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6화 (16/150)

< 16 화 : 관의 눈 >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수연이 소리쳤다.

딸을 믿고 맡길 수 있다니.

장인어른이 사위에게 말할 법한 내용 아닌가.

성현이 그걸 듣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만 해도 볼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녀에게는 안타깝게도, 예상과는 달리, 성현은 그냥 어린아이를 도장에 등록할 때의 부모가 하는 말쯤으로 알아들었지만 말이다···.

“어이쿠, 더 있으면 딸내미한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구나. 이만 가보마. 훈련 열심히 해라.”

“네. 검도장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주말에는 오전 밖에 안 여는데, 뭘. 대회에 나간다 했지? 응원하마! 꼭 1등 해야 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강찬은 호탕하게 웃으며 검도장을 나갔다.

바로 떠나는 걸 보니 아마 오전에 있었을 훈련 이후, 쭉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 듯싶었다.

성큼 떠나가는 강찬의 뒷모습에 고개를 꾸벅 숙인 성현이 이내 피식 웃었다.

“아저씨는 여전하시네.”

“몰라···.”

붉어진 얼굴의 수연이 호다닥 여성 탈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버지가 부끄러워서라기보다는, 강찬이 성현에게 한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 도저히 냉정한 표정으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성현이 생각했다.

‘아저씨가 놀려서 화난 건가?’

수연 나이대의 소녀는 손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노인다운 생각이었다.

만약 누군가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았다면 아연한 표정을 지었으리라.

‘너는 눈치도 없냐’라면서.

그러나 이곳에 그것을 지적해줄 사람은 없었고, 어깨를 으쓱거린 성현은 담담하게 남성 탈의실로 향할 뿐이었다.

“흠···.”

검도복으로 갈아입은 뒤, 들고 온 가방에서 호구를 꺼내든 성현이 미간을 모았다.

방금 언더키 스포츠용품점에서 진열한 고급 호구를 보고 왔던 탓인지, 어제까지는 별생각 없이 썼던 호구가 꽤 많이 부족해 보인 탓이다.

인공 가죽의 질부터, 띄엄띄엄 된 재봉질, 이리저리 흠이 나 있는 호면 면금까지.

중저가 호구의 단점들이 눈에 확 띄었다.

그나마 관리를 깨끗이 한 덕에 그럭저럭 전체적인 상태는 괜찮았지만, 그뿐.

좋은 호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긴, 이걸 샀을 때는 검도에 인생을 바칠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었으니까.’

이 호구를 구매할 당시만 해도, 성현에게 검도는 그저 수연과 있을 시간을 늘리기 위한 핑계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랬기에 굳이 큰돈 들여 비싸고 좋은 호구를 사기보다, 그냥 중저가로 적당히 몸에 맞는 호구를 샀던 것이고.

그때의 생각이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호구 또한 달라지는 게 마땅한 이치 아닌가?

‘미래를 생각하면 무조건 바꿔야겠지.’

만약 성현에게 이 호구를 계속해서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으니.

물론 언더키에서 봤던 그것만큼 고급 호구를 구매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아무래도 학생 신분에 그만한 돈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무엇을 사든 최소한 오랫동안 써온 중저가 호구보다는 좋은 것일 테니, 바꾸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주로 사용할 장비는 미리미리 길을 들여놓는 게 좋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유망주 대회 상금 정도면······.’

검도 유망주 대회에 걸린 상금은 생각보다 크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인 언더키가 후원으로 붙은 데다가, S 방송사에서 방송으로 내보내는 대회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생각보다는, 그러니까 ‘최고의 유망주를 뽑는다’라는 예능성 짙은 대회치고는 크다는 이야기고, 엄청나게 많은가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3등 오십만 원, 준우승 백만 원, 그리고 우승 상금 이백만 원이었으니까.

‘이백만 원이라.’

그 정도 금액이라면 그럭저럭 고급품에 턱걸이한 호구를 맞출 수 있으리라.

비록 다양한 부분에서 타협해야 할 테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쓰는 호구보다 몇 배는 나을 터.

‘일단은 한 달 뒤에.’

검도 유망주 대회가 열리기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남짓.

그때까지는 좋으나 싫으나 이 중저가 호구와 함께해야만 했다.

생각을 정리한 성현이 호구를 챙겨 탈의실에서 빠져나왔다.

“···왔어?”

검도장에 서 있던 수연이 성현을 보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으며 꽤 진정된 듯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볼에는 살짝 분홍빛이 감돌고 있었다.

물론 성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우선 몸부터 풀까?”

“그래.”

들고 있던 호구를 바닥에 내려둔 성현의 말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탈의실에서 호구를 곧바로 착용하지 않고 나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호구의 무게는 모두 합쳐 3~4킬로그램 정도.

그걸 차고 준비 운동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요즘 성현이 너, 준비 운동 엄~청 열심히 하는 거 알아?”

“그런가?”

“응응! 훈련 때만큼 집중하는 것 같아.”

“준비 운동은 중요하니까 열심히 해야지.”

성현이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대답했다.

수연의 말대로, 요즈음 그는 준비 운동을 할 때도 본 훈련 때만큼이나 집중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준비 운동의 중요성을 머리로, 그리고 몸으로 깨달은 바 있는 까닭이었다.

‘늙어서야 알게 됐지.’

나이가 든 채로 검도를 하다 보면 가장 골칫거리인 게 바로 자잘한 부상들이다.

젊었을 때는 몸의 회복력이 받쳐주니 오래지 않아 낫는 부상도 늙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번 다치기라도 하면 아무리 사소한 부상이라도 최소한 한 주는 끙끙 앓아야 한다.

발목이라도 삐끗하면 얄짤없이 몇 주는 가고.

준비 운동은 그러한 자잘한 부상을 막아주는데 큰 효과가 있으니, 자연스레 그가 준비 운동을 중히 여길 수밖에.

“이걸로- 끝!”

십오 분간 이어진 준비 운동이 끝나고.

비로소 갑상과 갑을 착용한 성현이 수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같이 훈련하는 김에 ‘보는 법’에 대해서 가볍게 배워볼래?”

“어? 그래도 돼? 개인 훈련할 거 아니었어?”

“응. 그건 몸을 움직이는 거로도 충분해.”

“그치만, 시합 대비도 해야 되고···. 너한테 너무 민폐 같아서···.”

머뭇거리는 수연을 보며 성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괜찮아. 내가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래.”

이미 기술적으로는 경지에 이른 성현이다.

굳이 여기서 무언가를 더 단련하기보다는, 젊어진 육체에 익숙해지고, 기본기를 반복하여 몸에 때려 박는 게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태까지 알게 모르게 수연에게 도움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그에 대한 보은이라 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응! 그럼 배울래! 배우고 싶어!”

수연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거리는 시선에 성현은 작게 웃었다.

어쩐지 수연에게서 자신의 가르침을 받던 어린 제자들의 모습이 얼핏 보인 까닭이다.

의욕에 불타는 눈이 특히나.

잠시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말했다.

“그럼 일단 서유나 감독님도 말했던 일안, 관(觀)의 눈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줄게.”

“응응!”

기대로 가득한 눈빛.

수연의 얼굴에는 과연 어떤 설명이 나올지 두근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듯, 성현의 설명은 정말 짧고 간단하기 그지없었으니.

“상대가 움직임을 보고,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거. 그게 관의 눈이야.”

“어···?”

수연이 벙찐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끝이야?”

“응, 정말로 그게 끝. 그것도 뭘 할 거다~ 하면서 예측하는 건 아니고, 그냥 언제 공격 들어올지 아는 정도지. 적중률도 높지 않고.”

성현의 설명에 다소 어안이 벙벙했던 수연은, 곧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게 굉장히 대단한 기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의 공격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것을 도중에 끊어냄으로써 이득을 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격자를 성공시키는 건 퍽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주일 전, 성현이 수연과의 대련에서 보여줬던 완벽하다고 말할 만한 ‘죽도눌러 머리치기’처럼.

“···그 ‘눈’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어?”

수연의 눈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실제로 당해본바, ‘관의 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직접 몸으로 느껴본 적 있는 그녀다.

손도 발도 못 써보고 지지 않았던가?

그게 ‘관의 눈’에서 비롯된 패배라면, 어떻게든 배워야만 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견이 불여일행이라.”

성현이 씩 웃으며 호면을 집어들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 번 보는 게 한 번 행함만 못하니.

‘관의 눈’을 얻고 싶다면 직접 몸으로 겪어보는 게 최고였다.

“직접 경험하다 보면 깨달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수연이 씩 웃었다.

“간단해서 좋네!”

결국, 몸으로 맞으면서 배우라는 말이었지만, 무도란 본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사실 관안(觀眼)은 처음에 말한 내용에 가깝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수연에게는 이르겠지.’

관안의 관(觀)은 넓게 살핀다는 뜻이다.

상대의 속임수에 현혹되지 않고 모든 움직임을 두루 보는 것.

발을 내디디고, 어깨가 움직이고, 하다못해 죽도의 끝이 흔들리는 것까지도.

그를 살펴 상대가 앞으로 할 행동을 완벽하게 예측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짜배기 ‘관안(觀眼)’이라 할만했다.

‘지금 수연이가 들으면 터무니없다고 할 테니.’

누구나 움직이기 전에 전조가 있는 건 맞다.

아마 그것을 보고 무슨 기술을 낼지 간파하는 것도 이론상 가능하긴 하리라.

어디까지나,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하지만 검도는 ‘승부를 결정짓는데 필요한 건 일초 남짓’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찰나에 공방이 이루어지는 무도다.

‘가장 빠른 칼’을 쓴다고 칭해지는 이는 정말 0.1초 만에 머리 타격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니.

그 짧은 순간에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으리라.

“······하.”

그런즉, 그런 경지에 도달한 달인을 본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실로 기대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 근데 성현아.”

“응?”

“너 설명해주는 거 꼭 우리 할아버지 같았어!”

“어···. 그, 그래?”

“응응! 특히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 이러는 거. 우리 할아버지께서 자주 그러셨거든.”

“하하···.”

수연의 말에 성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완전히 익숙해져서 나름 고등학생다운 말투가 되었는데, 검도가 연관되니 ‘전’의 말투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수연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의 나이로 따지면, 아마 그는 그녀의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일 테니까.

볼을 긁적거린 성현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자자! 바로 시작하자!”

“응!”

*

경중 고등학교 검도부.

60년 역사를 지닌 전통의 강호이자, 삼 년째 우승을 독식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현 최강의 고등학교 검도부다.

비록 거기에는 혜성같이 나타난 천재, ‘백성호'가 재학하고 있음이 큰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 한들 그들의 업적이 퇴색되는 건 아니다.

춘계-추계, 그리고 개인전-단체전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우승을 독식했다는 건, 그만큼 그들이 완벽한 패자(?者)라는 뜻이니까.

‘어우경. 어차피 우승은 경중고···였나?’

오죽했으면 고교 검도 팬들이 그런 신조어까지 만들어냈겠는가.

현재 경중고의 위상은 그만큼 압도적이다.

우승이 당연시될 만큼이나.

빅 4니 뭐니 하는 건, 그런 경중고를 상대로 최대한 분발해보라는 의미에서 붙인 별명이기도 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경중고를 이끄는 백성호가 아직 올해로 2학년이라는 거다.

최소한 두 해는 더 그의 집권이 이루어질 예정이니, 다른 고교 검도부를 응원하는 이들 처지에서는 진저리칠 수밖에.

‘재밌겠네.’

그러나 성현은 웃었다.

정말이지, 간만에 심장이 뛰는 기분이었다.

상대가 말도 안 되게 강하다고 하니 더욱.

시간을 되돌아온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이 정도쯤은 되어야 했으니까.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버스가 멈춰서자, 정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얘들아. 내리자!”

“네.”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경중고의 정문 앞.

버스에서 내린 성현은 웅장하게 선 경중고의 모습을 한눈에 담았다.

‘여기에 그 백성호가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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