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재전 >
실제로도 하윤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3주 전 있었던 대련 때부터 쭉.
성현의 몸이 완성되는 순간만을 말이다.
그리고 김만석 감독이 녹화해 온 경중고와의 연습 경기 영상을 본 그녀는 깨달았다.
비로소 성현의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내가 그걸 뚫어 낼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3주 전에 있었던 대련.
더해서, 경중고 주장을 상대하는 성현의 모습도.
완성된 그가 보여 줄 실력을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완벽한 공세와 최소한의 움직임, 최저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최적의 방어!
그건 실로 철벽과도 같은 수비가 아닐 수 없었으니까.
그녀조차 그가 자멸하기 전까지 기회를 잡지 못하지 않았던가?
‘아니, 뚫어내야만 해.’
하윤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검게 변한 시야 너머로 흐릿하게 성현의 모습이 보였다.
위압감 넘치는 중단세를 취하고 있는 그 모습이.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3주간의 기다림이 드디어 보답 받는 기분이었기에.
“하아···.”
달뜬 숨을 뱉어 내는 하윤.
성현이 이전보다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더욱더.
그녀는 옆에 있는 인형을 꼭 껴안아 심장의 두근거림을 달랬다.
검도에 모든 것을 바친 소녀가 설레는 밤이었다.
*
주말의 첫 번째 날, 토요일.
‘강한’ 검도장.
약속했던 대로 모인 성현과 수연, 하윤 세 사람은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가볍게 잡담을 나누었는데, 이야기의 화제는 당연하게도 이제 2주가량의 시간이 남은 검도 유망주 대회였다.
애초에 그들이 함께 모여 훈련을 하는 것도 그 대회를 대비하고자 함이었으니까.
다만 대체로 말하는 쪽은 하윤이었다.
직접 출전했던 하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대회를 설명해 주면, 성현과 수연이 그것을 경청하는 식이었다는 뜻이다.
“유망주 대회는 크게 오전 오후로 나뉘어. 오전에 32강부터 8강까지, 오후에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는 거지.”
“하루 만에 끝나네요?”
“대부분의 검도 대회가 다 그렇지. 게다가, 유망주 대회는 고등부밖에 안 하니까.”
옆에서 하윤과 수연의 대화를 듣던 성현이 말없이 수긍했다.
확실히 많은 검도 대회가 하루, 혹은 이틀 정도의 일정을 잡고 진행되었기에.
가장 규모가 큰 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도 일정은 5일이지만, 경기하는 날은 그중 3일에 불과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이는 검도 경기 시간으로 인한 결과였다.
검도는 한 경기당 걸리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 봐야 십 분 내외이므로, 많은 경기를 한꺼번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2강 경기, 즉 열여섯 번의 경기를 차례대로 모두 치른다 한들, 2시간 안팎이면 끝나게 되니까.
한꺼번에 치른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생각보다 힘든 일정이 되겠네요.”
“응. 오전에만 3연전이니까. 그래서 체력 관리가 꽤 중요한 편이야.”
오전에만 32강, 16강, 8강 경기 세 번.
오후에는 준결승, 결승 경기 두 번.
하루에 총 다섯 번의 경기를 치러야 하니 유망주 대회 일정은 학생 선수에게는 제법 가혹한 면이 있었다.
한 경기는 빠르면 일 분, 길어도 십 분 내외로 끝난다지만, 거기서 소모된 체력을 회복하는 건 잠깐의 휴식으로는 힘든 일이기에.
그리고 그것은 심력 또한 마찬가지.
경기당 시간은 짧을지라도 그 시간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참, 그리고 방송에 나가는 건 오후 경기뿐이야.”
“네? 왜요?”
“종일 대회만 방송할 수는 없으니까? 남자부랑 여자부 준결승, 결승 경기만 해도 한 시간은 훌쩍 넘을걸?”
“그럼 오전에 지면 방송 못 나가는 거네요···.”
수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전국으로 나가는 방송을 통해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었는데, 그게 자칫 잘못하면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연의 반응을 본 하윤은 너희는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며 웃었는데, 왜 그러냐며 묻는 수연에게 하윤이 한 대답은 실로 간단한 것이었다.
“어차피 둘 다 우승할 거잖니.”
두 사람이 우승할 것이라는 사실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어조였다.
존경하는 선배의 장담에 수연이 주먹을 꽉 쥐며 의욕을 불태웠고, 성현은 흐릿하게 웃었다.
잘 정리해 내려두었던 호구를 집어 든 하윤이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훈련을 시작해 볼까?”
“훈련 방식은-”
“당연히 자유 대련이지! 성현이 너부터 하자.”
하윤의 지목에 성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본기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그들의 대회 대비 훈련으로 가장 적합한 건 대련을 통한 실전 감각 갈고 닦기였다.
실제로 성현과 수연이 지난주 주말에 훈련할 때도 대부분 대련을 했으니까.
“수연이 너는 성현이 다음으로 할 테니까···. 일단, 심판 좀 봐줄래?”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수연이 쪼르르 달려 도장 중앙으로 나왔다.
먼저 호구 착용을 마친 하윤이 한 쪽으로 섰고, 뒤이어 성현이 그녀의 앞에 섰다.
수연을 사이에 둔 채 거리를 두고 마주한 두 사람.
문득, 하윤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대련하는 건 3주 만이네.”
“···그렇네요.”
“전에 했을 때는 좀 싱겁게 결판이 났었지.”
하윤의 눈동자 속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지난번 대련에서 성현을 이기긴 했지만, 그게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승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제대로 단련하지도 않은 이를 억지로 찍어눌러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따라서, 이번의 승자가 ‘진짜’ 승자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지?”
“그럭저럭은요.”
“그럭저럭? 백지호인가 하는 애랑 경기하는 걸 보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던데.”
성현이 작게 웃었다.
“그냥 잔재주죠.”
“와- 상대를 반 죽여 놓고서 너무한 거 아냐?”
“아뇨, 진짜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윤 선배도 눈치채고 계시잖아요.”
“···들켰나?”
“네, 티가 좀 났습니다.”
잔재주라는 성현의 말은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상대가 공격을 시작하기 직전, 공세를 걸어 그 흐름을 끊는다.
듣기만 하면 굉장히 무시무시한 기술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에 대한 대처법은 무척 간단했으니까.
‘그냥 치고 나오는 거지.’
성현이 거는 공세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것.
애초에 칼끝으로 하는 공세에 담긴 힘이 아무리 강해 봐야 밀고 나오는 사람을 저지할 수준일 리가 없지 않은가?
백지호가 멈춰선 건 그 스스로 위축되어 발이 굳었기 때문일 뿐, 만약 그가 무시하고 나섰다면 공격을 시도할 수 있긴 했을 터였다.
그게 성공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뭐, 좋아.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하윤의 얼굴에 짙은 열기가 어렸다.
애써 냉정해지려 숨을 골라 봐도 숨길 수 없는 흥분의 빛이었다.
“꽤 많이 이 대련을 고대해 왔다는 거. 이번에는 제대로 붙어 보자.”
“알겠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며 허리를 숙이는 성현.
그를 보며 사납게 웃은 하윤이 허리를 숙여 마주 인사한 뒤, 중단세를 취했다.
검도장 안에 서늘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임시로 심판을 맡은 수연이 소리쳤다.
“시작!”
대련 시작을 알리는 구령.
성현과 하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기부림을 내지르지 않고 상대를 향해 서서히 다가섰다.
죽도의 끝, 선혁이 교차하는 일족일도(一足一刀)의 거리까지.
한 걸음 들어가면 상대를 공격할 수 있고, 반대로 한 걸음 물러나면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어 ‘타격 거리’라고 불리는 바로 그 거리였다.
이전의 대련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공세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탁! 타닥! 스윽, 탁!
격렬하게 맞부딪치는 두 개의 죽도.
서로를 짓누르고, 얽매고, 쳐낸다.
그중 하윤의 죽도는 사납고 거칠었다.
마치 ‘내가 더 강해!’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상대를 연달아 두들기고, 억누르면서, 중심을 빼앗으려 들었다.
반면, 성현의 죽도는 지극히 정적이고 고요했다.
‘철옹성 같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묵직하게 자신의 중심을 지키며 상대의 공세에 흔들리지 않고 역으로 기세를 점해 왔다.
완전히 정반대인 성향의 공세!
대개 이렇듯 반대되는 성향의 공세에서 우세를 점하는 쪽은 좀 더 숙달된 검사다.
바로, 지금의 성현처럼.
타악!
“읏···.”
성현의 죽도를 두들겨 치워 내려던 시도가 가볍게 파훼당하자, 하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격렬했던 공세 싸움에서 그녀가 열세에 처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본래 그녀는 칼끝을 계속해서 두들겨 빈틈을 찾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성현은 아무리 쳐도 지독할 만큼 틈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도저히 뚫을 방법이 보이지 않아.’
지난 대련과는 달리 악력을 충분히 키운 성현의 공세는 그야말로 철벽과도 같았다.
온갖 변칙적인 수를 써 봐도 마찬가지.
성현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받아쳤다.
공세의 완성도가 너무나도 높은 나머지, 하윤에게는 성현이 수십 년간 공세를 단련한 사람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기에 헛웃음만 내뱉었지만.
그리고 결국, 하윤은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끝으로 하는 공세로는 못 이겨.’
공세 싸움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먼저 나가서 친다!’
하윤이 눈을 부릅떴다.
“히야아아앗-!”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려 내지른 기부림.
왼발이 땅을 강하게 박차고, 그에 맞춰 오른발도 마룻바닥에 스치듯이 앞으로 내뻗는다.
이어 발을 구름과 동시에 들어 올렸던 죽도가 빠르고 사납게 휘둘러졌다.
성현의 오른 머리를 노린 머리치기!
하윤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을 증명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격자였다.
어지간한 고등학생은 감히 받아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타악!
물론, 성현은 어지간한 고등학생이 아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전진하면서 죽도를 비스듬히 세워 하윤의 격자를 받아 냈다.
머리 대신 죽도 좌측면을 강타하는 하윤의 죽도.
그야말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머리 받기’였다.
전의 대련에서는 단련이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방식의 받기를 이제는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야아아앗-!”
그러나 겨우 한 번의 공격이 막혔다고 좌절할 하윤이 아니다.
공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면 뚫을 때까지 계속해서 치는 성격이었기에.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타승법의 극한.
치는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길 때까지 치는 방식이었다!
타악! 탁! 타악!
성현에게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면면부절(綿綿不?)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끊어짐 없는 연속 공격!
한번 흐름을 잡으면 절대로 주도권을 내주지 않는 그 모습이 미래의 검도 여제라 불리는 임하윤을 떠올리게 했다.
“와아-”
오죽했으면 심판을 보던 수연이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하고 있을 정도.
그만큼 하윤의 연격이 놀라울 만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고작 3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때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무거운 검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천재다운 어마어마한 발전 속도였다.
그럼에도, 성현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하지만, 아직 어려.’
성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생각했다.
천재 검도 소녀니 뭐니 하며 띄워 준다 한들 하윤은 아직 고등학생 2학년에 불과하다.
확실히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게 보이기는 했지만, 딱 그뿐.
칠십 넘어서까지 검도를 한 괴물에 비해서는 경험도, 실력도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가 아직 단련이 부족한 몸이었다면 그녀에게 아직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니었으니까.
‘노리고 있구나.’
그 증거로, 성현의 눈에는 연이은 공격의 흐름이 끊어지는 구간이 뚜렷하게 보였다.
워낙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바람에 흐릿하게 가려져 있지만, 분명히 드러나는 빈틈이.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그는 알았다.
깊게 뿌리 박은 나무처럼 묵묵히 공격을 막고 흘려내던 성현이 움직인 건, 흐름의 끊어짐이 그에게 재차 드러난 순간이었다.
“하아아앗!”
대련 개시 이후 처음으로 내뱉은 성현의 기부림.
그가 몸을 낮추며 빠르게 앞으로 파고들었다.
덩달아 움직인 그의 죽도가 다소 높이 들어 올려진 하윤의 손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절묘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밑손목치기’.
수연마저 하윤이 꼼짝없이 성현의 반격에 당할 거라 생각했던 그 순간.
‘-드디어!’
하윤의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