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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의 신-3화 (3/150)

< 3 화 : 중단세 >

“아니 이 자식이 걱정해줬더니 개소리하네. 진짜로 정신이 나갔냐?”

격한 반응에 성현이 피식 웃었다.

믿고 싶지 않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탈모가 오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훗날의 자신이 대머리가 된다니.

분명 누구라도 부정하고 싶은 미래일 터였다.

“맨날 싸우던 강수연하고는 잘 얘기했으면서 왜 나한테는 시비야.”

“싸우다니. 내가?”

“그럼 너지. 또 누구겠냐.”

둘이서 아주 눈만 마주쳤다 하면 아옹다옹했노라고, 태준은 그렇게 말했다.

‘으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성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그에게 있어 고등학교 시절은 까마득한 추억인지라, 당시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태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기억나는 게 있었다.

대개 사춘기 소년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싶어 하고, 고등학교 때의 그 또한 그러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수연에게 느끼는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퉁명스럽게 대하곤 했었다.

그에 수연도 반발하면서 자연스레 두 사람은 말만 나눴다 하면 다투기 일쑤였더랬다······.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 법이지.”

과거의 자신이 기억나기는 했지만, 노인의 정신을 갖게 된 지금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와서 손녀뻘인 소녀와 다투라고?

도장에서도 어린아이들에게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뭘 하든 허허 웃는다고 하여 ‘허허 할아버지’라고 불리던 그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성현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자신이 퉁명스레 대하는 걸 그만둔다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뭐. 그것도 그렇다만···. 근데 말투 뭐야?”

태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린 성현이 잠시 머뭇거렸다.

최대한 ‘학생다운’ 말투를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린 끝에 그가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그리하여 점심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이윽고 시작된 5교시 수업.

‘허허-’

거의 반백 년 만에 수업이란 걸 듣게 된 성현은 빽빽하게 쓰여 있는 칠판을 보며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칠십 먹은 노인인 그에게─지금은 아닐지라도, 아무튼─ 고등학교 수업 내용은 외계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검도에 투신한 이후로 사실상 공부를 손에서 놓은 성현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흐릿하게 기억나는 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 이거 들어본 거 같은데?’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 뭔가를 하기에는, 고등학교 수업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흐음, 그래도 계속 듣다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것 같기는 한데···.’

사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무려 육십 년 전 교육 받았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뜻이니까.

성현이 생각하기에, 이 또한 과거로 돌아온 영향 중 하나일 듯했다.

노인의 머리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테니까.

칠십 대에는 꼭 기억하고 싶은 것 외에는 잘 떠오르지도 않곤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로구나.’

성현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고등학생인 이상 내신을 위한 시험을 볼 터.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게 있는 게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물론 대학에는 검도 특기자로 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내신 성적이 좋아서 나쁠 일은 없으니.

그렇게 성현이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방과 후가 되었다.

“──좋아! 다들 오늘도 수업 듣느라 고생 많았다. 푹 쉬고, 내일 보자.”

“저희는 야자 해야 되는데요?”

“응, 나는 퇴근이야.”

““우~!””

그리운 얼굴의 담임 선생님이 짤막하게 종례를 진행했고, 그것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수연이 성현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마치 간식을 기다린 강아지 같은 그녀의 모습에 성현은 내심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걸 알 리가 없는 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현이 너 검도부 갈 거지?”

“그래, 가야지. 아침 훈련 빼먹었던 거 벌충도 해야 하니···.”

“그럼 같이 가자!”

환한 얼굴의 수연이 성현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그게 마치 손녀가 애교를 부리는듯해 귀여웠던 터라, 성현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허허 웃으며 발맞춰 걸어주었다.

어쩐지 시야 한쪽에서 못 볼 걸 본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태준이 보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가 보기에 귀여우면 그만인 것을.

‘흐음.’

수연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검도부 도장.

운동장 옆에 지어진 도장은 광천 고등학교가 얼마나 검도부를 밀어주는지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것이었다.

하기야, 광천고에 있는 몇 없는 운동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적을 거두고 있는 게 검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디까지나 여자 검도부 이야기지만.’

전국 중 · 고등학교 검도 대회에서 우승 경력이 있고, 나름 강호로 분류되는 여자 검도부와는 달리, 광천고 남자 검도부는 그 세가 약했다.

우승은커녕 32강에서도 빌빌대며 연신 패배를 거듭하는 게 남자 검도부였으니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남자 검도부가 만들어진 것조차 여자 검도부가 승승장구한 뒤에, ‘남자 검도부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라는 의견 때문이었으니.

다만, 이제는 달라지리라.

과거로 돌아온 성현이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들어가자!”

“그래.”

‘여기도 무척 오랜만이로구나.’

성현의 눈이 검도장 내부를 찬찬히 훑었다.

그와 수연이 들어온 문 좌우로 호구 보관을 위한 개인 진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쪽으로 죽도들을 넣어두는 거치대도 보였다.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지, 한쪽 벽면으로 밀어둔 타격대 또한.

전체적인 모습은 일반적인 검도장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굳이 특징적인 걸 하나 꼽자면, 새롭게 꾸민 검도장답게 내부가 무척 깨끗하다는 것 정도?

‘···익숙한 냄새.’

미소를 지은 성현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오직 검도장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향이 코끝에 진하게 감돌았다.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한 향기다.

귓가에 울리는 기부림─검도의 기합─의 소리도 그랬다.

마치 떠났던 집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 감독님! 안녕하세요!”

성현이 다시 돌아온 검도장에 마음이 풀어져 있는 사이, 검도장 안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수연이 냅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짧게 대꾸한 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츄리닝 차림의 여성이었다.

다소 날카로운 눈매에 무덤덤한 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화장기 하나 없음에도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여성.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녀가 누구인지는 뻔할 노릇이라.

‘서유나 감독.’

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

단순히 그녀가 고등학교 때 검도부를 맡았던 감독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걸 떠나서, 그녀의 능력이 먼 훗날의 성현에게도 기억될 만큼 출중했던 까닭이었다.

광천고 여자 검도부의 황금기를 이끈 감독이라 하면 검도 하는 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이성현.”

“···네, 감독님.”

“오늘 아침 연습 안 나왔던데?”

“늦잠 잤습니다. 죄송합니다.”

성현이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 딱히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칠십 대 노인일 때 서유나 감독은 팔십 대 노파였으니까.

굳이 ‘지금’만을 따진다 해도, 그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고, 그녀는 이십대 중반이다.

가당찮은 자존심이 아니고서야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 다음부터는 빠지지 마라.”

그게 끝이었다.

짧게 대꾸한 서유나 감독은 다시 다른 부원들이 연습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습에 빠진 걸 훈계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무덤덤한 태도였지만, 성현은 물론이고, 수연도 별말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것이 서유나 감독의 스타일이었으니까.

억지로 뭔가를 시키기보다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나설 때 도움을 주는 방식.

좋게 말하면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식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내버려 두다가 필요할 때만 개입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성현은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독에게는 나름대로의 지도 방식이 있는 것이고, 그걸로 전국 대회 우승이라는 성과도 얻었으니.

게다가.

‘가르쳐 달라고 하면 성심성의껏 가르쳐주시는 분이니.’

무조건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감독에게 재차 고개를 숙인 성현은 수연과 함께 검도부 활동을 준비했다.

들고 온 죽도집에서 죽도 한 자루를 꺼내고, 자신의 도복을 꺼내 탈의실에서 갈아입은 것이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맨발로 서늘한 마룻바닥을 밟자, 비로소 ‘시작되었다’라는 기분이 들었다.

‘우선은 준비 운동부터.’

대부분의 운동에서 시작 전에 몸을 풀어주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검도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검도를 계속했던 성현은 준비 운동의 중요성을 더욱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세세하게 몸을 풀었다.

목, 어깨, 등, 팔, 가슴, 허리, 무릎, 발목에 이르기까지 전부.

특히나 주의 깊게 풀어준 것은 각 관절 부위였는데, 이는 늙은 몸 중 가장 쉽게 상하는 부분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더 열심히 하는 거 같아···.”

수연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 운동을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성현은 그저 씩 웃어줬을 따름이지만.

십오 분 남짓 이어진 준비 운동이 끝났을 때, 비로소 몸이 적당히 풀렸다.

옆에서 함께 준비 운동을 하던 수연이 손짓했다.

“대련 한 판 어때?”

“좋지.”

웃으며 대답한 성현은 꺼내온 호구를 하나씩 착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갑상(甲裳)을 허리에 둘러 큰 갑상드리움 안에서 매듭지어 묶었고, 갑상 허리띠의 반절 가량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갑(甲)을 꼈다.

이후 갑의 끈 처리를 마친 성현이 머리에 수건을 쓴 뒤, 드디어 호면에 얼굴을 집어넣었고, 잘 밀착되도록 조절한 뒤 좌-우측 두부의 끈을 매고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이후 호완(護腕)을 왼손-오른손 순으로 낀 뒤, 손목 끈을 적당히 조이면 끝.

“후···.”

차분하고 정성스레 호구 착용을 마친 성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좁아진 시야와 묵직한 무게가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우를 만나듯 자연스럽기도 하였으니.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짧고도 길었던 기다림이 보답받을 시간이다.

이제 비로소 바뀐 몸을 확인해볼 차례였다.

“자유 대련?”

마찬가지로 호구 착용을 마친 수연이 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 성현은 그녀에게서 다소 떨어진 장소에 섰다.

죽도의 끝부분, 즉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선혁이 맞닿는 거리였다.

잠시, 예를 취하는 인사가 이어졌다.

‘아주 좋다.’

숨을 고른 성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천천히 그가 자세를 취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목덜미를 세워 턱을 당긴다.

무릎은 가볍게 펴되, 두 발의 넓이가 반보를 넘지 않도록 하고, 또 몸의 무게 중심은 앞에 나선 오른발에 6, 뒤를 받치는 왼발에 4를 유지.

죽도의 손잡이 끝이 위치한 장소는 배꼽에서 주먹 하나 반 정도 앞.

손잡이를 쥔 오른손은 코등이 아래쪽을 가볍게, 왼손은 그로부터 주먹 하나 거리를 두고 끝자락을 감싸듯이 쥔다.

그리하여 겨눠진 죽도의 검선(劍先)이 수연의 미간을 가리켰다.이를 검도에서는 중단세(中段勢)라 칭하니.

천지인(天地人)의 인(人)- 사람의 자세이자, 오행의 다섯 가지 겨눔세 중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럽다 하여 물의 자세라고도 하였다.

‘어···?’

성현의 중단세를 마주한 수연은 내심 놀랐다.

어제만 해도 없었던 견고함이 성현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장 좀 보태서, 사람이 아니라 석상이 서 있는 것 같이 보일 정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중심이 제대로 섰어.’

단순히 중단세 비슷한 자세는 아무나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적당한 자세 또한 마찬가지.

그럼 제대로 된 ‘중단’은 무엇이냐?

바로 자기만의 중심을 바로 세운 자세다.

단순히 겉보기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균형을 깨우침으로써 나아감과 물러남이 자유로운 자세!

그게 바로 진짜 ‘중단세’였다.

지금 성현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단순한 중단에서 위압감이 느껴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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