던 죽도를 거두며 중단세를 취한 채 물러섰다.
상대가 든 죽도가 무안하게 만드는 존심이었다.
이것을 한판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걸 한판으로 인정하랴.
“청색, 목!”
주심이 청색 깃발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던 부심 두 명도 마찬가지.
심판 세 명의 의견이 전혀 갈리지 않는, 만장일치의 찌르기 득점이었다.
“와, 찌르기 빠른 거 봐라.”
“쟤가 그 임하윤 후배 아냐?”
“설마 2회도 여자부는 광천고가 먹나?”
주위에 있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안 그래도 광천고 여자 검도부 소속이라는 점으로 인해 주목받고 있던 수연이 깜짝 놀랄 만한 완벽한 찌름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떠한 대처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번개 같은 공세와 찌름.
대회에 출전하여 다른 이들의 전력을 염탐하고 다니던 선수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처음의 공세에서 밀리지 않는다면···.’
“두 판째!”
심판의 구령과 함께 시작된 두 번째 판.
그러나 첫 번째 판에서의 찌름이 너무나도 강렬했던 탓일까?
상대는 주눅 들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수연은 어렵지 않게 공세로 상대를 압도한 뒤, 머리치기로 한판을 따낼 수 있었다.
“청색, 머리! 시합 끝!”
가볍게 32강 경기 승리!
상대와 마주 인사를 한 수연이 다시 매트 위에서 호면과 호완을 벗고, 죽도를 집어 들었다.
여자부 32강 이후 남자부 32강, 그리고 다시 여자부 16강이 진행되는 만큼, 당장은 그녀가 치러야 할 경기가 없는 까닭이다.
정리를 마친 그녀는 코트 한쪽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성현에게 호다닥 달려갔다.
“이겼어~”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환하게 미소짓는 수연.
성현이 그녀를 반겨 주며 무어라 말하려 할 때, 그녀가 그에게 덥석 안겨들었다.
정확히는, 그의 오른팔을 확 휘감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는 표현이 옳았지만, 그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성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왜 그래? 혹시 다쳤어?”
“아니, 그냥-”
고개를 저은 수연이 배시시 웃었다.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근래 그녀가 자주 자신의 팔에 매달렸던 것을 떠올린 성현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넘어갔다.
그냥 팔을 붙들 뿐, 딱히 무어라 나무랄 행동도 아니었으니까.
그게 그녀의 진짜 노림수라는 것도 모르고.
‘눈치 없는 건 여전하다니까.’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성현을 보며 수연이 눈을 빛냈다.
성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상하였다.
그렇기에 이전부터 계속해서 대놓고 팔짱을 낀 것이니까.
지금 이건, 성현에게 그녀의 마음을 어필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굳이 이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간단했다.
‘방송에는 나가지 않지만, 아이튜브에는 찍은 영상이 올라간다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수연은 자신에게 따라붙은 시선들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사람들의 눈뿐만 아니라, 그녀를 찍고 있는 카메라들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촬영된 영상에서 수연과 성현이 노골적으로 친한 모습을 보이고, 그게 아이튜브에까지 올라가면, 이야기는 끝이다.
‘이대로만 가자···.’
눈치가 없다고?
그럼 깨닫기도 전에 기정사실로 만들면 그만.
성현의 팔을 잡은 수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호선을 그려 냈다.
아무리 어리숙하고 바보 같아 보인다 해도 그녀는 사랑에 빠진 소녀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소녀는 강했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
[남자부 경기 곧 시작합니다. A조 배치되신 남자부 선수분들은 경기장으로 와 주십시오!]
“내 차례네. 갔다 올게.”
“응응! 이기고 와~”
“그래. 얼마 안 걸릴 거야.”
담담히 대답한 성현이 경기장으로 향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에게 주어진 깃발의 색깔은 수연이와 같은 청색이었다.
매트 위에서 성하가 준 면수건을 머리에 감은 성현은 차분하게 호면과 호완의 착용을 끝냈다.
‘······.’
한 번만 져도 탈락인 시합을 앞두고 있지만.
성현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전’에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조차 떨리지 않았던 마음이 이제 와 흔들릴 이유가 없으니까.
주심이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청색, 백색, 인사!”
동시에 허리를 숙이는 성현과 상대.
인사를 끝낸 성현은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선 상대를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마치 상대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이.
중단세를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약해.’
성현은 직감했다.
상대는 자신보다 약하다고.
하기야 지금 여기서 그보다 강한 이가 과연 누가 있을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백지호조차 이미 그가 한 번 꺾었을진대!
‘빠르게 끝내자.’
그렇다면, 시간을 길게 쓸 필요도 없으리라.
성현의 눈에서 새까만 번갯불이 튀어 올랐다.
“시작!”
심판의 구령이 끝나기 무섭게.
성현이 자연스럽게 한 발을 내디디며 상대의 죽도에 자신의 죽도를 얽은 채 내리눌렀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정확히 1초.
“하아아앗-!”
이어, 강렬한 기부림과 그에 못지않은 머리치기!
최적의 움직임으로 행해진 머리치기는 그야말로 ‘번개같이’ 빨랐다.
일개 고등학생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만큼.
타악!
설령 중단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대처하기 어려웠을 텐데, 처음의 공세로 죽도를 눌렸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상대는 그대로 성현의 죽도에 머리를 강타당하고 말았다.
“청색, 머리!”
심판이 청색 깃발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득점을 성공시키는 모습에 경기를 지켜보던 인물들이 한순간 술렁였다.
설마 약소부로 유명한 광천고에서 출전한 선수가 이토록 빠르게 한판을 따낼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심지어 득점에 걸린 시간은 놀랍게도 단 2초!
웅성대는 소리에 “대회 최단 기록 아냐?”라는 말이 슬그머니 섞였다.
“······.”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현은 다시금 시작 선으로 가서 섰다.
그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무덤덤했다.
아직 제대로 보여 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가 일으킬 거대한 파문은.
바로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