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7화 (17/150)

< 17화: 경중고 >

경중 고등학교는 전체적으로 다른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고등학교가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현이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당당하게 내린 다른 광천고 부원들은 경중고의 모습만 봤을 뿐인데, 다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질 만큼 긴장한 상태였으니까.

‘뭐, 어쩔 수 없지.’

광천고 검도부는 항상 대회 32강에서 버둥거리는 약소부다.

반면, 이제부터 연습 경기 상대가 될 경중고는 현 최강의 고등학교 검도부!

긴장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그나마 3학년들은 억지로라도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2학년들은 입술을 꽉 깨물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듯했다.

그들을 슥 돌아본 정철이 소리쳤다.

“다들 너무 긴장하지 마! 연습 경기일 뿐이잖아! 항상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면 돼!”

“네, 주장!”

겨우 마음을 다잡은 영준이 소리쳤다.

그러며 그는 힐끔 성현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에서 긴장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자 이를 악물었다.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1학년인 성현이 저토록 담담한데, 긴장으로 인해 몸이 굳어진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정신 차려, 최영준!’

동경하는 정철 선배도 말하지 않았나.

연습 경기일 뿐이며, 항상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 정도는 해내야 중견을 맡긴 정철의 신뢰에 보답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맞아. 어차피 연습 경기니까.’

‘우리에게는 성현이도 있고! ···상대한테는 백성호가 있지만.’

‘올해가 마지막이니 더 힘내야지.’

“얘들아. 이제 다들 들어가자···.”

광천고 검도부 주전들이 각자 각오를 다질 무렵.

버스 기사와 함께 버스를 주차하고 온 감독, 김만석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2 대 8 가르마, 동글동글한 인상의 중년 남자인 김만석.

그는 광천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올해에 맡은 동아리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떠넘겨지듯 검도부 감독이 된 불쌍한 인물이었다.

얼떨결에 창설된 남자 검도부에 예산을 더 주기 싫은 학교의 수작질로 인해 생긴 또 다른 피해자라고나 할까.

검도의 ‘ㄱ’ 자도 모르고, 또 원하지도 않았는데 졸지에 검도부를 맡게 되었으니···.

“네, 선생님.”

“하하. 그래···.”

정철을 비롯한 검도부 주전들은 만석을 썩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남자 검도부 감독이 된 지 몇 개월도 안 된 데다가, 그 또한 학교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만석이 딱히 그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기도 했고 말이다.

아는 것도 없이 나댄 적도 없고, 춘계 대회 당시에도 연습 경기 때마다 꼬박꼬박 그들을 인솔했으며, 훈련을 방해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만석을 싫어하지 않는 건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검도를 좀 더 배워 보려고 할 만큼 사람 좋은 선생님이니까.’

그 노력과는 별개로, 광천고 남자 검도부는 끝내 폐쇄되고 말지만···.

“전에 왔을 때, 분명 이쪽이었는데-”

광천고 주전들은 만석의 뒤를 따라 경중고에 있는 검도장으로 이동했다.

고등학교 체육 시설들이 대개 그러하듯 경중고 검도장도 운동장 바로 옆에 있었는데, 새것인 건 둘째치고 그 크기가 정말 엄청나게 컸다.

겉으로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낄 만큼.

아마 굉장히 오랫동안 강호였던 데다가, 근래 삼 년 동안 우승을 독식한 영향이리라.

경중 고등학교로서는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검도부를 대우해 주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광천고도 꽤 큰 편에 속하는데, 여긴 진짜 장난 아니네.’

성현마저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검도장 앞에 도착한 만석이 눈으로 ‘들어갈까?’ 하고 묻자, 정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만석.

이어서 주전들도 우렁찬 인사와 함께 검도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

사방에서 위협적인 시선이 쏟아졌다.

광천고 주전들이 무심코 움찔할 만큼 무게감 있는 눈빛들이 그들을 향한 것이다.

연습 경기를 기다린 듯, 가만히 정좌하고 있던 경중고 검도부원들은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들을 압도했다.

‘힘 있는 눈빛’이라는 건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무슨 눈빛이···.’

‘이게 강호의 분위기라는 건가.’

“허허, 반갑습니다. 경중고 감독을 맡은 이중한이라고 합니다.”

광천고 주전들과 함께 쪼그라들어 있던 만석에게 말을 걸어 온 건 경중고 감독, 이중한이었다.

하얗게 세어 가고 있는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그는 올해로 예순세 살이며, 이십 년째 경중고의 감독을 역임한 노감독이었다.

경중고가 강호가 된 것에는 그의 역할이 어마어마했다는 걸 고교 검도 팬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지경!

전략적으로도, 그리고 선수 육성 면에서도 완벽하다고 찬사를 듣는 그가 먼저 만석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것이다.

“아, 저는 광천고 감독을 맡은 김만석입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아아- 그렇군요.”

잠시 의아해하던 이중한 감독이 이내 껄껄 웃었다.

“이번 연습 경기 참 기대가 많습니다.”

“네, 저희도 그렇습니다. 서로 많은 걸 얻어 가는 경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렇네요. 참- 말씀드리는 게 좀 늦었습니다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번 연습 경기. 실전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해도 되겠습니까?”

“실전에서처럼요?”

만석이 눈을 끔뻑거렸다.

연습 경기면 연습 경기지, 웬 실전이란 말인가?

검도에 대해 아는 게 극히 적은 그로서는 뜬금없고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이중한 감독은 푸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실전처럼이라 해도, 심판 숫자와 주변 환경 빼고는 연습과 똑같습니다만···.”

“아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실전처럼 하는 편이 더 연습이 잘 되지 않겠습니까? 감각을 가다듬기에도 좋고.”

“그건 그렇죠.”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만큼 타당한 논리였다.

스포츠 격언 중에는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하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럼 동의하신 거로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네, 네. 그러시죠.”

만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한이 손짓했다.

그러자 경중고 검도부 코치로 보이는 이가 나서서 이동식 거치대에 달린 TV까지 가져왔다.

보통 경기에서 출전하는 선수 명단을 띄우는 바로 그 TV였다.

심지어 코치가 전원을 켜니, 경기처럼 그곳에 출전 선수 명단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어라?”

“아니, 왜···?”

그러나 출전 선수 명단을 본 광천고 주전들의 표정에 짙은 당황이 어렸다.

주장 순서에 백성호가 아닌 다른 이름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으니.

처음에는 설마 이름을 잘못 썼나 했던 주전들이었지만, 곧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으며, 또 잘못된 것치고는 경중고 검도부 부원들이나 감독의 표정이 너무 태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경중고는 주장에 백성호가 아닌 백지호라는 무명의 선수를 내민 것이다.

그러고도 저리 태연한 얼굴인 거고.

‘지금 설마, 연습 경기라고···.’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광천고 주전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장을 아예 다른 선수로 내밀었다는 건 그만큼 무시당한다는 소리였기에.

비록 다른 순서의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경중고에서 주전으로 뽑는 이들과 같았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주장이 다르지 않은가.

“저, 중한 감독님?”

만석 또한 주장이 다름을 눈치챘다.

검도부 감독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게 꽤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경중고 주장이 백성호라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름이지만 ‘백지호’가 ‘백성호’와 다른 건 분명했으니.

“예.”

“제가 알기로 경중고 주장 선수는 백성호 군이었을 텐데요···?”

“아- 그게 말이죠. 성호는 현재 학교를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네?!”

이중한의 충격적인 발언에 만석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현재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있다니.

그렇다면 설마, 자퇴···?

고교 검도계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이?

“아, 물론 자퇴나 퇴학 같은 건 아니고, 지금 귀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귀한 손님이요?”

“예. 일본에서 오신 검도 7단 가토 타츠야 선생님께 직접 배우고 있는지라···.”

또 한 번 광천고 주전들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일본’과 ‘검도 7단’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강한 힘을 지닌 까닭이었다.

한국이 태권도 종주국이듯, 일본은 세계가 인정하는 검도 종주국.

당장 검도를 수련하는 인구만 해도 압도적이다.

추산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검도를 하고 있고, 매년 초단을 따는 검도인의 숫자만 이만 명이 넘으니.

게다가 단순히 사람만 많은 게 아니라, 강하기도 엄청나게 강하다.

국제적인 대회에서 여태껏 한국이 일본을 정면 대결로 이겨 본 적이 없었으니 말 다 했다.

‘여기는 판정 문제도 다소 있긴 하지만-’

하나 그런 걸 제외하더라도, 일본이 종주국으로서 강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당장 한국이 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건 일본이 미국과 싸워 패배한 2006년 13회 대회뿐이었으니까.

총 17회까지 개최된 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경우는 그 한 번뿐.

이외에는 모두 일본이 우승, 한국이 대부분 준우승을 가져가며 ‘일본 검도를 정면 대결에서 꺾는 것’이 한국 검도의 염원이 될 정도였다.

그런 일본에서 온 검도 고단자에게 배운다? 그것도 학교까지 빠져 가며?

‘이건 할 말이 없네.’

성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광천고 주전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을 당장 데려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미리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지 뭡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허허.”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이중한 감독.

그 얼굴을 보며 성현은 문득 그가 암암리에 ‘화전양면전술을 쓰는 영감탱이’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앞에서는 늘 허허 웃고 다니면서 뒤에서는 온갖 수작질을 해 온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었는데, 딱 지금이 그랬다.

일단 부른 뒤에 웃으며 양해해 달라 하는 것부터가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거기까지 이른 과정 또한 추측하건대 꽤 악랄한 심기가 담겨 있었을 터.

성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백성호라는 주장이 없으니 다른 빅4랑 붙기도 뭐하고, 다른 강호들도 자존심 상할 테지.’

연습 경기라도 주전으로 치르는 건 당연하다.

그것이 먼 길을 왔을지도 모를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행동이기에.

하물며 나름대로 경중고의 라이벌로 불리는 빅4나 여타 강호 고등학교 검도부를 불렀을 때 주장인 백성호가 빠진다?

그들이라면 설령 무슨 이야기를 한들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다.

‘그래서 우리인가. 경중고 같은 강호와 연습 경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약소부라서.’

더불어, 음습한 가정을 하나 더 한다면.

‘패배하는 게 치욕. 승리는 당연. 그런 의미에서 경기 감각을 갈고 닦기에도 좋다···.’

아마 이곳에 광천고가 오기 전, 이중한 감독은 적당히 경중고 검도부를 을러 댔으리라.

약소부인 광천고 검도부를 상대로 패배하는 녀석은 강호 경중고 검도부에서 주전을 맡을 자격이 없다, 뭐 그런 느낌으로.

물론 저것 그대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성현은 비슷한 논조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즉, 간단히 말해서.

‘어지간히도 무시당하고 있나 보군.’

완전히 깔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