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23화 (23/150)

< 23화: 개회식 >

“갈 준비는 다 했니?”

“네. 이제 나가면 돼요.”

“혹시라도 두고 가는 물건 없게 꼼꼼히 살피려무나. 알겠지?”

“물론이죠.”

자신감 넘치는 성현의 대답에 만족한 것일까.

작게 웃은 어머니가 방을 나섰고, 그제야 성현은 어젯밤 미리 챙겨 두었던 짐들을 하나씩 집어 들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역시나 호구가 들어 있는 스포츠 백과 죽도집이었다.

당장 이제부터 가야 할 곳이 검도 유망주 대회가 개최되는 장소인 서울 잠실 학생 체육관이며, 그곳에 가는 게 대회 참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호구는 잘 있는지, 죽도는 예비용까지 두 개가 전부 들어가 있는지를 확인한 그가 두 개의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따로 더 챙길 건··· 없나?’

혹시 몰라 몇 차례 더 방 안을 휙휙 둘러본 성현이었지만, 더 챙길 만한 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제야 만족한 그가 방을 나서니 뾰로통한 표정의 성하가 성을 냈다.

“왜 이리 늦어?”

“미안, 혹시 안 챙긴 거 있나 해서 확인하느라.”

“으휴- 그러게 어제밤에 제대로 챙겼으면 그럴 일 없잖아.”

“미안, 미안.”

투덜대는 성하에게 성현이 웃으며 사과했다.

딱히 그녀의 태도에 화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현은 성하가 말은 거칠게 해도 본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그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잠실 학생 체육관까지 차로 태워 데려다주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그녀가 그 역할을 자처했다는 걸 보면, 투덜거리는 것 정도야 귀엽게 넘길 수 있었다.

‘말이야 수연이 태워 주는 김에 같이 태워 주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아마 성현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성하만이 모른다고 생각할 터.

이상한 곳에서 눈치 없는 게 그들이 어째서 남매인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참, 맞다. 야. 이거 가져가.”

“응?”

성하가 툭 내던진 물건은 한 장의 천이었다.

진한 남색에 무심(無心)이라는 두 글자가 흘려지듯 쓰여 있는 제법 고급스러운 천.

‘이건···.’

성현은 그것이 호면을 착용할 때 먼저 쓰는 검도용 면 수건임을 금방 깨달았다.

손에 면 수건을 든 그가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성하의 미간에 깊은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기껏 대회 나간다 해서 큰맘 먹고 선물 주는 거니까 1회전 탈락 같은 거 하지 마라. 알겠냐?”

“···응, 그래. 알았어. 꼭 우승까지 할게.”

“우승은 개뿔. 그냥 쪽이나 팔리지 마.”

“얘는! 동생한테 말이 그게 뭐니!”

어머니께 타박을 들은 성하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휙 돌렸다.

“먼저 나가서 차 빼 놓을 테니까 빨리 나와! 오는 길에 수연이도 데리고 오고!”

“응. 그럴게.”

성하가 거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현이 이내 킥킥대며 웃고 말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그녀가 그를 굉장히 아끼고 있다는 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지금 그가 사용하고 있는 면 수건이 낡았음을 알고 대회 날 그걸 선물해 줄 정도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역시 누나야.’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렴. 대회 힘내고.”

“네, 우승까지 할게요.”

성현의 호언장담에 어머니께서 물었다.

“우승까지면··· 방송으로 볼 수 있는 거니?”

“물론이죠.”

“S 방송 채널 맞지?”

“네. 거기서 오후 2시부터 방송 예정이래요.”

“그럼 미리 녹화 준비를 해 둬야겠구나.”

출근한 아버지도 보고 싶어 하실 거라며, 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께 다시금 인사를 드린 성현은 면 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꺼내 수연에게 코코아톡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현: 지금 나오면 돼]

[수연: ㅇㅇ]

[수연: 바로 나갈게!]

[수연: (찹쌀떡이 출발! 하고 외치는 이모티콘)]

성현이 메시지를 확인하고 일 분쯤 지났을까.

옆집 문이 벌컥 열리며 그와 마찬가지로 호구가 든 스포츠백과 죽도집을 양어깨에 멘 수연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듯한 속도였다.

복도에 서 있는 성현을 본 그녀가 물었다.

“혹시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톡 보내면서 나온 거야.”

“그래? 다행이다- 참, 성하 언니는?”

“누나는 아래서 차 빼 놓고 기다린댔어. 빨리 내려가자. 또 한 소리 들을라.”

성하의 불같은 성격을 알고 있던 수연이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그녀가 들고 있던 스포츠백을 넘겨받았다.

자신의 물건을 받기라도 하는 듯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수연은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겁지 않아?”

“아니, 별로. 이정도야 가뿐하지.”

무뚝뚝한 성현의 대답에도 수연의 볼에서 옅은 분홍빛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는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일지는 몰라도 수연에게는 굉장히 설레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것이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점에서 특히나 더.

“빨리 내려가자.”

“응응!”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내려간 성현과 수연을 맞이한 건 차 앞에 서 있는 성하였다.

그녀의 고갯짓에 따라 짐들을 트렁크에 실은 두 사람이 차에 오르자, 그제야 성하도 운전석으로 쏙 들어와 앉았다.

“안전벨트 매라.”

“네, 언니!”

“응. 알았어.”

잡담을 나누며 이동하기를 한 시간 남짓.

막히는 길 없이 달리니 잠실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목표했던 잠실 학생 체육관 입구에 성현과 수연을 내려 준 성하가 창문 너머로 말했다.

“차 대고 올 테니까, 너희는 먼저 들어가. 어차피 나는 관객석 쪽으로 가야 하니까.”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니!”

“고마워, 누나.”

“고마우면 대회에서 잘하기나 해.”

마지막까지 툴툴대듯 말한 성하가 차를 몰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언니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치?”

“그러네. 여기까지 태워 주기도 했으니까.”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실 학생 체육관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바닥과 벽에 붙어 있는 화살표를 따라 이동했고, 얼마 걷지 않아 여자부 대기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 앞에서 성현에게 자신의 스포츠백을 돌려받은 수연이 자그마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힘내자!”

“응. 힘내자.”

가볍게 눈을 맞추며 씩 웃은 성현과 수연.

수연이 여자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본 성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부 대기실은 여자부 대기실 반대편에 있는 만큼, 꽤 걸어야 했다.

다시 화살표를 따라 걸은 끝에 도착한 문 앞.

굳게 닫혀 있는 문에는 ‘남자부 대기실’이라는 명패가 보란 듯이 걸려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기에, 성현은 곧장 손을 뻗어 문고리를 쥐고 돌렸다.

벌컥.

──.

대기실로 들어서는 성현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강렬하게 날아와 꽂혔다.

경계와 탐색의 빛을 띠고 있는 눈빛이었다.

하긴, 그들의 처지에서 보면 성현 또한 쓰러뜨려야 할 경쟁자 중 한 명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약한 이라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위축되어 긴장할 터.

“······.”

하지만 성현은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겨우 어린애들 몇 명의 시선에 기죽기에는 그가 쌓아 올린 세월이, 그리고 그동안 갈고 닦은 정신적 수양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오히려 그는 느긋하게 방 안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이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무시하며 고개를 돌리거나, 투지에 불타 더 강렬한 눈빛을 쏘아 내거나, 그도 아니면 같잖다는 듯 비웃거나.

‘음?’

그중 한 명, 그나마 익숙한 얼굴을 찾은 성현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삼 주 전, 경중고와의 연습 경기 당시 임시 주장으로 출전했다가 압살당했던 백지호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랐던 성현은 곧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해에 일 학년이 되었으니까.’

작년에는 중학생이었던 만큼 고교 검도 유망주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을 터.

그럼 출전 자격이 있는 건 맞았다.

이곳에 있는 게 썩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백지호가 가진 바 재능을 생각해 보면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성현과 눈을 마주친 백지호는 사나운 얼굴로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지난번 겪었던 처참한 패배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복수전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마음가짐은 되어 있군.’

그것이 성현에게는 못내 만족스러웠다.

재능이라는 벽 앞에서 꺾이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그 모습이 검도의 길을 걷는 선배로서─지금은 아니지만!─실로 기특하였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응원을 해 주고 싶기까지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도발 같았기에 참았지만.

물론, 대회에서 상대로 만난다면 철저히 박살을 낼 생각이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작게 웃은 성현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고, 따로 마련돼 있던 탈의실로 가 검도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호면이랑 호완 빼고 호구를 착용한 상태로 개회식을 한다고 했지.’

미리 나눠준 대회 요강을 떠올린 성현이 갑과 갑상드리움까지 착용을 끝냈다.

그 뒤에는 여느 참가자와 다를 바 없이 대기.

벌컥!

“다들 이동하실게요!”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을 열고 들어온 스태프가 소리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참가자들이 스태프의 인도를 따라간 장소는 앞으로 경기가 펼쳐질 곳이었다.

한쪽 관객석 벽면에는 ‘2020 전국 고등학교 검도 유망주 대회’라고 쓰인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고, 중앙의 바닥 코트는 눈에 잘 띄는 검은색 테이프를 통해 네 개로 나뉘어 있었다.

오전 내에 세 경기를 끝내기 위해 여러 경기를 한꺼번에 하려는 것이리라.

“하하.”

관객석을 쭉 훑어보던 성현이 문득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성현 파이팅! 다 발라버려!]

, [수연아 언니가 너 아끼는 거 알지! 꼭 이겨!]라는 문장이 쓰인 큼지막한 피켓 두 개를 쥔 그의 누나, 이성하를 발견한 까닭이다.

드문드문 있는 관객들 사이에서 당당히 피켓을 든 채 서 있는 성하는 눈에 안 들어오려야 안 들어올 수가 없었다.

커다란 피켓을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가지고 서 있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둘 다 드는 건 무리였는지 하나는 바닥에 내려 세워두기는 했지만···.

‘역시 우리 누나야.’

그 외에도 기자나 업계 관계자들로 보이는 이들도 몇 보였지만, 성현은 금방 신경을 껐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이들은 아니었으니까.

“줄 맞춰 서 주세요! 네, 거기 서 주시고. 그다음 분은 여기!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두고, 네!”

여자부 인원들까지 코트로 나오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차례대로 간격과 줄을 맞춰 서는 남녀 선수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이동하던 성현은 여자부 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

인사를 하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가, 곧 주위 눈치를 보며 내리는 수연.

바보 같으면서도 귀여운 그 모습에 성현은 다시금 웃고 말았다.

그의 모습을 본 수연도 배시시 웃었다.

당장 만나서 떠드는 건 무리지만, 개회식이 끝나고 나면 각자 경기 시간 전까지 같이 다니기로 했으니, 그때 찾아가면 되리라.

“다들 이대로 서 있어 주세요!”

“개회식 바로 시작할 겁니다!”

대강 자리 배치가 끝나니 선수들을 줄 세우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자리를 비웠다.

그 뒤 이번 대회를 맡은 심판들이 제일 앞자리에 줄을 맞춰 서자, 비로소 개회식 준비가 끝났다.

따로 마련된 단상 위에 올라선 S 방송국 임원이 마이크를 툭툭 두들겨 보더니, 이내 말했다.

[아아- 그럼, 지금부터 제2회 고교 검도 유망주 대회 개회식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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