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둥지 >
극한의 컨셉충 128화.
작품 제목: 둥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역시 불도저 같으셔. 어떻게 상의 한 번 없이 적진으로 뛰쳐나가셨을까? 그것도 달랑 저놈들만 데리고 말이야.”
판테온이 제국으로 돌아오는 걸 본 레이피드가 비꼬기 시작했다.
“용기 있게 가는 것까진 좋았는데,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베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오히려 개쪽을 당하고 오셨네?”
콰앙-!
레이피드가 선을 넘는 발언을 하자 판테온은 들고 있던 창을 던져 버렸다.
레이피드를 조준해 던진 건 아니지만, 그의 바로 옆에 창이 꽂혔다.
“거기까지 해라. 나는 네 친구이지만, 황제이기도 하다.”
“뭐래. 넌 가끔 그게 문제야. 게임이랑 현실을 구분하질 못 해. 내가 지금까지 네 중2병 다 거들어 주면서 여기까지 끌고 와줬더니, 말을 그렇게 하면 섭하지.”
“레이피드!”
판테온의 목소리에 담긴 힘에 레이피드는 굴하지 않았다. 판테온 다음으로 강한 플레이어가 누구이겠는가?
바로 레이피드다.
판테온이 랭킹 1위라면 레이피드는 랭킹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게임에 몰입하는 건 좋아. 그런데 너 혼자 게임 하는 거 아니야. 네브레 제국의 황제라는 놈이 그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죽기라도 하면? 너 죽으면 2주 동안은 게임 못 하는 거 알지?”
레이피드가 저런 식으로 판테온을 몰아 붙인 적이 한번도 없어서 길드원들은 덩달아 당황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친구 사이였고, 지금까지 길을 같이 걸어왔기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그런 걸로 죽을 것 같나?”
“그건 모르지.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갔어봐. 드래곤 플러스 카르만 대도시에 있는 병력들이 널 가만 놔뒀을까? 네가 아무리 랭킹 1위라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을 혼자 이길 순 없어. 거기다 너 천마를 단숨에 제압하지도 못했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온힘을 다해 일격을 가하면 천마를 금방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천마에게 이렇다 할 데미지조차 주지 못했다.
“네가 사람 우습게 본 거야. 내가 항상 그랬지? 천마 그놈은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차근차근 전략을 세워서 무너뜨려야 할 사람을 무작정 찾아가서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판테온은 뚱한 얼굴로 그냥 듣기만 하고 있었다.
“아무튼,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땐 구원군이고 뭐고 없을 줄 알아. 거기다 이제 상대도 우리가 공격적이라는 걸 알았으니, 수비 강화를 하게 될 거야. 우리가 손해를 심하게 본 싸움이었다고.”
“방어를 철저히 한다고 해서 우리 제국군을 막을 순 없어.”
“뭐, 그렇긴 하지. 그런데 5의 힘만 쓰면 충분히 되는 일을 네 덕분이 10을 쓰게 된 거라고. 문제점이 뭔지 이제 알겠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레이피드의 잔소리가 드디어 끝났다.
“후-. 그런데 천마 그놈은 왜 찾아갔던 거야?”
“정찰병이 알려 주더군. 그래서 만나러 갔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싸워보고 싶어서? 우리가 다음으로 정복해야 할 곳이 카르만 대도시이니까.”
동쪽 대륙 정복을 멈추고 행선지를 옮겨 이제 남쪽 대륙을 노린다는 말에 판테온이 혼자 피가 끓었던 것 같다.
하여튼 단순한 놈이라면서 레이피드는 혀를 찼다.
“그건 그렇고, 천마 그놈은 왜 그쪽에서 서성 거리고 있었던 거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천마가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갈 거라고는.
* * *
“호오. 이곳이 너의 둥지로군.”
“흐흐. 여기까지 들어온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대부분 입구에서 내 브레스를 맞아 사라져 버렸거든.”
플레이어로는 처음으로 드래곤 둥지에 들어가게 된 천마였다.
[사상 처음으로 드래곤의 둥지에 입장하셨습니다. 모든 아이템 드랍율이 10배로 증가하며 경험치 증가도 10배로 증가합니다.]
음. 처음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경험치와 드랍율이 동시에 올라갔다.
“여기에 드래곤 말고 다른 몬스터들이 있나?”
“아니. 감히 어떤 놈들이 내 둥지로 들어오겠는가.”
“그렇군.”
천마는 둥지 안을 살펴보며 감탄을 이어 갔다.
온갖 보물이란 보물은 다 쌓아 두고 있어서 사방이 반짝거렸다.
“이런 걸 왜 쌓아 두는 거지?”
“난 최강자니까. 원하는 건 뭐든지 갖는다. 한때 보물 수집에 맛이 들려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건 전부 다 약탈해 왔지. 흐흐흐.”
바실레이아 역사서를 보면 어둠의 드래곤은 원하는 게 있으면 협상을 하기 보다는 그냥 냅다 쳐들어가서 갖고 싶은 걸 가져오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한 300년 정도 그 짓을 하고 나니, 이젠 질려서 못 하겠어. 지금은 그냥 둥지에 눌러 앉아 가끔 비행만 하는 게 최고의 낙이다.”
“심심하겠군.”
“그래서 내가 너희 도시로 놀러간 거잖아. 앞으로 자주 갈 거니까, 기대하는 게 좋아.”
“후후. 얼마든지 오너라.”
드래곤은 둥지 안을 살펴보는 천마를 바라보다 슬쩍 물어보았다.
“원하는 보물이라도 있나? 내가 인심 써서 하나 정도는 내어 줄 수도 있어.”
드래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이 보물 속에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무기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천마는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됐다. 워낙 돈이 많아서 딱히 황금 같은 건 필요하지가 않아. 그리고 본좌는 무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장비도 필요하지 않다.”
“하여튼 넌 보면 볼수록 특이해.”
“본좌가?”
“그래. 말하는 것도 특이하고 이런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 건 더더욱. 왜 수많은 모험가들이 내 둥지로 찾아왔겠는가? 이 많은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지. 근데 넌 그걸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어.”
그 말에 천마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본좌도 보물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황금이란 황금은 전부 다 빼앗아 창고에 쌓아 놓은 때가 있었지.”
한창 천마신교를 크게 일으켰을 때, 천마도 드래곤처럼 황금과 보물을 빼앗아 신교 안에 쌓아 두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 부질 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더 이상 황금을 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호오. 이미 다 경험을 해 봤다는 거네. 역시, 너랑은 얘기가 잘 통해.”
천마는 볼 건 다 봤다는 듯 몸을 돌렸다.
“둥지가 크긴 하다만, 딱히 볼 건 없군.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칙칙하겠어. 도시로 자주 오너라. 널 위해 별도로 집도 지어 놓을 테니까.”
“후후. 인간의 몸으로 사는 것도 썩 나쁜 건 아니겠지. 네 말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마.”
카르만 대도시에서 여러 가지로 재미를 본 드래곤인 터라 그곳에 들어가 산다는 것에 별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테오난에는 언제 출발하지?”
“곧 출발할 거다.”
“조심하는 게 좋아. 거긴 만만한 곳이 아니야. 이 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인간들이 가기에는 거친 것들이 많아.”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가야 되지 않겠나. 거기에 단서가 있다는데. 거기다 새로운 곳으로 모험을 간다는 건 딱히 나쁜 일이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뭐라고 말로 딱 정의할 수는 없는데, 천마는 요즘 자꾸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가다가 죽지나 마라, 인간. 아까 보니까 판테온 그놈이 제대로 노리는 것 같던데.”
“음.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고민을 해 봐야겠군.”
테오난도 테오난이지만, 판테온의 군대가 언제 카르만 대도시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놓아야만 했다.
“혹시라도 그놈들이 오면 날 부르거라. 오랜만에 브레스로 제국군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쾌감을 느껴보고 싶군.”
그나마 다행인 건 드래곤 같은 강력한 우군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 * *
“네브레 제국은 요즘 어떻습니까?”
“별다른 징후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쪽 대륙 정복 전쟁을 끝낸 터라 언제든 카르만 대도시에 힘을 집중시킬 수가 있습니다.”
천강은 저번 날 판테온이 갑작스럽게 천마를 공격한 이후로 신경을 곤두세워 카르만 대도시 수비에 나섰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
판테온이 왜 갑자기 남쪽 대륙을 공격 대상으로 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지금 붙게 된다면 네브레 제국군의 압도적인 힘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드래곤의 변수인가.’
최근에 천마가 드래곤을 위해 집을 지어주면서 요즘 드래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에 찾아와 놀고 있었다. 그러다 몇몇 플레이어들과도 친해져 인간의 문화 생활을 즐기는 등, 아주 가관이었다.
드래곤에게 들어가는 돈이 꽤 들긴 했지만, 방위비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싸게 먹히는 수준이었다.
“음. 그런데 이런 시국에 우리 천마형은 테오난을 가야하고······.”
마음 같아서는 테오난으로 안 보내고 싶었지만, 만약 천마가 신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면 그땐 상황이 달라진다.
판테온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았고, 다른 제국과 왕국에서 동맹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힘을 빌린다면 네브레 길드는 절대 무서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천마는 테오난으로 가야 할 명분이 있다.
그리고 천강도 따라갈 것이다.
“와. 이게 이번에 들여온 드레이크입니까?”
“신기하다.”
드레이크 5마리를 도시에 들여온 천강.
중국 연합이 만들었다던 드레이크 군단을 천강이 부활시킬 생각이었다. 그중 하나는 천강이 갖게 되었는데, 아직 잘 길들여지지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래도 출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전투를 못할 뿐이지, 비행은 잘 해.”
천강은 어떻게든 천마를 따라 가려고 어필하는 중이었다.
“그래. 아우가 그렇다면야 믿겠다. 오늘 출발할 것이니, 준비하거라.”
천마는 천강과 한 약속이 있어서 그를 내버려 두고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한테 귓속말을 보내세요.”
“예. 귀환석은 꼭 가져가셔야 합니다.”
간부들에게 카르만 대도시를 맡기고 천마는 드래곤에게도 돌아올 때까지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간부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천강과 천마에게 귀환석을 하나씩 주었다.
어디에 있든 곧바로 지정된 위치에 돌아올 수 있는 귀환석. 이것도 꽤나 가격이 나가는 아이템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아 합니다.”
“예. 상황 보고는 계속 해 주세요.”
천강과 천마는 플레이어들 눈에 띄지 않게 다른 곳에서 출발을 했다.
그렇게 해야 네브레로부터 정보 누출을 막을 수 있게 때문이었다.
“가자.”
“알겠어.”
천마는 검 위에 올라가 어검비행술로 하늘을 날아올랐고, 천강도 드레이크에 올라탔다.
“자. 묘묘야. 가자!”
천마의 펫인 뮤뮤와 비슷하게 묘묘라는 이름을 붙인 레드 드레이크.
겉보기에는 난폭해 보이나, 의외로 천강의 말을 잘 들었다. 둘이 조금만 연습을 한다면 전투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녀오세요!”
“올 때 선물도 가져 오시고요!”
간부들의 배웅 속에 두 사람은 바실레이아 대륙 금역이라는 테오난으로 향했다.
< 128화. 둥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