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20화 (20/150)

< 20화: 새로운 바람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일렬로 늘어선 광천고와 경중고 주전들이 일제히 상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연습 경기의 끝을 알리는 인사였다.

성현은 백지호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뒀고, 두 감독의 협의로 대표전을 치르지 않기로 한 까닭에 결과는 무승부.

그러나 두 고등학교 주전들의 표정은 실질적인 승자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광천고 주전들은 하나같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반면에 경중고 주전들은 침울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말이다.

“······.”

특히나 얼굴이 검게 죽어 있는 건 경중고 주장 순서를 맡았던 이, 백지호였다.

패배, 그것도 손도 발도 못 쓰고 완패를 당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 탓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장은 무조건 승리해야만 하는 순서였건만, 뭐 하나 보여 주지 못하고 상대에게 박살이 나 버렸으니···.

‘몹쓸 짓을 한 기분이로구나.’

백지호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찬 성현이었지만, 다시 똑같은 상황에 부닥친다 해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상대 부원을 걱정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건 그에게 주장 순서를 맡겨 준 정철에 대한 모욕일 테니까.

그렇게 희비가 교차하는 선수들과는 달리, 두 감독은 모두 썩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중한 감독님.”

“예, 고생하셨습니다. 허허.”

환하게 미소지으며 악수하는 이중한 감독과 만석.

두 사람이 이처럼 만족스러워하는 건 이번 연습 경기로 그들 모두 꽤 괜찮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석은 검도에 무지한 그조차 알 정도의 강호 경중고와 비기며 검도부의 잠재력을 확인했고, 이중한은 생각지도 못한 괴물을 알게 되었으니까.

감독들에게는 WIN-WIN인 결과였다는 뜻이다.

“정말 좋은 연습 경기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중한 감독의 이 말은 거짓 하나 없이 진심 어린 것이었다.

만약 이중한 감독이 광천고 검도부를 아직도 눈 아래로 봤다면 달랐겠지만, 성현의 실력과 다른 주전들의 잠재력을 본 그는 이미 상대를 약자로 보고 있지 않았기에.

아직도 광천고를 인정하지 못해 약소부와 비겼다는 사실에 침울해하는 경중고 주전들과는 확연한 차이였다.

필시 연륜이라는 게 이런 것이리라.

“성호가 없어 대표전을 치르지 못한 게 정말 아쉽군요. 다음번에는 저희 쪽에서도 빠지는 인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 예!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마주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만석이 말을 이었다.

“다음번에도 연습 경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건 제 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군요. 허허.”

이중한 감독이 흘깃 광천고 주전들 사이에 선 성현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연습 경기를 다시 부탁하고 싶다는 것 또한 과장 하나 없는 이중한 감독의 진심이었다.

왜냐하면.

‘저 아이에 대해 더 알아야 해.’

갑자기 튀어나온 천재, 성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었으니까.

긴 감독 경력을 지닌 이중한 감독에게 성현처럼 갑자기 튀어나오는 천재는 익숙한 존재였다.

본래 천재라는 놈들은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녀석들이기에.

물론 저만한 괴물을 보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지만, 그거야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그가 갑자기 튀어나온 천재들의 방해에도 계속해서 이겨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상대에 대한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성현이라. 주시하고 있어야겠구먼.’

제일 좋은 건 차후 연습 경기를 한 번 더 치르며 상대를 가늠해 보는 것.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제고 밖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저 정도 되는 천재는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그것을 지켜보며 정보를 수집하고, 그에 맞춰 대응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 것.

그게 바로 이중한 감독의 스타일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시지요.”

만석의 말에 성현에게서 시선을 거둔 이중한 감독이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경중고 검도부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만석과 성현, 그리고 광천고 주전들은 버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입을 여는 순간 꾹 참고 있던 기쁨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쁘다고 해도 연습 경기 상대 팀이 있는 곳에서 난리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참고 참았던 감정은 광천고 주전들이 버스 안에 들어서는 순간 폭발했다.

“으아아아-!”

“경중고랑 무승부 실화냐고!”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밖에서 주전들을 들여보내던 만석이 화들짝 놀라 뛰어왔을 정도!

그러나 광천고 주전들은 만석의 반응 같은 건 신경 쓰지 못했다.

사실,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게 옳다.

그들은 지금 기쁨을 만끽하는 것만 해도 여념이 없었으니까.

“와, 진짜···. 설마 무승부가 될 줄은 몰랐는데.”

“삼 년 연속 전국대회 제패? 그거 이제 우리도 가능한 거 아니냐?”

“맞네. 경중고랑 비겼으니까 우리도 되겠네.”

물론 입으로는 이렇게 떠들어 대고 있었으나, 진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상대 쪽에서는 최강의 카드이자 에이스인 백성호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만약 천재라 일컬어지는 그가 있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질지 아무도 몰랐다.

게다가 정말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한 광천고 주전들과는 달리, 경중고 주전들은 대회 때만큼 최선을 다한 느낌이 아니기도 했고.

“이게 다 성현이 너 덕분이다. 덕분에 저 경중고랑 비기는 경험을 다 해 보네.”

경진이 안경을 쓱 밀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부장전에 나가 1-1로 비김으로써 안 좋던 흐름을 끊어 낸 게 그였으니까.

심지어 그게 한 점 빼앗긴 상태로 불리한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어 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과연 그는 정철의 뒤를 잇는 실력자라 불릴 만했다.

“다 제 덕분이라뇨. 선배님들 덕분이죠.”

“응? 난 졌는데?”

“으음···.”

0-1로 패배했던 장현성의 장난기 어린 농담에 성현이 볼을 긁적였다.

진 상대에게 뭐라 말하기도 어려웠기에.

그런 그의 모습에 현성이 킥킥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너 아니었으면 1패나 1무가 늘어난 게 다였을 거야. 그러니까 네 덕분 맞지.”

주장 순서에 백성호가 있고, 백지호가 다른 자리, 이를테면 중견 순서를 차지했다면 아마 성적은 지금과 크게 달랐으리라.

잘해 봐야 정철의 1승 이외의 승리는 거두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성현에게 압도적으로 깨져서 그렇지, 백지호의 실력은 경중고의 임시 주장을 맡을 정도로 꽤 뛰어난 편이었으므로.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그거 인정. 백지호 걔 겁나 세더라.”

“백성호 동생이잖아.”

“형, 동생이 둘 다 검도를 잘한다고? 이게 그 혈통빨이라는 거냐?”

“검도 DNA? 에반데.”

“그 드립 진짜 에반데.”

현성과 경진이 시시덕거리며 떠들 때, 그들의 대화를 듣던 영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도 백성호만은 못하지 않았나요?”

“맞아. 백성호 걔는 1학년 때도 장난 아니었으니까. 그때부터 그냥 괴물이었지.”

현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아직 2학년이었던 시절, 대회에서 봤던 백성호의 실력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상대하지 않았음에도 몸을 떨 만큼.

문득, 성현을 돌아본 현성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백성호가 복수하겠다고 오는 거 아냐?”

“복수? 설마~ 무슨 동생이 연습 경기를 졌다고 복수를 하냐.”

“그렇긴 한데···.”

“백성호가 그렇게 미친놈은 아냐.”

턱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경진이 손을 내저었다.

곧 남은 2학년 두 명도 끼어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오늘 솔직히 2위보다 3위가 셌다. 인정?”

“응, 아냐~ 솔직히 내가 2위랑 싸웠으면 이길 각도 보였어.”

“니가? 지랄. 나보다 빨리 발렸겠지.”

“쓰읍- 둘 다 졌으면 조용히 해.”

“와, 최영준 혼자 이겼다고 말하는 거 보소.”

“아이고~ 지면 조용히 해야지. 내가 미안타. 입 꾹 다물고 있을게!”

3학년 중 유일하게 연습 경기에서 진 현성이 우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뇨! 선배! 선배를 말한 게 아니라!”

당황한 영준이 손을 휘저었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다른 주전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하하.”

성현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 웃고 떠드는 광천고 주전들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았다.

70대 노인의 정신을 가진 그가 보기에 썩 마음이 즐거워지는 광경이었던 까닭이다.

‘젊음이란 좋은 게지.’

정작 여기서 제일 어린 건 본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성현이었다.

“다들 오늘 연습 경기 수고했어.”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른 정철이 입을 열자, 신나서 떠들어 대던 광천고 주전들이 일제히 입을 닫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들이 주장인 정철을 믿고 따른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

기분 좋은 얼굴이 된 정철은 연습 경기 시작 전과 마찬가지로 한 명씩 주전들과 눈을 마주쳤다.

최영준, 손대현, 조윤호, 장현성, 김경진, 그리고 성현까지 전부.

이내 그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비길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했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었네. 모두 힘내 준 덕분이야.”

“예상 못 한 건 경중고도 마찬가지일걸? 마지막에 걔네 얼굴 봤어? 아주 죽상이더라.”

현성의 너스레에 광천고 주전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들도 연습 경기를 마칠 때 경중고 주전들이 보인 침울함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다.

은근히 그것을 통쾌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콧대 높은 경중고 검도부를 약소부라 무시당했던 그들이 억눌렀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번 연습 경기로 확실해진 게 하나 있어.”

주먹을 꽉 쥐어 보인 정철이 눈을 빛냈다.

“우리도 이제 강호라 불리는 고등학교랑 붙어 볼 만해졌다는 거.”

최강의 고등학교인 경중고와 무승부를 냈다는 건.

다른 고등학교들과 붙었을 때 충분히 이길 만한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다소 비약적인 논리가 섞여 있기는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정철 선배가 1승, 영준 선배가 1승, 내가 1승으로 3승은 반쯤 확정이고.’

성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호 검도부 주장급 실력의 정철이 선봉이면 어지간한 학교들 상대로는 확정 1승이나 다름없다.

영준도 중견 중에서는 꽤 강한 축에 속한 데다가, ‘전’에 광천고 주장을 맡았던 것을 보면 앞으로 발전할 여지가 무궁무진했다.

더불어, 주장 순서에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성현이다.

사실상 어지간한 강호 검도부가 아니면 3승은 챙겼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

‘그럼 딱 한 명만 더 터져 주면 4승이야.’

누구라도 한 명만 더 승리를 확정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확정 4승으로 검도 고등부 단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건이 달성된다.

정철의 이야기가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광천고에 붙은 약소부 딱지. 그걸 우리 손으로 떼어 낼 기회라는 뜻이야.”

성현을 제외한 광천고 주전들은 은근하게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약소한 검도부를 힘을 모아 일으켜 세운다니.

마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말을 듣고 두근거리지 않을 소년이 대체 누가 있을까.

“올해 추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나중에는 우리를 광천고의 황금 세대라 부를지도 몰라.”

“황금 세대? 그거 듣기 좋네.”

경진이 버릇처럼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 옆에서 근질근질하다는 표정의 현성이 주먹을 꽉 쥐었고, 영준과 다른 2학년들의 눈도 이제까지보다 더한 투지로 불타올랐다.

정철은 그 모든 것을 만족스레 바라보다가, 힘을 담아 소리쳤다.

“추계 대회까지 이 악물고 실력을 키우자. 제대로 사고 한번 쳐 보는 거야!”

“좋아! 가 보자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약소부라 무시당하고 있던 광천고 남자 검도부.

그곳을 묵묵히 지탱해 왔던 주전들의 가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이었다.

*

[하윤: 주말에 수연이랑 같이 훈련했다며?]

[성현: 맞습니다]

[하윤: 유망주 대회 대비 훈련?]

[하윤: 그런 거면 나도 같이 하지]

[하윤: 한 번 나가 봐서 잘 도와줄 수 있는데]

[성현: 그럼 이번 주말에 같이 훈련하실래요?]

[하윤: 주말에?]

[성현: 네. 주말마다 수연이네 도장에서 같이 훈련하기로 했습니다]

[하윤: 좋네, 나도 갈래]

[성현: 알겠습니다]

[하윤: ㅇㅇ 수연이한테는 내가 톡할게]

툭.

메시지를 보낸 하윤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가볍게 내던졌다.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선물을 받게 된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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