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화 : 훨씬 귀여워 >
오전 5시 30분.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의 이른 시간.
과거로 돌아온 이후 늘 그랬듯이, 성현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칼같이 눈을 떴다.
비록 오늘은 주말의 첫날인 토요일이었지만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이후의 일정도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씻은 성현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한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진 한 시간가량의 조깅.
적당히 몸이 풀어질 즈음 해서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건 역시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였다.
“아침 운동은 잘했니?”
“네, 어머니.”
어느새인가 어머니와 나누는 이 아침 인사도 자연스러워진 상황.
과거로 돌아온 이후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생활을 반복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게다가, 슬그머니 방에서 나와 식탁 앞에 앉은 성하도 이제 아침 운동으로는 성현에게 시비를 걸지 못하고 있었다.
성현이 아침 달리기를 시작한 지 벌써 2주.
초반에야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니, 의지박약이 얼마나 갈 거 같냐니 하며 악담을 했던 그녀지만,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녀는 성현이 입을 열 때마다 전전긍긍하는 표정이었다.
워낙에 쌓인 업보가 많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데다가, 아침마다 운동하는 성현을 보며 부모님도 그녀에게 함께 조깅을 하라며 쪼아대고 있었던 까닭이다.
“누나.”
“왜! 뭐! 왜!”
“아니, 그냥 한 번 불러봤어.”
그걸 알고 있는 까닭에, 성현은 때때로 성하를 놀리며 키득거리곤 했다.
가볍게 이름만 불러도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놀라서 반응하는 게 썩 우스웠던 까닭이다.
“······이 씨!”
동생이 건방지게도 누나인 자신을 놀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지만, 성하에게는 실로 안타깝게도 아침 식사 시간에는 부모님도 함께 계시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여기서 동생을 구박하면 부모님도 자연스레 합류하여 그녀에게 운동 좀 하라며 구박한다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배웠기에.
결국, 성하로서는 이를 갈며 차후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내가 진짜, 운동 시작하고 만다···!’
씩씩거리는 성하.
과연 그 다짐이 이루어질지는 지켜봐야 하리라.
“아들, 오늘 나간다고 했었지?”
“네, 수연이랑 점심 같이 먹고, 걔네 도장에서 훈련하기로 했어요.”
“어머, 그러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머니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바로 만나기로 했니?”
“아뇨. 이따가 밖에서 보기로 했어요.”
“밖에서···. 같이 나가는 게 아니라?”
“네. 왠지는 모르겠지만, 따로 나가서 밖에서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성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수연은 몇 년째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고, 같이 나가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당장 지금 옆집에 찾아가면 곧바로 수연을 만나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굳이 따로 집을 나간 뒤, 바깥에서 합류하자며 약속을 잡았는데, 그게 못내 이해할 수 없는 성현이었다.
“어휴, 이런 걸 동생이라고···.”
성하가 한심함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이 멍청한 동생을 바라보았다.
본래 데이트란 건 시작이 중요한 법인데, 그걸 어린애들이 옆집에 “친구야, 놀자~”하고 찾아가듯이 시작하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심지어 사실상 두 사람의 첫 데이트라고 해도 무방한 약속인데.
정말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바보 같은 동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수연이가 불쌍하다, 이 멍청아!”
“왜?”
물론 갑작스럽게 욕을 먹은 성현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인데, 이 한심한 눈빛은 뭐고, 멍청이라는 욕까지 들어먹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딱하게도 이곳에 눈치 없는 이는 그 혼자뿐이었다.
“미안, 아들. 이번에는 이 엄마도 아들 편을 들어줄 수가 없어···.”
“어머니까지···.”
“아들아. 내 아들이지만 넌 정말 눈치가 없구나.”
심지어는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마저도 거들며 성현을 타박했을 정도!
졸지에 세 가족에게 모두 한 소리 들은 성현이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실로 씁쓸한 사실은,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욕을 먹었는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칠십 평생을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검도에 인생을 바쳐, 눈치를 포함한 연애 세포가 모두 죽어버린 불쌍한 이의 슬픔이었다.
70년 모솔의 눈치 없음은 정말이지, 안타까운 지경이었던 거다.
“잠깐만.”
신나서 성현을 핀잔 주던 성하가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오늘 수연이 만나러 나갈 때 운동복 입고 갈 건 아니지? 설마?”
“그럼 뭘 입어?”
“뭐?”
“아니, 어차피 잠깐 만났다가 밥 먹고 검도장 가는 건데 운동복 말고 다른 걸 입을 이유가-”
“시끄러워, 이 멍청아!”
성현의 변명에 성하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그녀는 이 바보 같은 동생이 일부러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이러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도대체 저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헛소리 말고 나가기 전에 옷 다 꺼내와!”
“아니, 대체 왜-”
“내가 수연이한테 미안해지니까 그렇지! 닥치고 하라면 해!”
“허어.”
거친 말을 내뱉는 성하를 보며 눈을 깜빡거리던 성현이었지만, 종래에는 그녀의 말에 따라 갖고 있던 옷을 모조리 꺼내왔다.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그를 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영향도 얼마쯤 있었고.
그리하여 다양한 옷을 갈아입은 끝에─중간부터는 어머니까지 개입하여 신나게 옷 갈아입히기 놀이를 즐기셨다─, 성현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인 복장을 하게 되었다.
위에 검은색 후드 윈드 브레이커 아노락을 걸치고, 그 안에는 무늬 없는 하얀 티셔츠를, 거기에 깔끔한 검정 윈드 반바지까지, 딱 인터넷에 남친 룩이라 검색하면 나올 것 같은 차림새였다.
“역시 우리 아들이야~ 잘 생겼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옷을 차려입은 성현의 훤칠한 모습에 어머니와 성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항상 운동복, 아니면 교복만 입고 다니고, 거기에 애초에 꾸미는 것과는 영 거리가 먼 생활을 했던 성현이다.
그런 그가 공들여 꾸미고 나니, 비로소 숨죽이고 있던 잘생김이 티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와 타고 나길 잘생긴 얼굴 덕에 그도 외형만큼은 나쁘지 않았으니까.
‘나한테 이런 옷이 있었나?’
정작 성현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여담이지만, 이 옷을 사다 둔 건 어머니였다.
정작 아들내미는 매일 교복-운동복만 입고 다닌 탓에 빛을 보지 못했었으나, 비로소 한 번 입을 기회가 온 것이다.
“참, 시계는 이거 차렴.”
잠시 자리를 비웠던 어머니가 손에 들고나온 건 검은색 브레이슬릿 시계였다.
메탈릭한 검은빛 시계를 본 성하가 물었다.
“엄마, 그거 아빠 거 아냐? 얘가 하면 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을까?”
“딸아, 그렇게 말하면 이 아빠 상처 받아···.”
“앗! 죄송해요, 아빠!”
쓸쓸한 뒷모습의 아버지야 그렇다 치고.
뭔가 더 할 것 없나 찾아보던 성하는 이내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거리곤, 툭 내던지듯 말했다.
“옷 입은 거 물어보면 네가 골라 입었다 해.”
“그건 또 왜···.”
“팍 씨, 너는 이유 같은 거 묻지 말고, 누나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해라. 알겠냐?”
“이 누나가 너한테 안 좋은 일 시키겠냐?”
고 성하가 사나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미 그녀가 ‘전’에 보여준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성현에게는 너무나도 설득력 넘치는 말이었기에, 그는 단박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렇게 준비가 끝난 성현은 비로소 하얀색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신발조차 그가 고른 게 아니라, 성하가 정해줬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럼 갔다 올게.”
“잘하고 와라. 괜한 말 하지 말고.”
“···노력은 해볼게.”
뒤에서 “노력보다는 결과-!”하고 소리치는 성하를 애써 무시한 채, 성현은 집을 나섰다.
정해진 시간보다 다소 일렀지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셈이었다.
약속에 딱 맞춰가기보다는 미리 가 있는 게 마음 편했던 까닭이었다.
‘메세나에서 만나자고 했었지.’
메세나, 정식 명칭은 메세나폴리스로, 합정역 바로 근처에 있는 쇼핑몰이었다.
옷 가게들은 물론이고, 영화관과 대형 마트까지 있는지라, 고등학생이었던 성현도 자주 찾아갔던 기억이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가까우니 당연한 일이었다.
수연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기에, 그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디···.’
약속 시각이 되기 십 분 전, 먼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 성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수연은 오지 않은 듯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의자를 골라 걸터앉은 성현이 스마트폰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성현 : 어디야?]
톡을 보낸 지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수연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수연 : 가는 중! 벌써 도착했어?]
[성현 : ㅇㅇ]
[수연 : (찹쌀떡이 땀 흘리며 달려가는 이모티콘)]
[수연 : 금방 갈게!]
귀여운 이모티콘에 피식 웃은 성현이 ‘느긋하게 와’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가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얼마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굉장히 힘주고 꾸민 차림새의 수연이 다가왔다.
옅은 분홍색 오버핏 티셔츠와 깨끗하고 새하얀 테니스 스커트, 하얀색 스니커즈까지 신은, 학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그녀는 성현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미안!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성현의 대답에 수연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곧 위, 아래로 슥 성현을 보더니, 이내 속삭이듯 말했다.
“성현이 너, 차려입으니까 멋지다.”
“그런가?”
“응응! 멋져!”
“너도 오늘 평소보다 훨씬 귀여워.”
성현이 한 말은 일체의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
문제는, 그게 어디까지나 손녀가 예쁘게 꾸며 입었을 때 할아버지가 칭찬하는 마음에 가깝다는 점이리라.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수연은 그저 기쁜 모양인지 꽃이 활짝 피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점심 먹기는 이르니까, 구경 좀 할까?”
“구경?”
“응. 안 그래도 딜라이트 스퀘어에 대형 스포츠용품점이 들어왔거든. 전에 보니까 검도용품도 좀 있더라고.”
“진짜? 거기에 검도용품이 있어?”
성현의 말에 수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일반적인 여자 고등학생과는 달리, 검도에 푹 빠진 그녀에게 검도용품이 있을 대형 스포츠용품점은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는 곳이었기에.
그것은 성현도 마찬가지인지라, 두 사람은 한마음 한뜻으로 메세나폴리스 바로 앞에 있는 딜라이트 스퀘어 상가로 향했다.
“와! 와!”
“···꽤 넓네.”
상가에 들어서 있는 대형 스포츠용품점.
그곳의 검도용품 섹션에 간 수연이 감탄을 연달아 내뱉었고, 성현도 예상보다 큰 매장의 규모에 놀란 눈이 되었다.
물론 다른 섹션들, 이를테면 야구나 축구 같은 메이저 스포츠 섹션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교일 뿐.
이만큼 큰 규모의 오프라인 검도용품점은 찾기 드물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는 브랜드가 바로 ‘언더키’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에 들어선 게 언더키였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살펴보니, 어렴풋하게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전’ 고등학생 때는 그냥 인터넷으로 샀을 뿐, 굳이 이런 오프라인 검도용품점을 들리지 않았기에 바로 떠오르지 않았던 거다.
그래도 언더키 브랜드의 스포츠용품점이 여기에 들어섰다는 건 여러모로 호재였다.
‘언더키는 검도 쪽에서 최고의 브랜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