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화 : 많이 늘었습니다 >
검도용품에서 언더키 제품의 품질과 가격을 따라올 만한 브랜드는 드물었다.
기껏해야 일본 유명 브랜드 몇몇만이 그에 비견되는 상품들을 내놓을 뿐이었기에, 장비를 따지는 검도인들은 대개 언더키 제품을 애용했을 정도!
성현과 수연은 물론이요, 서유나 감독이 입고 있는 운동복마저 언더키 제품이었으니 말 다 했다.
“성현아, 저기 봐!”
수연이 호들갑스럽게 가리킨 곳에는 새로 출시한 제품으로 보이는 호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호면, 갑, 갑상, 호완에, 도복까지 정갈하게 차려 입혀놓은 모양새였다.
슬쩍 다가가 쓰여있는 제품 상세 정보를 읽어보니, 여태 꽤 많은 호구를 봐왔을 수연의 호들갑이 이해가 되었다.
‘수제 1.2푼 재봉, 일체 사슴 가죽, T.A.C 면금이라. 고급품이네.’
가격이 쓰여 있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현이 추측하건대 몇백만 원쯤은 가볍게 할 터였다.
그만큼의 값을 한다는 듯 호구는 마네킹에 입혀져 있음에도 굉장히 위압감 넘쳤다.
호면에 쓰인 게 일반적인 은색 면금과는 달리, 새까만 T.A.C 흑색면금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이 고급 호구를 보고 있으려니 성현의 머릿속에 문득 ‘전’, 그러니까 노인 때 쓰던 호구가 떠올랐다.
‘그립구나.’
흔히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실상 그런 건 헛소리에 불과했다.
대저 종목을 불문하고 경지가 높아질수록 좋은 도구, 좋은 장비가 있으면 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므로.
생각해보라.
무겁고 낡아빠진 호구를 쓰는 이와 가볍고 튼튼한 호구를 쓰는 이.
두 사람의 실력이 완전히 똑같을 경우, 과연 어느 쪽이 승리를 거머쥐겠는가?
‘당연히 후자의 인물이지.’
그런 까닭에 노인 시절 성현이 쓰던 호구 또한 지금 보고 있는 것 이상의 최고급품이었다.
가격으로 따지면 천만 원 정도는 거뜬했으리라.
새롭게 만든 신소재를 사용해 늙은 몸으로 쓰기에도 부담 없을 만큼 가볍고 튼튼했고, 몸소 공들여 길들여놨었는데···.
‘가져올 수 없다는 게 아쉽군.’
“나도 언더키에서 후원받고 싶다!”
성현이 잠시 옛 추억에 잠겨있을 무렵, 수연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중얼거렸다.
스포츠 브랜드 ‘언더키’에서 후원받는다는 건 검도 선수로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인 데다가, 저 장비들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이해 못할 말은 아니었다.
옆에서 그녀의 소망을 들은 성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수연이 너라면 가능할걸?”
“내가?”
“어. 원래 언더키는 학생선수들한테도 장래성이 있으면 후원 잘 해주거든.”
언더키 브랜드는 제품의 품질과 가격만큼이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도 유명했다.
특히나 검도에서는 고등학생 유망주들과 미리미리 후원 계약을 맺어둠으로써 차후 성장했을 때를 대비해두는 일도 많았다.
당장 고교 검도 유망주 대회의 가장 큰 후원 업체가 바로 언더키였으니 말 다 했다.
성현의 기억에 따르면, 수연 또한 유망주 대회에서 여성부 우승을 차지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더키로부터 그녀에게 ‘찜’ 계약이 들어왔었다.
“그럼 너도 언더키한테 후원 들어오겠네!”
“나?”
“응응!”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연.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후원 계약을 맺을 수 있다면, 성현 또한 그럴 수 있노라고 말이다.
근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그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후원이라···.’
성현이 언더키에게 후원 계약 제의를 받은 건 나이 서른다섯이 넘어서였다.
자신의 재능에 눈을 뜨고, 비로소 검도계를 재패해나가기 시작할 무렵에나 언더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간을 돌아온 지금이라면?
‘확실히, 나한테도 제의가 들어올 만하네.’
스스로 예상하기에, 지금 학생 검도계에서 그와 제대로 된 대결을 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칠십 평생을 검도에 바친 괴물이 시간을 거슬러 젊은 육체까지 손에 넣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즉, 지금부터 성현은 잘만하면 전승의 괴물, 최강의 고등학생으로 군림하는 것도 가능했다.
어쩌면 그 이상도.
스포츠에서 ‘최강’이란 이미지가 갖는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언더키에서 모를 리가 없다.
마케팅팀이 눈이 있다면 그에게 후원 제의를 안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 둘이 같이 언더키 후원받는 건가?”
“좋다~ 둘이서 광고도 찍을까?”
“하윤 선배랑 백성호처럼?”
“그렇게 딱딱한 거 말고! 좀 더 부드러운 느낌으로, 어때?”
성현이 키득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임하윤과 백성호 두 사람이 찍은 광고는 지나치게 딱딱한 면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칼만 안 들었을 뿐, 살벌한 분위기만큼은 광고보다는 목숨을 건 대결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광고 평가는 좋았더랬다.
검도의 날 선 분위기가 그대로 잘 살아있다나.
“이제 밥 먹으러 갈까?”
“그래, 그러자.”
검도용품 섹션을 돌아보던 성현과 수연이 밥을 먹기 위해 움직인 건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만큼 큰 규모의 오프라인 검도용품점에 온 것은 또 오랜만이다 보니, 한참 동안 이것저것 살피며 돌아다녔던 까닭이다.
그랬던 것치고는 손이 가벼웠지만, 그거야 학생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점심 메뉴는 전에 말했다시피, 닭갈비로.”
“닭갈비!”
이것은 애초에 그들이 검도장에 바로 가지 않고, 밖에서 만난 이유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함께 맛있는 닭갈비를 먹고 가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치이익-
동그란 철판 위에서 새하얀 치즈와 살짝 붉은 기가 감도는 양념에 잠긴 닭갈비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코끝을 자극하는 게 매콤하면서도 달곰한 향기,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에 절로 식욕이 돌아, 수연이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녀는 조리가 끝나자마자 치즈와 닭갈비를 한 덩어리로 뭉쳐 입에 털어 넣었다.
“으음~”
온 세상 행복을 혼자 다 누리는듯한 수연의 표정에 성현이 킥킥 웃었다.
본래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하는 사람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조차 행복하게 만들기 마련.
닭갈비를 집어먹는 수연이 딱 그러했다.
성현은 닭갈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맛있어?”
“응응!”
“많이 먹어. 맛있게 먹는 게 보기 좋다.”
성현의 말에 수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뒤늦게 너무 돼지처럼─어디까지나, 그녀의 생각에서 그랬다는 거다─ 먹었다 싶었던 까닭이다.
그녀가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렸다.
“혹시 성현이 너는 이런 식으로 먹는 거 싫어해? 막 조금씩 먹는 게 좋아?”
“아니, 전혀. 맛있게 먹으면 보기 좋은데?”
“그으래-?”
“응. 그러니까 많이 먹어. 자.”
성현이 수연의 그릇에 자른 닭갈비를 올려줬다.
특히나 그녀가 좋아하는 하얀 치즈를 듬뿍 얹은 건 물론이었다.
거짓 없는 그의 반응에 그제야 안심한 듯, 수연은 다시 행복한 얼굴로 닭갈비를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작게 웃은 성현도 마찬가지.
그렇게 서로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까지 끝낸 뒤, 그들은 비로소 주말에 만난 원래 목적─ 훈련을 위해 수연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검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검도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이 근처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한 것이었지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했던 검도장에 도착했다.
"여기야?"
"응, 여기 2층! 조만간 1층까지 늘린다고 하시더라."
"오호- 좋은 일이네."
문을 열고 검도장 안으로 들어선 성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호구들을 넣어두는 진열장, 죽도 거치대, 자세를 스스로 점검해보기 위해 설치된 거울, 효과적인 환기를 위한 창문들.
수연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검도장이었지만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그래도 이 모습이 못내 그에게 반가운 이유는, 중학교 3학년 시절, 모든 게 그가 봤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어, 왔구나!”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검도장 안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들어오는 쪽이 아닌 반대편, 검도장 안에 있는 문을 열고 나온 사내의 모습에 성현의 옆에 있던 수연이 놀라 소리쳤다.
“-아빠?!”
“그래, 아빠다.”
껄껄 웃으며 대답한 사내의 이름은 강찬.
수연의 아버지이자, 현재 이 ‘강한 검도장’을 운영하는 관장이었다.
그는 전직 검도 선수답게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는데, 티셔츠 너머로 보이는 몸을 보면 현역에서 물러나고서도 결코 단련을 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성큼 다가온 강찬을 향해 성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찬 아저씨.”
“오냐! 그동안 잘 지냈고? 바로 옆집인데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하- 네. 잘 지냈습니다.”
성현에게 있어, 강찬이란 사내는 굉장히 친숙한 인물이었다.
강찬은 소꿉친구인 수연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그에게 처음으로 검도를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던 까닭이었다.
한창 그가 수연을 짝사랑하던 중학교 3학년 당시, 그녀와 함께 있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검도를 시작했을 때, 강찬에게 검도를 배웠던 것!
이곳 도장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때 이곳에 와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좋은 스승이셨지.’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많이 놀아준 좋은 아저씨기도 했다.
과자 사 먹으라고 용돈도 많이 주셨으니 말이다.
지금은 그저 어렴풋한 추억만이 남아있는 옛날의 일이었지만.
“요즘 수연이가 네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아빠!”
“아빠 귀 안 먹었다, 딸내미야.”
수연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강찬을 강하게 쏘아보았다.
물론, 아비된 사람에게는 그저 귀여울 뿐이다.
낄낄대며 웃던 강찬이 이내 성현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성현이 너. 수연이 말을 들어보니 실력이 많이 늘었다던데─”
성현을 보는 강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웃을 때까지만 해도 호탕하게만 보였던 그의 얼굴이 그 변화 하나만으로 사납게 변했다.
마치 이를 드러낸 호랑이 같은 기세!
강찬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이냐?”
묵직한 서늘함이 검도장 안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성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것이 강찬의 본모습임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일찍이 검 쓰는 모습이 호랑이 같다 하여, ‘한국의 대호(大虎)’라고까지 불린 선수이자, 검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까지 차지한 강자!
흉포한 눈빛에 피부가 저릿해질 지경이었으나.
“네.”
성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마치 서슬 퍼런 눈빛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태도였다.
그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많이 늘었습니다.”
“하하! 그래. 최소한 마음가짐 하나는 제대로 된 것 같구나. 아주 좋아.”
성현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든 강찬이 눈에 힘을 풀고 껄껄 웃었다.
그의 밑에서 검도를 배우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그가 진심으로 노려보는데 이토록 담담한 이는 몇 없었다.
죽도를 휘두르는 걸 보지 못했으니 실력은 모르겠지만, 마음가짐의 굳건함 하나만은 칭찬해 줄만 하다는 이야기다.
그가 성현의 어깨를 탁탁 두들겼다.
“이러면 우리 딸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