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랭커
극한의 컨셉충 67화.
[영웅 한정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천마 앞에 나타난 새로운 시스템 창.
천강도 그것을 확인하고 짧게 혀를 찼다.
“나타날 거면 진작에 좀 나타날 것이지. 지금 와서 퀘스트가 뜬다고?”
사실 조금 이상하긴 했다.글로벌 퀘스트가 시작되면서 노골적으로 천마를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당연히 천마에게도 뭔가 피할 수 있는 구멍을 내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도 없이 방치해 두었다.
그러다 뒤늦게 이런 식으로 퀘스트를 던져 주다니.
“어떤 새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작정하고 형을 노리는 거 같은데?”
“쯧. 무림에서나 여기서나 본좌를 노리는 세력들은 차고 넘치는군. 그리고 지금 이걸 확인할 시간이 없다. 적들이 몰려 오고 있으니까.”
천마에게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되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플레이어들은 천마를 포위하며 다가왔다. 어차피 그들도 서로 같은 아군이 아니라서 경계의 빛이 날카로웠다.
“뚫고 가자. 잘 따라오너라, 아우.”
“알겠어. 나도 최대한 싸우면서 따라갈게.”
천강은 방패를 들고 천마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못 도망치게 막아!”
“저것들이 먼저 잡게 해서는 안 돼!”
서로 언제 튀어 나갈지 눈치만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천마가 앞으로 나오자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저번 날 패배를 잊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저번에 천마를 잡기 위해 파견을 나갔다가 다른 길드들과 맞붙어 전멸 당한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또한 천마에게 농락 당한 길드원들을 영상으로 보고 미리 학습을 해 온 플레이어들도 있기에 저번과는 확실히 대처법이 달라졌다.
‘일단 저놈들이 먼저 공격하게 냅두자.’
‘우리한테 선공을 양보하는 척을 하는 건가. 하지만 일격에 묵살시킨다면 정화의 정수는 우리 거다!’
각자 다른 생각으로 움직이는 플레이어들.
그런 그들의 미세한 행동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천마였다.
‘이놈들이 잔머리를 굴리는군.’
서로 힘을 합쳐 덤벼도 모자를 판에 감히 천마 자신 앞에서 잔머리를 굴린다라.
‘감히 본좌를 상대로 잔머리를 굴리다니. 너희들이 큰 실수를 하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콰콰콰콰-!!
천마는 서로 각을 보느라 간격을 넓히고 있던 플레이어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음?!”
“뭐, 뭐야 저건!”
콰콰콱-! 콰직-!
염화천공을 휘감은 천마의 붉은 검기가 플레이어들을 사정 없이 베고 지나갔다.
염화천공에 대한 건 생방송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아직 녹화된 영상으로는 널리 퍼지지가 않은 상태.
당연히 그것에 대한 정보가 없는 플레이어들은 그대로 공격을 허용하며 크리티컬 이펙트가 크게 터졌다.
“그래 봐야 혼자야!”
“잡아!!”
몇몇 플레이어들이 당했어도 여전히 저들의 숫자는 많다. 그리고 그들은 저번처럼 무작정 돌진만 하는 게 아니었다.
“모두 따라와!!”
먼저 진입을 하는 건 암살자들이 아닌, 척 봐도 몸이 단단해 보이는 탱커들이었다.
그들이 방패를 들고 나서자 그 뒤에 있던 궁수들이 활 시위를 당기고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들이 조준하고 있는 건 천마가 아니었다.
“응?!”
“이 개, 개새끼들이!”
퍼펑-! 퍼퍼펑-!!
“저런 잡것들한테 뺏기면 안 돼!! 눈에 보이는 새끼들은 그냥 다 죽여 버려!”
천마의 뒤를 노리고 달려오던 플레이어들은 다른 길드에서 쏜 화살과 마법에 맞아 쓰러졌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눈치를 보며 움직였지만, 천마가 먼저 싸움을 열면서 순식간에 개싸움이 된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어.”
“그냥 눈치 볼 것 없이 싸그리 죽여 버려!!”
갑작스레 싸움이 난전으로 치달았다. 물론, 웬만한 공격들은 전부 천마에게 집중되긴 했지만, 천마가 적들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오히려 그 공격들은 천마를 호위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뒤져라!! 커헉-!”
“크악! 스킬 좀 제대로 보고 쏴!!”
원거리 딜러들은 천마를 맞추려고 해도 저렇게 안쪽 깊숙이 들어가 버리면 조준하기가 어렵다.
어차피 같은 편이 아닌 플레이어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 맞으라고 무작정 스킬을 쏘아 내는 것도 있었다.
덕분에 천마는 그 안을 한껏 휘젓고 다니며 플레이어들을 그야 말로 학살하는 중이었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한창 혼전이 이어지고 있을 때쯤이었다.
자신의 얼굴과 다리를 전부 가릴 수 있는 큰 방패를 들고 있는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서더니, 그것으로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쿠콰콰쾅-!!
“으어어!”
“뭐, 뭐야 이건 또!”
방패를 내리찍자 땅이 갈라지면서 불기둥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것에 맞은 플레이어들은 그 자리에서 몸이 녹아 버려 사라졌고, 간신히 피했어도 적잖은 치명상을 입은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어······ 저거 설마?”
“저거 그거 맞지?”
“이런 미친 새끼들. 하다하다 이젠 랭커를 보내는 거야?”
방금 전 스킬로 이목이 한쪽에 쏠렸다.
플레이어들은 거대한 방패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상대가 누군지 금방 알아보았다.
그건 천강도 마찬가지.
“미친······. 랭커잖아.”
“음? 랭커?”
“형. 내가 저번에 말했지. 형을 잡으러 랭커들이 올 수도 있다고. 랭커의 기준은 간단해. 바실레이아에서 순위가 1위부터 1000위까지의 사람을 랭커라고 하는데, 저 사람이 그 중 하나야.”
바실레이아에는 수억 명의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
그중 단 1,000명.
진짜베기 고인물들이라 불리는 이 1,000명이 랭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내가 저 사람 순위는 잘 모르겠는데, 1000위부터는 저렇게 황금 인장 표식이 떠. 저게 랭커라는 뜻이야.”
“무슨 기준으로?”
“주로 레벨이랑 공격력, 혹은 주문력으로 따지겠지? 그 플레이어의 전투력 센스와 잠재력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바실레이아 시스템이 랭커로 인정해 준다고 들었어.”
공격력만 올린다고 랭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알려진 건 없지만, 바실레이아 시스템이 매시간 쉬지 않고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평가를 내리는데, 그중 우수한 플레이어 1,000명을 뽑아 랭커로 공식 인증을 해 주는 것이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1,000위에 든다는 건 굉장한 전투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 된다.
“브리엘이었나?”
“아마 그럴 거야.”
“저 변태 같은 방패를 들고 다니는 새끼가 브리엘 말고 또 누가 있겠냐?”
플레이어들의 얘기를 엿듣고 나서야 천강도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거석군 브리엘.
그 말대로 큰 돌처럼 단단하다는 의미였다.
일반 직업인 전사에서 탱커라는 역할을 택한 브리엘은 거대한 방패라는 전설급 아이템을 들고 다닌다. 그리고 방금 전처럼 광역 스킬을 날려 상대의 진형을 부숴 놓을 수도 있다.
“지금부터 여기는 우리 레비톤 길드가 맡는다. 그러니까 우리랑 싸울 생각 아니라면 꺼져.”
랭커가 등장한 이상, 다른 플레이어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일에 랭커까지 보내다니.”
“정화의 정수가 그렇게 갖고 싶었나?”
“또라이 새끼들.”
랭커들은 각 길드에 속해 있으나,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길드에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력 손실이 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랭커들 자체가 자존심이 강해서 길드장의 명령도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
그런데 여기서 랭커가 등장해 버리면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뭐야. 아직도 안 가고 있어? 진짜 개싸움 한 번 해 보자는 거야, 뭐야?”
레비톤 길드는 대형 길드에 속해 있는 곳이기도 해서 플레이어들은 입술을 꾹 깨문 채 하나 둘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레비톤 길드의 명성도 있고, 레비톤 길드에서 파견한 플레이어들과 랭커까지 합세한다면 저들에게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각자 길드에 연락을 돌리고 뒤에 숨어 지켜보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를 지었다.
“정화의 정수. 줄 생각 없지?”
브리엘은 천마의 두 배가 되는 몸집으로 걸어와 물었다.
“없다.”
“우리 레비톤 길드에 들어오는 건? 우리 길드가 이런 쪽에서는 대우가 아주 좋아요.”
“그것도 생각이 없다.”
“그렇게 욕심부리다가는 큰일 날 텐데. 우리 독일에는 이런 속담이 있지. 욕심 피우다 집까지 태워 먹는다고.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놈들이 네 아이템을 뺏어 먹으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차라리 우리한테 와서 보호라도 받지 그래?”
브리엘의 거듭된 설득에 천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왜 다들 이깟 아이템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군. 원한다면 너희들이 진작 퀘스트를 발견했으면 될 일을. 거기다가 감히 본좌에게 아이템을 내놓으라고 큰 소리를 치다니. 죽고 싶지 않다면 너희들도 그만 본좌의 눈앞에서 썩 꺼지거라.”
천마의 강경한 어조에 브리엘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컨셉을 아주 제대로 잡았다고 하던데, 진짜였네. 내가 다른 BJ들 방송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안 보거든. 그런데 이 정도 컨셉이면 호구들이 미쳐서 보긴 하겠어.”
브리엘은 방패로 땅을 찍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이다. 정화의 정수를 놓고 꺼지던가, 아니면 여기서 뒤지던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
“본좌가 네놈을 죽이고 그냥 떠나는 건 선택지에 없는 모양이지?”
“당연하지. 내가 괜히 랭커겠어? 그리고 난 분명히 기회를 줬다. 그걸 차 버린 건 너야.”
콰아앙-!!
브리엘의 방패에서 푸른색 주먹이 뻗어나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은 천마는 그 힘에 저 뒤까지 밀려나 벽에 부딪혔다.
거미줄처럼 일그러진 벽에서 나온 천마는 온몸에서 전해 오는 저릿함을 느꼈다.
“랭커는 확실히 위력이 다른 건가.”
랭커의 힘을 오늘에서야 경험하게 된 천마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렇다는 건 저놈 같은 강자들이 1,000명 정도 된다는 것이군.”
순위가 올라가면 갈수록 그 힘은 더욱 끔찍하게 강해질 것이다.
“아까부터 뭐라고 씨부리고 있는 거야?”
브리엘은 저 큰 몸으로 번쩍 날아올라 천마를 향해 낙하했다.
“저 몸으로 저렇게 높이 뛰어 오르다니.”
콰아아앙-!!브리엘이 방패와 함께 떨어지면서 지면을 때리자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천마는 간신히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만약 저 공격을 정면으로 막으려 한다면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일단 거리를 조금 유지하면서 검기를 쏘아 기회를 노리는 것이 최선의······.’
쉬이이익-!
그런데 브리엘은 천마가 거리를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천마의 앞으로 다다라 방패를 휘둘렀다.
콰직-!!
검과 방패가 부딪히면서 강한 파공음이 일었다.
“뭐야. 이제 보니까 아주 좋은 검을 들고 있었네?”
평소 같았으면 검을 나뭇가지처럼 부러뜨리는 브리엘의 방패였겠으나, 지금 그것에 맞서고 있는 건 수호자의 검이었다.
검의 자태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자 브리엘은 이것이 자신의 방패와 비슷한 힘을 가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화의 정수도 가져가고 덤으로 그것도 가져가야겠다.”
콰아아앙-!!
이윽고 방패가 폭발하면서 대치하고 있던 천마를 저 뒤편까지 날려 버렸다.
다시 한번 벽에 부딪히는 것에 모자라 벽을 뚫고 안까지 들어가 버린 천마.
‘젠장. 역시, 형이라도 랭커한테는 안 되는 건가.’
괜히 랭커가 아니다.
10억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당당히 1,000 순위에 들어가 있는 괴물들이니까.
“형! 괜찮아?!”
걱정스러운 천강의 목소리에 그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걸어 나왔다.
“형?”
그런데 평소와는 사뭇 다른 천마의 얼굴에 천강은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날카로워진 눈동자와 몸을 찌를 듯한 살기.
저건 마치 저번 날 카시스에게서 마법을 맞아 돌변한 천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아······. 짜증나는 놈이군.”
[주인이시어. 지금 악의 승천 게이지가 상승······.]
“시끄러.”
[······.]
천마는 여유만만하게 손을 까닥 거리고 있는 브리엘을 노려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넌 본좌의 손에 죽어야겠다.”
천마가 제대로 살기를 품으며 눈을 번뜩이자 그의 앞에 새로운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아아. 느껴진다. 너의 분노, 너의 증오가!!]
눈치 없이 신이 난 악신의 메시지.
“너도 입 닥쳐.”
천마는 악신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브리엘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바닥에 검은 기운이 점점 더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