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복잡한 심경>
글로벌 퀘스트, 히든 퀘스트, 레전드리 퀘스트 등등. 판테온은 퀘스트에 대한 흥미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한 번씩 겪어본 퀘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퀘스트를 수행하는 이유는 오로지 스스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함이지,결코 퀘스트를 성취했을 때의 짜릿함을 느끼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실레이아 대륙을 정복하고,이 대륙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가 된다.
이것이 판테온의 야망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바실레이아 대륙을 시작한 처음으로 가벼운 일탈에 나선 판테온이었다.
“ 천마다!”
“천마님이다!”
“진짜야! 그것도 마법 군단이랑 같이 있어!”
마법 군단이 천마를 호위하며 신전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판테온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하지만 신전 안으로 같이 들어갈 순 없었다.
외부인 출입을 엄히 금한다며 기사들이 신전 보호에 나섰기 때문이다.
“괜한 발걸음을 한 건가.”
판테온은 왜 자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이피드가 이 사실을 알면 팔짝 뛰면서 몇 달 동안 판테온을 놀려 먹을 게 뻔했다.
그래서 이제 그만 접어 두고 돌아가려는데.
쿠우웅-!!
수상한 굉음이 신전 안쪽에서부터 들려 왔다.
“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야. 방금 하늘에서 뭐가 떨어진 거 같았는데?”
“그래? 난 못 봤어.”
플레이어들은 어리둥절했고 신전을 지키던 기사들도 적잖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외부인을 절대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로 모든 출입을 막았다.
판테온도 안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슬쩍 안을 들여다보기로 결심했다.
[태초의 눈을 발동합니다.]
태초의 전사가 가지 고 있는 스킬.
태초의 눈.
어떤 장애물이 앞에 있어도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투시해서 볼 수 있는 스킬이었다.
이 스킬로 판테온은 신전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쪽 상황을 면밀히 살펴볼 수가 있었다.
“저건……"
라비락트.
판테온도 처음 보는 몬스터 였다.
투시의 눈은 그 너머를 볼 수 있고,들려오는 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라비락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어둠의 마법사가 부리는 소환수였다니.”
글로벌 퀘스트가 시작되었으니, 뭔가가 나오긴 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저건 기대 이상이다.
아무리 글로벌 퀘스트라고 해도 시작부터 저런게 나오다니. 판테온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레벨이 높고 실력도 좋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파티를 맺어 공략하는 게 아니라면 저것을 잡는 건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콰아아아-!
“ 와!”
“저거 뭐야?”
천마가 끝까지 버텨내고 마지막에는 회심의 일격까지 날리면서 라비락트는 마법사들의 손에 소멸당하고 말았다.
그때 빛과 함께 하늘로 높게 솟아오른 검은 기운이 플레이어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이번에도 결국 해냈군.”
저 정도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천마라면 뭔가 이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갖고 끝까지 지켜본 보람이 있었다.
“글로벌 퀘스트 시작이다!”
“ 오오-!”
글로벌 퀘스트가 시작된다는 시스템 창이 모든 플레이어들에 게 나타났다. 그러나 당장 뭔가가 시작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마도 다시 신전을 나와 마법 군단과 함께 아성으로 들어가버렸다.
“역시, 괜한 짓을 한 건가.”
하루가 지나도 퀘스트는 시작되지 않았고, 천마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로그아웃을 한 모양인데, 하루종일 도시 안을 거닐며 기다리고 있던 판테온은 김이 새버렸다.
“이제 돌아가는 게 낫겠지.”
지금쯤이면 레이피드도 판테온이 혼자 자리를 하루 이상 비우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길드가 완성된 이후로 판테온이 혼자 움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글로벌 퀘스트가 어떻게 진행되고, 또 천마가 그 안에 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기대했는데 이렇게 물러가려니 조금 아쉬웠다.
“ 음?”
마타하니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성문 밖을 나서려는데, 판테온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의 본능은 틀리지 않았다.
저 멀리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둠의 기운이 점점 마타하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문을 닫아라!!”
“적의 침입이다!!”
이윽고 병사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모든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갔다.
“뒤로 물러나시오!”
기사들은 성문 밖을 나가려던 판테온을 제지하며 뒤로 물러나게 했다.
판테온이 초보자 복장을 입고 있어서 아무도 그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천마님이 나오셨다!”
“천마님이다!”
천마가 성주와 여러 마법사들을 대동한 채 성벽 위로 올 라가는 것을 보고 판테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할까.”
태초의 눈으로 바깥 상황을 환하게 살펴볼 수 있던 판테온은 어둠의 마법에 잠식당한 군단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힘을 합쳐 막지 않는다면 마타하니 는 그대로 점령당하게 될 터.
물론,판테온이 여기 있다는 걸 길드원들이 알게 되면 득달 같이 달려와 순식간에 저 군단을 쓸어버릴 것이다.
‘넌 어떻게 할 거냐,천마.’
하지만 판테온은 길드원들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천마가 어떻게 이 난관을 해결할지 지켜보고 싶을 뿐.
“본좌는 천마다.”
그리고 갑자기 천마가 군중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에게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나선 것이리라.
그러나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본좌의 뒤를 따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겠다!”
정말 뻔뻔하고도 당당한 천마의 연설에 판테온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것이구나!’
판테온은 전쟁에 나서기 전에 하는 연설에서 딱히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기사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건 스킬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건 다르다.
저것이야말로 판테온이 그리던 군주의 표상 같은 연설이지 않은가!
스스로의 강함을 믿고 그 강함을 표출해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한다.
“오늘 많은 걸 배우는군.”
뭔가 이상한 깨달음을 얻은 판테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파티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이름이 파티 참여자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고 판테온이 왔다는 걸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에 남아 천마가 어떻게 저 군단을 수비하는지 지켜보려 했다.
“성문을 열어라!!”
“ 응?”
분명 퀘스트는 성벽을 수비하라고 했는데,뜬금없이 천마가 모든 성문을 열게 했다.
“최선의 수비는 곧 공격이다!!”
천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마타하니 도시에 울려 퍼졌다. 최선의 수비는 곧 공격이라며 먼저 적들을 향해 뛰어가는 천마!
판테온은 거기서 또 한 번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그렇군.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로군.’
또 다시 이상한 가르침을 받아들인 판테온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군중을 따라 성문 밖을 나섰다.
“쿠오오오-!!”
“캬오오!!”
태초의 눈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 고 있는 죽음의 군단!
천마는 이미 저 앞에서 혼자 달려가고 있었으며 , 그 뒤를 에르바가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고 있었다.
"가즈아!!”
“경험치 파티다!!”
플레이어들은 경험치 파티라며 좋아하고 있었고.
“영웅의 뒤를 따르라!!”
“우리의 사명은 대륙의 영웅을 지키는 것이다!”
기사들은 천마를 지키기 위해 말을 박차는 중이었다. 판테온은 천마 중심으로 모여드는 군중의 힘을 바라보며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봐볼까.’
판테온도 천마의 뒤를 바짝 쫓아 그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려고 했다.
“뭐야. 초보자 새끼들은 꺼져. 도움도 안 되는 벌레들이.”
그런데 막상 전투가 벌어지고 나니,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마찰이 일어났다.
“어디서 경험치만 쏙 주워 먹으려고 그래?”
“필요 없는 것들은 그냥 죽어라.”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들을 고렙 유저들이 차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초보자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전부 죽고 나면 사냥을 시작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너도 꺼져. 뒤지기 싫으면.”
“야. 그냥 여기서 죽이자. 마침 저기 언데드들이 오네.”
원래 바실레이아 대륙은 약육강식 세계라 그러려니 하고 판테온도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 무리가 판테온의 신경을 건드리고 말았다.
초보자들을 위협하며 언데드들을 일부로 자신들 쪽으로 몰아 한꺼번에 몰살시 키려 하는 쓰레기들.
판테온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비켜라. 난 바쁜 몸이다.”
“응. 알아서 잘 뚫고 가렴.”
그럴 줄 알았다며 판테온은 더는 말하지 않고 칼부터 꺼내들었다. 고레벨 플레이어들은 어디 어떤 발악을 하는지 보자며 자기들끼리 킥킥대고 있었다.
그런데 판테온이 가볍게 칼을 한번 휘두르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순식간에 반 토막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히익-!’
“뭐,뭐야!?’’
그런 악질 장난을 지켜보며 똑같이 비웃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상대가 레벨이 몇이 되든 판테온에는 상관이 없었다. 대륙 랭킹 1위의 힘은 그저 레벨로만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잠깐. 나 저 스킬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 서,설마 저 사람……?”
슬슬 다른 플레이어들이 판테온을 알아보려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을 무시하고 천마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방해꾼들 때문에 거리가 벌어졌지만,따라잡는 건 문제 없었다. 문제는 상황이 많이 비틀어졌다는 것이다.
“키야야악-!!”
승기를 빼앗겼다는 걸 알고 어둠의 군단은 하늘에서부터 플레이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숫자도 많아서 유리했던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됐다.
‘졌군.’
판테온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둠의 군단 숫자가 마타하니의 병력보다 훨씬 더 많았다. 아무리 플레이어들이 나섰다고 해도 하늘에서 저렇게 많은 가고일들이 공격한다면 방법이 없다.
애초에 포메이션을 잘 짜고 나서 시작한 전투도 아니지 않던가.
오합지졸인 플레이어들도 여럿 섞여 있어 더욱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런데 아직 천마는 포기를 한 것 같지 않았다.
어느덧 그는 이 군단을 조종하고 있는 마법사까지 찾아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진짜 고난의 시작이었다.
“저건 좀 이상한데?”
멀리서도 상황을 살필 수 있었던 판테온은 천마가 걸린 속박 저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레이어가 절대 피하지도 못 하고,막지도 못 하는 저주라니 .
저런 건 판테온도 처음 보는 경우였다.
‘저렇게 끝난다고?’
어찌어찌해서 끝판왕까지 왔는데,결국 마무리가 저렇게 되는 것이었다니. 이건 처음부터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없게 만든 거나 다름이 없다.
태초의 눈을 통해 상대가 걸린 상태 이상을 볼 수 있었던 판테온은 저대로 천마가 죽을 거라 생각한 것도 잠시.
콰콰쾅-!!
갑작스레 상황이 돌변하면서 천마가 오히려 혼돈의 마법사 카시스를 제압했다. 그리고 저 압도적인 힘이란……!
[상대의 정보를 볼 수가 없습니다.]
태초의 눈은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정보 열람이 가능한 스킬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만 보이던 천마의 정보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거기다가 저 힘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 군단을 머금고 있는 사악한 힘보다 더 사악함이 느껴지는 힘이다.
바실레이아 대륙을 플레이하면서 저 정도로 위협적인 힘을 판테온은 본 적이 없다.
콰아아아-!!
천마의 머리 위에 있던 애완동물은 갑자기 거대한 괴물이 되어 카시스를 한입에 없애 버렸고,천마는 블랙홀 같은 구체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대체 네 정체가 무엇이냐!’
판테온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 구체가 크게 폭발하더니, 모든 사악한 힘이 단번에 사라지고 말았다.
“아….
잠시 넋을 잃고 있었던 판테온은 눈이 부신 햇빛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느새 땅에 떨어진 투구를 주워 머리에 썼다.
그는 무언가를 떠나보내 듯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판테온은 분명히 보았다.
어둠의 구체가 폭발하면서 천마의 몸을 휘감고 있던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것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판테온도 알지는 못했지만, 그는 천마라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졌다는 걸 깨달았다.
“어렵군.”
그렇기에 더욱 생각이 복잡해지는 판테온이었다.
천마가 저기서 더 자라나기 전에 그 뿌리부터 없애버려야 하는 것일까?
< 55화. 복잡한 심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