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화 : 공세 >
“네가 매일 대련하면서 많이 가르쳐줬으니까.”
“아니, 그건-”
“모를 거라 생각했어?”
“그으- 건- 말이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수연이 성현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말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현과 대련을 할 때마다 일부러 다소 힘을 빼고 지도하듯 상대해주며 그의 실력을 키워줬었다.
정작 성현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대다수의 검도부 부원들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단지 두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을 뿐.
그걸 노인의 정신이 깃들며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성현이 대번에 눈치챈 것이다.
첫 합에서부터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네 덕분이야. 내가 이만큼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건.”
달콤한─어디까지나, 수연이 듣기에 그랬다는 이야기다─ 성현의 말에 수연은 아예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그런 거, 아냐···.”하고 끊어질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만 그 모습이 성현에게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호면이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본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지는 알 수 없기도 했다.
지금의 성현은 고등학생 소년이 아니라, 거의 모든 욕망에 초탈하여 오직 검도만을 바라보는 노인의 정신을 갖고 있었으니까.
“······.”
“······.”
겉으로 보기에는 새콤달콤한 청춘의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
그곳에 끼어든 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당사자들은 물론, 졸지에 청춘 연애담에 꼽사리 끼게 된 감독, 더불어 몰래 주시하고 있던 검도부 부원들까지도 말이다.
“미안, 잠깐 실례해도 될까?”
톤이 낮고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을 본 수연이 화들짝 놀랐다.
방금까지 얼굴을 붉히던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그만큼 그녀가 예상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묶어놓은 갈색 섞인 머리카락, 날카로운 고양이 눈, 사나워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를 보호 욕구가 솟구치는 미모까지.
호면을 뺀 검도복을 차려입은 소녀는 광천고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었다.
그건 수연의 외침만 들어도 확실했다.
“하윤 선배?!”
광천 고등학교 여자 검도부 주장 ‘임하윤’.
이제 2학년이 된 그녀는 고교 검도계에 상당한 충격을 준 소녀였다.
어렸을 적부터 검도 선수인 아버지 밑에서 검도를 배웠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온갖 대회를 휩쓸며 중학교 검도계를 제패!
이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단숨에 강호인 광천고 여자 검도부를 휘어잡았다.
1학년임에도 확고부동한 에이스이자, 주장, 그리고 단체전의 ‘패배하지 않는 대장’으로 완벽히 자리매김했다는 이야기다.
‘미래에도 아주 유명하지.’
성현도 하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여 검도 세계선수권 대회 여자 개인전 준우승 4회, 단체전 준우승 3회라는 화려한 경력을 쌓게 되니까.
성별을 떠나, 검도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다만 끝내 일본을 정면에서 꺾는다는 한국 검도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안타까움 속에 은퇴하여 검도 도장에서 후배들을 양성했다던가.
“미안, 수연아. 네 남친 좀 잠깐 빌릴게.”
“아, 아, 아- 아니에요! 남친이라뇨! 그, 아직 아니에요!”
‘아직···?’
“아님 말고.”
킥킥대며 웃은 임하윤이 성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두 사람이 대련하는 건 잘 봤어. 재밌더라. 신기하기도 하고.”
“신기···요?”
“응. 난 솔직히 방금처럼 완벽한 죽도 눌러 머리치기는 못 할 거 같거든.”
담담한 하윤의 말에 주위가 술렁였다.
그녀의 천재성은 검도부 모두가 알고 있다.
1학년에 주전 자리를 꿰찬 괴물에 대해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그런 그녀조차 방금 같은 죽도 눌러 머리치기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럼 대체 쟤는 뭐야?’
‘이성현···이라 했었나. 남자 쪽은 주전 한 명 확정이네.’
‘하윤이한테 버금가는 괴물이라니.’
수군거리는 부원들.
그들을 개의치 않고 성현이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 아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있어.”
하윤은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성현은 알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분명 웃는 얼굴임에도, 하윤에게서는 저릿한 투지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야에는 이미 그녀가 이후에 있을 대련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
“대련이요?”
“맞아. 대련. 한 번 겨뤄보자.”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은 ‘눈’ 외에는 별로라 실망하실 텐데요.”
“일단 내가 궁금한 건 ‘눈’이니까 괜찮아.”
“그럼, 좋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 바로 할까?”
“네. 바로 하죠.”
대련 승낙을 얻은 하윤이 방긋 웃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좋아-!”
도장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하윤은 언제 사람 좋게 웃었냐는 듯, 나찰과 같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타오르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제야, 성현은 진짜 하윤을 본 기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임하윤’은 자신의 검만큼이나 격렬하고 흉포한 미소를 짓는 검도인이었으니까.
방금 같은 착한 선배가 아니라.
‘‘전’에는 말도 못 붙였던 상대와 대련이라.’
참으로 과거로 돌아온 보람이 있지 않은가?
“······허허.”
작게 웃은 성현이 하윤의 앞에 섰다.
어느새인가 호면을 착용한 하윤 또한 그와 마주 보듯 선 상태였다.
서로를 향해 예를 갖추는 인사가 이어지고.
다음 순간, 마주 중단세를 취한 두 사람 사이로 묵직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서서히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
“······.”
스윽, 타다닥! 탁!
죽도의 끝, 선혁(先革)이 맞닿는 거리에서 이어지는 공세.
두 자루 죽도가 쉴새 없이 얽혔다가 풀려나고, 서로를 짓누르려 으르렁대며 기세를 드높였다.
구경하던 부원 중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죽도들이 그려내는 공세에서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치열하고 수준 높은 공세였던 까닭이다.
‘대련이라더니···.’
‘어디 대회 결승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공세인데?’
흔히 검도에 대해서 하는 착각 중 하나가 ‘빠르게 뛰어들어 치면 그만 아니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번만이라도 중단을 취하고 있는 상대를 앞에 두면 다시는 언급 못 할 착각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죽도를 무시한 채 뛰어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므로.
그렇기에 이루어지는 게 바로 공세(攻勢)다.
죽도의 칼끝이 상하좌우는 물론이요, 거리의 가깝고 멀기까지 다스리며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틈을 만들어낼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타닥, 탁! 타다닥!
즉, 저것은 단순히 죽도끼리 부딪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복잡한 심리전이다.
죽도가 죽도를 내리누르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동작 하나에도.
‘이 거리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칠 수 있는 거리까지 들어갈까.’
‘맞지 않고 내 타격을 성공시키려면 어떤 식으로 치고 들어가는 게 좋을까.’
‘상대의 겨눔세를 무너뜨리고 기술을 결정 짓기 위해서는 얼마나 중심을 흐트러뜨려야 할까.’
──등등.
다양한 의도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상대에게 기회를 내주게 되고, 그대로 한판을 내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들의 공세는 더욱 긴장감 넘치는 것이었다······.
‘흠-’
그러나 대등하게 이어질 것만 같았던 공세 싸움은 서서히 성현의 열세로 흘러갔다.
이는 손아귀 힘, 이른바 악력에서 성현이 부족함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죽도를 겨눈 상태로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공세에서 악력은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게 부족하니 당연히 서서히 밀려날 수밖에.
찰나, 기회를 본 하윤의 눈이 빛났다.
“-하아아앗!”
강렬한 기부림,
하윤이 왼발을 강하게 박차고, 오른발은 마룻바닥에 스치듯 정확히 한 걸음을 나아갔다.
동시에 오른발이 나아가는 시작에 맞춰 들어 올려 졌던 죽도가 발바닥이 마룻바닥에 닿는 그 순간에 벼락처럼 성현의 머리를 노렸다.
마치 상대를 찢어발기려 드는 것 같은 흉포한 검격이었다.
물론 그러한 강렬한 기세와는 별개로, 자세만큼은 철저히 기본기에 입각해 있었다.
등줄기는 바르게, 드는 것과 치는 것이 한 박자에, 지나치게 힘을 빼지도, 들어가지도 않은 교과서적인 머리치기!
“······!”
그러나 악력에서 밀려 틈을 보였을지언정, 보는 눈만큼은 달인 이상인 성현이다.
몸이 젊어지며 눈이 더 좋아진 그에게 있어 하윤의 머리치기는 아직 미숙하여 간파하기가 썩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녀의 몸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손에 잡힐 듯 세세하게 보였으니까.
“쯧!”
문제는 단련의 부족이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니, 눈으로는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는 것이다.
타악!
“크-”
성현은 재빠르게 머리를 치워, 죽도를 어깨로 받음으로써 하윤의 검을 막아냈다.
저절로 침음이 흘러나올 만큼 묵직한 충격이 어깨로부터 전해져왔다.
대련 첫 검격을 파훼했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상대가 한 번 빈틈을 보인 이상, 그것을 물어뜯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게 그가 봤던 하윤의 검이었으니까.
“히야아아앗-!”
예상대로, 성현의 자세를 다소나마 흐트러뜨린 하윤이 그를 향해 짓쳐 들었다.
좌, 우, 정면의 머리부터, 오른 손목과 왼 손목, 오른 허리와 왼 허리, 그리고 목에 이르기까지.
하윤의 죽도는 격자 부위─타격 성공 시 한판으로 인정되는 부위를 말한다─ 여덟 곳을 자유자재로, 또 거침없이 노렸다.
괜히 여자 검도계의 괴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것처럼 빠르고 강하면서도 빈틈없는 검격!
죽도가 사납게 질주했다.
“미쳤다···.”
“저런 게 가능해?”
감탄을 금치 못하는 부원들.
그리고 그건 성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훌륭하구나.’
연달아 기술을 내고 있음에도 기검체 일치는 완벽 그 자체.
발은 가벼워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듯하고, 죽도의 궤적은 유려하기 짝이 없다.
본래 검도인은 치는 것으로 기회를 찾는 타승법(打勝法)보다는 그 반대인 승타법(勝打法)을 추구해야 함이 바람직하나, 이 수준까지 되니 그런 말도 쏙 들어갈 지경이다···.
‘괜히 훗날 최고의 검사가 되는 게 아니군.’
어지간한 검사는 하윤의 기세조차 이기지 못하고 곧장 패배하게 되리라.
물론, 성현은 어지간한 검사가 아니었다.
비록 몸은 아직 완성되지 않을지언정, 그의 정신은, 그리고 기술은 실로 달인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던 검도부 부원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괴물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는 것을.
“어라?”
“생각해보니까, 지금 유효타인 거 아예 없었지?”
“왜··· 안 맞는 거지. 대체 왜?”
상대의 공격을 빗겨내고, 막고, 흘리고, 쳐내고, 꺾고, 뒤튼다.
끝까지 깔끔하게 들어가야 유효타로 인정되어 한판을 따낼 텐데, 그것을 모조리 중간에 끊어버리니 가능할 리가.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이 오직 최소한의 움직임과 최저한의 힘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건 상대를 완벽하게 간파하여,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 최적의 방어를 떠올려 행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컨대.
하윤의 검이 거칠고 억센 ‘동(動)’이라면.
성현의 검은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정(靜)’이다.
몰아치는 움직임은 그저 중후한 고요함 속에 잠식되어 사그라들 뿐.
그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달인 수준의 힘과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를 제대로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직접 상대하고 있는 하윤조차 그 편린만을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었으니.
‘눈 빼고는 별로라더니!’
하윤은 내심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질식하는 것을 산 채로 느끼는 기분이랄까.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게 이어지지를 않으니 감각마저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철벽을 두들겨도 차라리 지금보다는 나으리라.
이것이야말로 노화로 인해 쇠약해진 몸으로 검도를 계속하고자 성현이 찾은 ‘길’.
그가 칠십 대 노인임에도 검도계에서 ‘불패의 달인’이라 불린 이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