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이상증세 >
극한의 컨셉충 134화.
작품 제목: 이상증세
“논란의 중심이 된다는 건 언제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솔직히 말해서 왜 헬라가 그와 같은 힘을 천마님께 줬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날 이렇게 불러낸 건가?”
분명 집무실 밖을 나섰는데, 천마는 로아가 있는 방에 강제 소환되었다.
“아. 그렇군요. 저번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닙니다. 몰래 백도어를 만들어 놓은 거라 금방 헬라에게 들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천마는 머리가 번잡하여 로아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일들이 많았으니까.
“저번에 말했던 걸 이어서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물론입니다.”
로아가 손을 펼치자 그 위로 작은 큐브가 나타났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테오난에서 봤던 그 큐브인가?”
“예. 이건 크리트라고 불리는 자가기억장치입니다.”
“그게 뭐지?”
“상대의 트라우마를 없애 주기 위해 개발된 기억 조작 장치라는 겁니다. 이걸 쓰게 되면 상대에게 있는 기억 일부분을 없애고 그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덮어씌울 수 있게 되죠. 한 마디로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말에 천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로아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했기 때문이다.
“헬라는 이 장치를 개발해 각 게임 캡슐에 보급했고, 언제든 이것으로 상대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헬라가 내 기억을 그것으로 조작한 거다?”
“예. 맞습니다. 헬라는 천마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그에 대한 가짜 기억들을 전부 당신에게 주입한 거죠. 기존에 있던 기억들은 모두 없애 버리고 말입니다.”
천마는 주먹으로 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본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냐!”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은 허구의 인물입니다. 단지, 헬라가 너무 사실처럼 기억을 조작해 놓은 것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협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인물이 21세기에 온다?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천마는 이빨을 으득 거리며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런 말을 할 거라면 그만 이 문을 열거라. 본좌는 네놈과 나눌 얘기가 더 이상 없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는 거, 잘 압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될 겁니다.”
“하-! 좋다. 그렇다면 네 말이 맞다고 치자. 왜 헬라가 본좌의 기억을 조작한단 말이냐?”
그 말에 로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천마님의 기억을 완벽하게 조작한 헬라입니다. 어쩌면 천마님은 헬라의 프로토타입일 수도 있지요. 인간이 어디까지 반응을 하는지 보기 위해서 헬라는 천마라는 극단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아주 잘 먹혔어요.”
“그렇다는 건?”
“이제 모델만 바꿔서 다른 사람에게 헬라가 원하는 기억을 언제든 주입할 수 있다는 거죠. 캡슐에 접속하는 사람들 모두 기억이 조작된다면 헬라가 원하는 대로 그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됩니다.”
로아는 심각하게 말을 했지만, 천마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본좌는 네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시겠죠. 하지만 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헬라의 야망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왜 헬라가 악신이란 존재를 당신에게서 없앴겠습니까? 왜 드래곤이 당신에게 테오난으로 가 보라는 힌트를 줬겠습니까? 바실레이아에 있는 신들과 여러 존재들도 느끼고 있는 겁니다.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요.”
콰앙-!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천마가 문을 강제로 부숴 버렸다.
“쉽게 부셔지는 문이 아닌데, 가볍게 부수셨네요······.”
“그런 개소리를 늘어 놓을 거라면 다시는 본좌 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그럼, 이거라도 받아 주십시오.”
로아는 큐브를 천마에게 던진 다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간이 사라지고 천마는 다시 카르만 대도시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건······.”
천마의 손에 놓인 캡슐.
그것을 조심스럽게 쥐어 보았다.
큐브는 천마의 손에 반응하며 허공에 둥둥 뜨더니, 밝은 빛을 발했다.
“윽-!”
그 빛이 천마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면서 그에게 새로운 기억들이 나타났다.
‘네까짓 게 동생이냐? 나가 뒤져, 이 새끼야.’
‘형이랴 말로 장남이면서 집안 등골을 쳐 먹으면 어쩌자는 거야!’
‘네가 뭐 보태 준 거라도 있어?’
‘있지! 나랑 엄마만 뼈 빠지게 일하고 형은 집에서 놀기만 하니까!’
이 기억은 천마의 기억이 아닌, 바로 이 몸의 주인 천웅이란 자의 기억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천마는 혼란스러움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만약 이 기억이 정말로 천웅의 기억이라면 로아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천마가 알고 있던 모든 기억들은 헬라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아냐······. 그럴 리가 없다.”
큐브를 통해 천강의 일부 기억들이 천마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여러 기억들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서 이걸 완전히 신뢰할 순 없었다.
“일단 여길 나가야 돼.”
천마는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 * *
“캡슐방에서 게임을 끝내고 나온 20대 남성이 흉기 난동을 부려 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게임을 끝낸 직후, 자신이 여전히 게임 속에 있다고 착각한 남성은 시민들을 몬스터라고 생각하여 칼을 휘둘렀다고 진술 했으며······.”
천마는 게임을 나오고 나서부터 이틀 동안 캡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과 tv 뉴스에 캡슐을 나온 직후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
이틀 전만 하더라도 천마가 본사와 결탁한 천하의 나쁜놈이라고 몰아가던 언론이 지금은 다른 먹잇감에 정신이 팔린 것이었다.
“바실레이아 온라인을 플레이 하고 나서 이상 증세를 보인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캡슐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안심하고 플레이 하셔도 됩니다.”
바실레이아 본사에서는 캡슐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애초에 캡슐 기본 옵션이 게임 사용자가 정신착란증을 일으키지 않게 해 놓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상 증세를 보였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부터 갑자기 여러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 정말로 게임 안에 있는 줄 알았어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거짓말입니다. 단 한 번도 사례가 없는 일인데, 지금 피의자는 자신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검찰 측에서는 흉기를 휘두른 피의자가 형량을 낮추고자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몰아갔다. 일전에도 이런 식으로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심할 여지가 꽤 있었다.
“피의자는 전과 기록도 없고 아무런 문제 없이 대학교도 잘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SNS를 뒤져 봐도 사건 당일 피의자는 여자친구를 위해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이상 증세가 아니라고 모른 척 하실 겁니까?”
“바실레이아는 지금 무언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바실레이아 캡슐을 면밀히 조사하여 무엇이 이상 증세를 일으키는지 알아 봐야 합니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건 한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캡슐방에서 나온 한 플레이어는 갑자기 도로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뉴스를 통해 여러 사건들을 접한 천강도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갑자기 천마가 캡슐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형. 들어가도 돼?”
“그래.”
천강은 오늘도 홀로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천마를 찾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
천마가 입을 열지 않자 천강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원래 고민이라는 건 혼자 짊어지기에는 무거워. 같이 나누는 게 훨씬 더 좋지 않을까? 내가 형보다 멍청하기는 해도,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천마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우는 결코 본좌보다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멍청한 이 형이지.”
천마도 생각을 정리했는지, 천강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천마는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부터 시작해 로아를 만난 것까지 모두 빠짐 없이 말해 주었다.
몇 시간에 걸친 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천강은 완전히 그곳에 빠져 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 로아라는 놈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구나.”
“난 로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항상 그랬잖아. 무림이나, 천마 같은 건 전부 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라고. 헬라 그년이 진짜로 형의 기억을 망쳐 놓은 걸 수도 있어.”
“으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건, 형은 내가 추천하기 전까지 바실레이아를 플레이 한 적이 없단 말이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형의 기억을 조작한 걸까?”
그 말대로다.
천웅에서 천마라는 사람으로 바뀌었을 때까지 천웅은 단 한 번도 바실레이아 온라인을 플레이 한 적이 없었다.
“모르겠구나. 본좌도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천마가 깊게 한숨을 내쉬자 천강이 말을 덧붙였다.
“지금 뉴스에선 난리야. 바실레이아 온라인을 플레이 하고 나서부터 갑자기 정신 착란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해. 커뮤니티만 봐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아.”
커뮤니티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는 기사까지 나온 만큼 신뢰성이 높았다.
“여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캡슐에서 나와 1시간 동안 뭘 했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났다고 해. 또 어떤 사람은 갑자기 동생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지금 그 외에도 사례들이 정말 다양해.”
“이게 본좌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냐?”
“맞아. 지금 바실레이아 온라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상해. 형이 갑자기 엄청난 힘을 가져서 판테온과 레이피드의 죽이고 놈들의 캐릭터까지 전부 삭제해 버렸잖아. 이로 인해서 형이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고.”
천마는 천강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본좌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고 생각하는구나.”
“응. 그리고 단순히 의도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최근 사람들이 이상 증세를 보이는 건 로아가 말한 헬라의 야망이 실현되고 있는 게 아닐까? 형이 말한 그 기억을 조작하는 장치로 말이야. 그게 캡슐 안에 있다며.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천마는 기억을 더듬어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충 보면 알 것 같구나.”
“으음-. 그렇단 말이지.”
천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드릴과 망치, 그 외 장비들을 가져왔다.
“음? 뭘 하려는 것이냐?”
“그 장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며. 이 캡슐을 뜯어 봐야지.”
“······?”
“이렇게 보여도 내가 공대 출신이야, 형. 물론, 자퇴하긴 했지만.”
천강은 그 자리에 앉아 망치로 캡슐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왠지 그런 천강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무섭게 보이는 천마였다.
< 134화. 이상증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