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화 : 제대로 보여드리죠 >
“그래, 맞아. 단체전 출전 선수가 확정됐으니 이제 순서를 정해둘까 싶어서.”
정철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순서’란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검도 단체전의 진행 방식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검도 경기는 기본적으로 항상 1대1로 치러진다.
단체전 출전 선수가 일곱 명이라 하여, 한 경기에 그들 전원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 난전을 벌이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건 검도라는 무도에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한판을 따내는 걸 구별하기도 굉장히 어려울 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검도 단체전은 일곱 명의 출전 선수가 선봉-2위-3위-중견-5위-부장-주장 순으로 상대와 겨루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바로 이 나가는 순서를 정하고자 정철과 다른 주전들이 성현을 찾은 것이다.
‘보통은 감독이 정해주는 순서대로 나가지만···.’
검도 단체전에서 누가, 어느 순서로, 어떤 임무를 맡아 나가는지는 굉장히 중요했다.
사실상 단체전 전략의 전부라 해도 좋을 만큼.
검도 단체전은 여러 명이 순서대로 나가기 때문에, 기세 싸움의 영향이 그만큼 큰 까닭이다.
제대로 승세를 타면 다소 실력 차가 난다고 해도 이길 때가 있고, 반대로 흐름을 잃으면 이길 경기도 패배하기 마련이니.
그래서 보통 출전 순서는 감독이 부원의 실력과 성향을 살펴 정하는 편이었다.
‘여기서 그런 걸 바라면 안 되겠지.’
서유나 감독은 어디까지나 광천고 ‘여자’ 검도부 감독이다.
‘통합’ 검도부가 아니라, ‘여자’ 검도부.
비록 남자 검도부의 훈련까지 지도해주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냥 그녀가 베푸는 호의일 뿐, 짊어진 의무는 아니었다.
그런즉, 남자 검도부의 감독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인데, 놀랍게도 현 감독은 검도의 ㄱ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국어 교사였다.
얼떨결에 창설되긴 했으나 학교 측에서 남자 검도부에 예산을 더 배분하기 싫은 까닭에 적당한 교과 선생을 감독이라며 앉혀놓은 까닭이다.
그동안 남자 검도부가 얼마나 대우받지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런 감독이 단체전 순서를 짤 수 있을 리 만무.
이 때문에 주장인 정철과 주전들이 그들끼리 논의하여 출전 순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라고는 해도, 결국 대부분 결정짓는 건 광천고의 소년가장, 정철이었지만 말이다.
“혹시 선호하는 순서가 있어?”
“아뇨, 딱히 없습니다.”
“그럼 가고 싶지 않은 순서는?”
“그것도 없습니다.”
“흠, 어디든 좋다는 거지···. 하하! 자신감 있는 게 보기 좋은걸!”
정철이 눈을 빛냈다.
씩 웃은 그가 재차 물었다.
“그럼 주장 순서는 어때?”
주장.
단체전 7명 중 마지막에 출전하는 순서.
확고부동한 팀의 에이스가 맡는 역할이며,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되고, 비기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포지션이다.
어떤 악조건에서든 무조건 승리해야만 하는 게 바로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대개 이 역할을 맡는 건 검도부 주장인 만큼, 성현을 주장으로 만들려는 정철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권유라 할 수 있었다.
“저는─”
“잠시만요! 주장! 아무리 그래도 주장 순서까지 맡기는 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닐까요!”
성현의 말을 싹둑 자르며 끼어든 건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검도부원이었다.
흘깃 얼굴을 확인한 성현은 곧 그가 최영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2학년 주전 선수임을 떠올렸다.
훗날 정철이 졸업한 이후, 광천고의 에이스로 불린다는 것도.
그래 봐야 약소부의 에이스지만 말이다.
“솔직히, 저는 아직 얘가 주장을 맡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이에요.”
최영준은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성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학년에, 이제 겨우 일 년 경력인 애가 주장을 맡는다? 다른 학교에서 얼마나 비웃겠어요?”
“······.”
“내년이라면 또 모를까. 올해부터 주장 역할을 맡기는 건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묵묵히 영준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정철이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전에 물었을 때와 이야기가 다르네.”
“그때는···.”
“영준이 너, 내가 전에 물었을 때 성현 후배가 주장을 맡아도 괜찮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나도 성현 후배한테 권유했던 건데,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무슨 의도야?”
“그게, 저는 단지-”
“내가 괜히 너한테 먼저 물어본 게 아니잖아. 그때 괜찮다고 했으면, 성현 후배가 주장을 맡아도 군말 없이 따라야지. 후배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정철은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뿐.
하지만 그게 결코 영준이 듣기에 편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정철의 말이 이어질수록 움츠러들었는데, 이는 정철이 화가 날수록 더 무뚝뚝해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영준을 부르는 호칭이 이름에서 ‘너’로 바뀌었다는 것이 정철의 분노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후···.”
쪼그라든 영준의 모습을 본 정철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가 전에 물어봤던 것을 영준은 그냥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성현에게 면목이 없지 않은가.
아침에 다들 동의했노라고, 그리 호언장담했던 게 새삼 생각나 낯이 뜨거워졌다.
‘나중에 따로 사과해야겠네.’
일단은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정철은 영준과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우리 솔직해지자. 너, 성현 후배의 실력이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거지? 너는 대련을 못 봤으니까.”
“······네, 맞습니다.”
영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도부 내에서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성현과 하윤의 대련이었지만, 그걸 실제로 봤던 건 검도부 인원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방과 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루어진 대련인지라 이런저런 일 때문에 늦었던 이들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준도 대련을 보지 못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1학년이 저 임하윤이랑 대등하게 대련했다고? 개소리하지 마!’
본래 사람은 자신이 직접 본 게 아니면 쉽게 믿지 않는 성향이 있다.
영준 또한 그랬다.
그는 직접 본 부원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엄청났다고 말해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전 훈련할 때 보았던 성현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분명 임하윤이 봐준 거겠지.’
이러한 영준의 오해가 더욱 깊어진 건 이후 일주일간 성현이 한 훈련이 전부 기본기뿐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제야 기본기를 숙달시키고 있는 이가 ‘천재 검도 소녀’라 불리는 하윤과 대등하게 대련했다는 말은 썩 믿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그런 까닭에 정철이 성현을 주장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을 때, 영준은 그가 그냥 농담하는 줄로만 알았다.
기껏해야 차차기 주장쯤으로 생각하는 것이겠거니 했을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아예 단체전에서 주장 순서까지 넘기려 하는 모습에 뒤늦게 정철이 진심임을 깨달아 급히 막아선 것이고 말이다.
“후, 이건-”
“제가 실력을 보여드리면 해결될 문제네요.”
가만히 있던 성현이 불쑥 끼어든 건 그때였다.
정철과 영준, 그리고 다른 주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다양한 의미를 담은 시선들.
그 사이에서 성현은 새하얗게 웃었다.
“정철 선배가 왜 저를 주장으로 삼으려 하는지, 실력으로 보여드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되겠어?”
“네, 이 기회에 확실히 증명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요.”
성현이 영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주장이 될 실력이 있다는 걸.”
자신이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장이 되겠다는, 사실상의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는 영준에 대한 도발이기도 했다.
자신의 실력을 가장 쉽게 증명하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대련이다.
이를 영준을 바라보며 했다는 건, 한번 붙어보자고 돌려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영준이 눈을 사납게 치떴다.
“···어디 한번 보자고, 그럼.”
으르렁대듯 말한 영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매서운 얼굴로 호구를 착용하러 떠난 뒤, 성현도 여유로운 얼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련을 위해서는 그 또한 호구를 착용해야 했으니까.
“미안해, 성현 후배. 괜히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네.”
정철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미안함 가득한 어조였다.
하지만 이게 그의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걸 성현은 이해하고 있었다.
분명 정철은 진심으로 그를 주장으로 삼고자 주전들에게 의견을 구했을 텐데, 그걸 영준이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될 줄은 아마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주장이 되기 전에 한 번쯤 확실히 하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그리고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장이 되는 일에 이 정도 시련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현의 농담에 정철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성현 후배라면 이 정도 시련쯤은 거뜬히 뚫고 주장이 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성현이 호면의 끈을 강하게 꽉 조였다.
면금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제대로 보여드리죠.”
*
‘주장이 될 실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영준은 성현이 한 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참으로 시건방진 말이 아닌가.
게다가 그걸 선배인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지껄여대는 꼴이라니.
하윤이 적당히 봐주면서 한 대련에서 좀 활약했다고 아주 선배 무서운 줄을 몰랐다.
선배로서, 기본기나 연습하는 녀석이 주장이 될 실력이 있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닫게 해줘야 했다.
‘짓밟아주지.’
호구 착용을 끝낸 뒤, 죽도까지 든 영준은 기세등등하게 성현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왔다.
마찬가지로 호구 착용을 마친 성현과 미간에 내 천(川) 자를 그린 정철, 그리고 다른 주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선 영준이 성현을 향해 말했다.
“개인전 규칙 그대로 한 판당 4분, 3판 2선승제다. 심판은 정철 선배가···.”
“내가 봐주마.”
내뱉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들려온 목소리.
그것을 들은 영준이 흠칫 몸을 떨었다.
나른한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굉장히 귀에 익었던 까닭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유나 감독이 특유의 권태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한 판당 4분, 3판 2선승에 연장전까지 갈 경우, 시간제한 없이 한 판 따는 쪽이 승리. 이 정도면 되겠지?”
“네, 네-”
예상치 못한 감독의 등장에 영준은 당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들 보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서유나 감독의 말을 들은 영준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검도부 부원들의 시선이 모조리 이곳을 향해 있는 중이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임하윤마저도 훈련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영준의 이마를 타고 땀 한 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뭐, 뭐야. 이 분위기···.’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불안감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영준은 그것을 억지로 떨쳐냈다.
상대는 아직도 기본기나 연습하는 초짜.
그런 녀석을 상대로 긴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아는 녀석은 박살을 내서 버릇을 고쳐줘야지!’
죽도를 꽉 움켜쥔 영준이 성현의 앞에 섰다.
성현도 마찬가지로 그의 앞에 섰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예를 갖추는 인사를 나눴다.
서로가 어떻게 생각하든 경기에 앞서 예를 갖추는 건 검도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기에.
시작선 앞에 선 두 사람이 중단세를 취하고 신호를 기다렸다.
“시작!”
그들을 번갈아 보던 서유나 감독이 구령을 내렸고, 대련이 개시되었다.
“······!”
그리고 직후, 영준은 깨달았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