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화 : 재미있는 상황 >
당연한 결정이었다.
주장 순서를 맡을 게 아니라면 굳이 실력 증명을 위한 대련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적당히 ‘힘들 것 같다’라고 못 맡겠다며 물러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터.
그러지 않고 구태여 실력 증명을 위한 대련까지 했다는 건, 자신이 주장 순서를 맡겠다 하는 의사의 표출이나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성현이 굳이 주장 순서를 맡고자 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래도 주장 순서를 맡는 쪽이 상대가 제일 강할 테니까.’
대회 추천을 위해서, 성현은 연습 경기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해야 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맡는 주장 순서를 맡아, 상대 팀의 강적을 압도적으로 꺾는 모습 정도는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위해 일부러 영준과의 대련까지 치러 가며 주장 순서를 맡은 것이다.
“주장이 성현 후배라니, 든든한걸. 그럼 이제 나머지를 정해야 하는데···. 우선은 선봉부터.”
가만히 생각하던 정철이 이내 말을 이었다.
“이번 선봉은 내가 맡을까 해. 다들 괜찮지?”
선봉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 이외의 적임자는 없긴 했다.
선봉은 그 시합의 개시를 맡는 순서이자, 승패에 따라서 흐름을 가져올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역할!
대개 주장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서이니만큼 이중에서는 성현 다음으로 실력이 뛰어난 정철이 맡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그것을 아는 다른 주전들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선봉은 당연히 주장이죠.”
그리하여 선봉은 정철로 결정.
다음으로 정한 건 2위와 3위였다.
솔직히 말해서, 단체전에서 2위와 3위는 그 중요성이 여타 순서들에 비해 크게 낮았다.
대다수 학교가 2위와 3위는 가장 약한 선수를 기용하거나, 시합 경력이 적은 선수에게 경험을 늘려주기 위해 쓰곤 할 정도로.
물론 그렇다고 해서 2위와 3위가 쉽사리 져도 된다는 건 아니다.
만에 하나라도 선봉이 패배했을 때는 최소한 상대와 비겨줘야 하는 게 바로 2위와 3위의 역할이었으니까.
최소한 자기 특기 하나는 명확한 이들이 가는 순서라는 이야기다.
“2위는 손대현. 3위는 조윤호. 맡을 수 있겠어?”
“물론이죠!”
“맡겨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손대현이 투지 넘치는 표정으로, 조윤호가 담담하지만 빛나는 눈으로 대답했다.
두 2학년 주전들의 패기 있는 대답에 정철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실력은 부족할지언정, 마음가짐에서만큼은 어디에도 밀리지 않는 모습이 그가 보기에 썩 괜찮았던 까닭이다.
“중견은···.”
말끝을 흐린 정철이 주전들의 면면을 훑었다.
한 사람씩 눈을 마주치던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영준이었다.
“영준아.”
“네, 주장!”
“중견, 맡을 수 있겠냐?”
정철의 선택은 영준이었다.
하기야, 지금 남은 주전 중에서 가장 강한 게 바로 영준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견은 선봉, 주장과 함께 단체전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 셋 중 하나였다.
이 세 순서가 제 역할을 해주면 그 단체전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고 말해질 정도로.
앞선 승리의 흐름을 경기 후반까지 좋게 이어가거나, 혹여나 앞에서 패배하여 안 좋은 흐름이 있다면 그것을 끊어주는 게 중견이니 말이다.
“네, 맡겨만 주십쇼!”
영준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에게 중견을 맡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현의 주장 순서에 대해 의견이 갈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중견을 맡길 만큼 믿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정철을 존경하는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수밖에.
“5위는 현성아. 부탁한다.”
“오케이~”
5위를 맡은 건 3학년인 장현성이었다.
현성은 광천고 남자 검도부에서 실력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로, 실전 경험도 많아 능숙한 경기 운영이 특기였다.
이기고 있으면 그 흐름을 잘 이어나가고, 지고 있을 때는 적절히 비겨줄 수 있는 선수.
그런 만큼 경기 후반 첫 순서인 5위에 제격이었다.
“부장은 경진이, 네가 맡아.”
“그래.”
부장 순서를 맡게 된 김경진이 짧게 대답했다.
안경을 슥 추켜올리는 그는 비록 정철의 그림자에 가려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그 실력만큼은 대단히 뛰어난 선수였다.
물론 광천고의 소년가장 정철만큼 강한 건 아니다.
그래도 주전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개 에이스급이 맡아, ‘부’담감 없는 주‘장’이라 부장이라고까지 말해지는 부장 순서에 딱 맞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아까도 말했듯이, 주장은 성현 후배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성현이 주전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모든 단체전 순서가 정해졌다.
일방적으로 정철이 지목하여 결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딱히 그가 주장이라는 위치로 강요를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지금은 딱히 다른 순서를 원하는 이가 없어 간단히 넘어갔을 뿐, 다른 때에는 2학년들조차 거리낌 없이 정철에게 의견을 제시하곤 했으니까.
그러면 정철은 다른 주전들과 논의하여 타당한 의견일 경우 순서를 바꿨고.
“그러고 보니.”
돌연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습 경기 단체전 순서는 정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 하나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연습 경기의 상대 팀 말이다.
“이번 연습 상대 팀 어디래? 감독님이 말해주셨던가? 철이 넌 들은 거 없어?”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성이 말한 ‘감독님’은 서유나 감독을 뜻했다.
남자 검도부 주전인 그들에게도 감독님은 훈련을 여자 검도부와 함께 봐주는 그녀였던 거다.
억지로 떠맡은 명목상의 감독이 아니라.
아마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 검도부원들도 똑같은 생각이리라.
“아니, 나도 없는데.”
“철이 너도 모른다고?”
“대체 어디길래 계속 비밀로 하시는 거지.”
정철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장현성과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는 김경진.
3학년 주전 세 명이 연습 경기 상대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려니, 멀뚱히 서 있던 영준이 슬쩍 끼어들어 의견을 꺼냈다.
“아무래도 상포고 아닐까요?”
“상포고?”
“네. 성현이도 있으니까 춘계 때 복수도 할 겸 해서 연습 경기 잡은 거죠.”
“오~”
“그럴싸한데?”
상포고는 지난 춘계 대회 32강에서 광천고를 탈락시켰던 고등학교였다.
상현도 있으니만큼, 거기와 다시 붙어 사기 회복을 노린다는 것도 꽤 설득력 있는 추측이었기에, 검도부 주전들이 그럴듯하다며 감탄했다.
심지어는 성현도 그랬다.
왜냐하면, 이번 연습 경기의 상대를 그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때쯤에는 후보 선수급조차 아니었으니까.’
연습 경기에 참여하는 건 대개 실전 경험이 필요하거나 경기 감각을 키워야 하는 주전들이다.
상대 쪽에서도 같은 이유로 연습 경기를 잡는 만큼, 이쪽에서 후보 선수급도 아닌 일반부원을 명단에 내는 건 큰 실례였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거리가 거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검도부가 있는 고등학교의 숫자는 전국에 겨우 오십여 곳.
개중 실제 대회에서 활약할 만큼 능력이 있는 검도부는 기껏해야 마흔 개를 간신히 넘는다.
그리고 그 고등학교들은 한 지역에 전부 모여있지 않고, 다양한 지역에 나뉘어 있다.
가깝게는 30분 거리부터, 멀게는 몇 시간까지.
그런 까닭에 연습 경기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 찾아가거나, 혹은 찾아오거나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데 기껏 그렇게 시간을 들였더니 정작 상대가 주전도 아닌 일반부원을 낸다?
‘누구라도 화낼 만해.’
이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아직 약했던 성현은 연습 경기에 참여해본 적 없었고, 따라서 누구와 붙었는지도 알지 못했던 거다.
“성상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일 가까우니 연습 경기 잡기도 좋고···.”
“가장 가까운 데가 거기긴 하지.”
“자주 연습 경기 잡는 곳이기도 하고.”
조윤호의 말에 이번에도 우르르 그럴듯하다며 말하는 남자 검도부 주전들.
이후로도 다양한 후보들이 나왔다.
배전공고, 마원고, 인현고, 세송고 등등.
연습 경기 상대가 될 만한 고등학교면 죄다 한 번씩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던 중, 문득 손대현이 입을 열었다.
“경중고는 어때요?”
“······.”
“······.”
경중 고등학교.
갑작스럽게 꺼내어진 그 이름에 주전들 사이에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경중고라는 이름에는 그만한 무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소부인 광천고에서 연습 상대로 가볍게 언급하기도 껄끄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럴 만하지.’
성현은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에 놀라지 않았다.
확실히 이 시기의 경중고는 그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실상부한 최강의 고등학교였으니까.
창단한 지 60년이 넘어가는 전통의 강호이자 현재 고교 검도계 최강의 자리에 삼 년째 군림하고 있는 곳.
지난 삼 년간 춘계, 추계, 그리고 개인전, 단체전 할 것 없이 전국 고등학교 검도 대회의 우승을 거머쥔 괴물 학교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그 고교 검도계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인 백성호가 재학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그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어차피 우승은 경중고’라는 말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강한 고등학교가 바로 경중고였다.
‘아직까지는-’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성현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잠시 입을 다물었던 3학년들이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에이, 경중고는 아니지.”
“걔네가 우리랑 연습해줄 이유가 없잖아.”
“그건 맞아. 당장 다른 빅4 애들이랑이나 연습할걸? 굳이 우리랑?”
빅4는 경중고와 함께 강호로 분류되는 호군고, 금제고, 용암고를 의미했다.
현재 패권을 쥔 경중고와 그것을 빼앗으려는 다른 세 고등학교는 어지간하면 대회의 4강에 이름을 올렸기에, 흔히 빅4라고도 불렸다.
그런 곳이 있는데 굳이 약소부인 광천고와 연습 경기를 잡는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역시 그렇죠?”
3학년 선배들의 격한 부정에 손대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그도 그냥 갑자기 떠올라 입 밖에 한 번 내봤을 뿐, 경중고가 연습 경기 상대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다들 그렇게 경중고가 연습 경기 상대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그때.
“연습 경기 상대 경중고 맞는데?”
나직한 여성의 목소리가 성현을 포함한 주전들의 귀에 파고들었다.
주전들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역시나, 이번에도 소리소문없이 다가온 서유나 감독이 서 있었다.
말문이 턱 막힌 주전들이 아무 말도 못 하는 와중에, 그나마 냉정하게 있던 정철이 되물었다.
“2주 뒤에 있을 연습 경기 상대가··· 경중고라는 말씀입니까, 감독님?”
“맞아, 잘 아네.”
“전국 대회 3년 연속 우승 고등학교 경중고?”
“그래, 그 경중고.”
“······대체, 어떻게 거길···?”
아연한 표정을 지은 정철의 말은, 남자 검도부 주전들의 속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한국 최강의 고등학교의 이름을 짊어진 경중고.
당장 다른 빅4랑 겨뤄 기 싸움을 하기 바쁠 그곳이 왜 광천고 같은 약소부와 연습 경기 일정을 잡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썼길래?
그에 대한 서유나 감독의 대답은 간단했다.
“잘.”
특유의 권태로운 표정으로 돌아온 한마디의 대답에 주전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얼굴을 냉정한 시선으로 슥 돌아본 서유나 감독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에게서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이번 연습 경기, 기대하고 있으마.”
그리 말하는 서유나 감독의 시선은 성현에게 못 박히듯 꽂혀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어디 한 번 이번 연습 경기에서 활약해 봐라.
주장 순서에 나올 최강의 고등학생, ‘백성호’를 상대로!
“허허.”
‘이거, 일이 흥미롭게 됐는데···?’
성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상황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