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화 : 알겠습니다 >
‘무슨 기세가···!’
성현이 별다른 행동에 나선 것도 아니다.
단순히 중단세를 취하고 있을 뿐.
그런데도, 그에게서는 어깨를 지그시 내리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가 취하고 있는 중단세의 완성도가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어디를 어떤 식으로 들어가도 감히 뚫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을 정도로.
영준에게 눈앞의 성현은 마치 철벽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견고하고 강건한 철벽.
‘이게, 겨우 일 년 배운 녀석이라고?’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영준은 목 아래까지 치솟은 ‘거짓말이지?’라는 말을 억지로 되삼켰다.
일 년.
고작 일 년이다.
이제 겨우 초보자 티를 벗고, 슬슬 검도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
그런 녀석이 취한 중단세에 위압감을 느낀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머뭇거리던 영준이 곧 이를 악물었다.
‘자세만···, 자세만 그럴듯한 거겠지!’
“하아아앗-!”
기부림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오른발을 크게 내디디고, 왼발을 박찬다.
힘이 고스란히 전달된 영준의 몸은 칼끝을 앞세워 번개 같은 속도로 성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노리는 곳은 머리.
호쾌한 머리치기 한 판으로 실력의 차이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줄 생각이었다.
물론, 대놓고 머리를 노리고 있다는 낌새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무리 상대를 눈 아래로 본다 해도, 그런 어쭙잖은 기술을 낼 만큼 자기 자신의 검도에 자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우선은 목 찌르기처럼 보이도록.
그러다가 상대가 반응을 보인 그 순간, 재빠르게 머리치기를 할 생각이었다.
“──!”
‘어디 한번 막아봐라!’
영준이 시도한 것은 ‘작은 머리치기’라 불리는 기술이었다.
상대의 목을 찌르듯이 뛰어들어, 얼굴 바로 앞에서 들어 올려 내리치는 기술!
첫 시작인 목 찌르기 동작을 통해 상대를 위축시키고, 그로써 머리를 칠 기회를 잡는 이 기술은 그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작년 추계 대회 단체전에서 이 작은 머리치기로 승리를 따낸 적도 있었다.
‘좋아-’
당황하여 꼼짝도 못 하는 성현을 보며, 영준은 ‘통했다!’라고 생각했다.
면금 사이로 무감정하게 가라앉아있는 눈동자를 마주하기 직전까지는.
오싹.
온몸에 쫙 끼치는 소름.
당황하여 채 꼼짝도 못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저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은 일말의 동요조차 없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죽도의 선혁 너머─ 영준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영준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그 순간, 이미 성현은 움직이고 있었다.
탁!
아래에서부터 올려치는 성현의 죽도.
찌르기를 머리치기로 바꾸기 위해 죽도를 들어 올리던 영준에게 그건 사형선고와 같았다.
필요 이상의 힘이 실린 죽도가 허공으로 치솟았고, 온몸에 빈틈을 훤히 드러낸 까닭이다.
어디를 쳐도 좋을 만큼.
“하아앗-!”
그리고 그것을 놓칠 성현이 아니다.
그는 그대로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들어 올렸던 죽도를 내려쳤다.
영준의 죽도를 쳐내듯 들어 올리는 것과 내리치는 것이 거의 한 동작처럼 이어졌다.
타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정면머리를 두들기는 죽도.
기검체 일치가 확실하여, 유효 타격이 안 될 수가 없는 격자였다.
영준이 하려 했던 머리치기를 성현이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다.
그것도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함으로써!
“이성현, 머리!”
심판을 보던 서유나 감독이 잽싸게 외쳤다.
끝까지 중단세를 유지하며 존심을 보이던 성현이 그제야 죽도를 내리고 자세를 풀었다.
넋이 나간 것 같이 서 있던 영준 또한.
“와, 끝내준다.”
“반격하는 거 진짜 예술이네.”
단 한 합 만에 난 결판.
명백히 실력 차이가 난 한 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경기였다.
그에 입을 다물고 있던 부원들이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영준의 주특기인 작은 머리치기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대회에서도 톡톡히 활약했던 기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혀 통하지 않은 데다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치기까지 했으니···.
“그러게 우리 말 좀 믿지.”
“분명 쟤, 하윤이가 봐줬다고 생각했을걸?”
“하윤이가 누구 봐줄 성격이 아닌데 말이야. 오히려 두들겨 팼으면 팼지.”
“너희들, 시끄러워.”
미간을 찌푸린 하윤이 톡 쏘아붙였지만, 그녀의 옆에 있던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생김새와 말투는 굉장히 세 보이는 그녀지만 정작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까닭이다.
“······.”
그러나 주변 부원들의 웅성거림은 영준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방금 자신이 당한 패배를 되새기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반응조차 할 수 없던 반격.
마치 한순간 끝없는 수렁에 빠져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수준이 아니었어.’
그것 하나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성현은 그의 주특기가 작은 머리치기라는 것을 알고 그걸 기다렸다가 대응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저 끝까지 봤을 뿐이다.
찔러 들어오기 전부터, 그 이후까지 전부.
그 모든 게 성현의 눈에는 보였던 거다.
그러니 저토록 여유롭게 그의 죽도를 걷어내고 반격을 할 수 있던 것이고.
문득 영준의 뇌리를 스친 건 그에 대하여 말하던 부원들이 빼놓지 않고 했던 말이었다.
‘하윤이랑 대등한, 실력-’
여자 고교 검도계의 천재라 불리는 하윤.
그런 그녀와 대등한 실력을 가졌다면, 마땅히 천재라 불려야 하지 않는가?
‘이길 수 있을까?’
가장 자신 있던 기술을 그대로 반격당한 탓일까.
영준은 다시 대련을 준비하는 성현에게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다만 엄밀히 말해서, 그의 실력이 그렇게까지 나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가 정철의 졸업 후 광천고의 에이스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약소부라 한들, 한 고등학교를 대표하는 에이스라 불리기 위해선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해줘야만 했다.
다른 학교에서 봤을 때도 에이스라 부를만한 자격이 있어야 대우를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뿐.
그의 실력은 딱 약소부 에이스 정도였지, 시간을 거슬러온 괴물과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영준의 불행이었다···.
“두 판째!”
“······.”
“······.”
탁, 타닥!
이윽고 시작된 두 번째 판.
방심을 완전히 걷어낸 영준은 이전과는 달리 공세부터 시작해 천천히 성현을 압박해 들어갔다.
무턱대고 들이미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자세를 무너뜨려 기회를 얻고자 함이었다.
상대를 얕보는 마음을 완전히 버린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무너뜨릴 수가 없어.’
그것은 전보다 더한 절망으로 되돌아왔다.
중단세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성현은 영준의 어떠한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았기에.
그저 묵직하게 공세를 맞받아 쳐가며 서서히 앞으로 밀고 나올 뿐.
오히려 마음이 흔들려 기회를 여럿 내준 건 적극적으로 공세를 한 영준 쪽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성현이 치고 들어오지 않아 아직 버티고 있을 뿐, 이미 자신은 이길 수 없음을 영준은 깨닫고 있었다.
“······읏.”
기세에서부터 압도당했기 때문일까?
분명히 자신과 비슷한 키였을 텐데, 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성현에게 영준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호면의 그림자 너머에 있는 무덤덤한 시선이 그만큼 두려웠던 까닭이다.
그리고, 성현이 움직인 건 바로 그때였다.
탓!
겨눠진 죽도를 옆으로 쳐내며 파고든 성현.
문득 영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바로 직전에 있었던 대련에서의 머리치기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죽도를 쳐내고 머리치기를 시도하지 않았던가?
‘어딜-!’
똑같은 방법에 또 당해줄 수는 없다.
이를 악문 영준이 팔을 끌어올렸다.
양 주먹을 비스듬히 세우고, 눕히듯 들어 올린 죽도로 머리를 보호한 것이다.
그것이 성현의 노림수라는 것도 모르는 채.
“하압-!”
타악!
부드럽게 휘어진 궤적의 죽도가 들어 올린 영준의 손목을 두들겼다.
처음부터 머리치기를 페인트로 쓰고, 손목을 노리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유려한 검격이었다.
“이성현, 손목! 시합 끝!”
서유나 감독이 쐐기를 박듯이 외쳤다.
정식 경기 규정대로 한 대련이었으니, 머리 1점-손목 1점 하여 총 2점을 내리 내줘버린 영준의 패배였다.
단 한 점도 따내지 못한 일방적인 패배였고, 실제 경기 내용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하···.”
어떻게 반응하지도 못한 채, 완전히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준이 작게 탄식했다.
느껴지는 실력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인 나머지 패배감마저 들지 않을 지경이었다.
성현은 스스로가 했던 말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증명해낸 것이다.
자신에게 광천고의 주장이 될 실력이 있음을.
‘아니, 저 정도면 제발 주장 좀 맡아달라고 해야 하는 수준이지.’
저런 강자가 정철과 함께 단체전 주전이다?
사실상 2승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머지 2승을 자신과 다른 주전들이 어떻게든 따내기만 하면, 광천고는 단체전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번 인정하고 나니 영준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양측, 인사!”
대련을 마치기 위해 마주 선 성현과 영준, 두 사람을 보며 검도부 부원 몇몇이 바싹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혹여나 영준이 후배에게 완패했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난동을 피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래 때때로 감정이란 건 이성을 쉽게 이기고는 하는 법이었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주 선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 숙여 예를 지킴으로써 대련을 끝냈을 뿐이다.
그렇게 대련이 끝나자 부원들은 다시 자신들의 훈련을 위해 흩어졌고, 남자 검도부 주전들만이 성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후······.”
호면을 벗은 영준이 참았던 숨을 뱉었다.
그가 풀죽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졌다. 완전히 졌어. 성현이 너한테 주장이 될 실력이 있다는 거, 확실히 인정할게.”
깔끔한 인정이었다.
하기야, 대련에서 이렇게까지 손도 발도 못 쓰고 완벽하게 져버리면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추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럴 수야 있겠지만, 영준은 그 정도로 추태를 부릴 생각은 없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호면을 벗은 성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졌는데, 뭘.”
“아뇨, 첫판의 작은 머리치기는 훌륭했습니다. 속으로 굉장히 감탄했었어요.”
성현은 웃는 얼굴로 영준을 치켜세웠다.
딱히 그가 영준에게 엄청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앞으로 몇 년간은 같은 검도부에서 주전으로 동고동락할 사이.
당장 다음 연습 경기에서 있을 단체전에도 함께 나가는데, 서로 낯을 붉히는 것보다는 좋은 선, 후배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을 테니까.
그것을 위해 간단한 칭찬 몇 마디쯤이야.
‘이 나이에 어린애랑 다투는 것도 우습고.’
겉으로 보기에는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성현이지만, 정작 그 속에 있는 건 칠십 살이 넘은 노인이다.
그 나이 먹고 고등학생과 진심으로 다투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비록 요즘 들어 ‘정신은 몸을 따라간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등학생의 몸으로 있다 보니 굉장히 젊어진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으니.
그들의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은 듯 보이자, 웃는 얼굴의 정철이 나섰다.
“아무튼, 이제 다들 인정하는 거지? 성현 후배한테 주장 맡을 실력이 있다는 거.”
“네. 인정합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죠. 이렇게 졌는데.”
영준을 포함한 남자 검도부 주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방금 대련을 보고도 성현의 실력을 부정할 만큼 못난 이들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주전도 되지 못했으리라.
“그럼 앞으로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다들 알았지?”
““네!””
“좋아. 아까 정하려던 단체전 순서부터 마저 정해보자. 일단 가장 먼저, 성현 후배한테 주장 순서를 맡기고 싶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전 찬성입니다.”
정철의 의견에 가장 먼저 찬성한 건 영준이었다.
대련에서 완패한 그는 성현이 차기 에이스이자 주장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도부의 현 주장 겸 에이스와 성현이 나타나기 전에는 차기 주장 겸 에이스로 생각되던 이, 두 사람이 찬성하니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수긍하는 듯하여지자, 이번에는 정철이 성현을 바라보았다.
“어때, 성현 후배. 주장 순서를 맡아줄래?”
남자 검도부 주전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자, 성현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