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기사의 맹세〉
극한의 컨셉충 52화.
“성문을 열어라!!”
아직 마법의 기운이 남아 있어 천마의 목소리는 온 성에 울려 퍼졌다. 그래서 성문 앞에 있던 병사들은 얼떨결에 성문을 열고 말았다.
“혀,형? 그게 무슨 소리야? 수비를 해야 하는데,성문을 열다니?”
“아우야.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다. 본 좌가 방금 말하지 않았더냐? 직접 선봉에 나서 겠다고.”
“아니. 잠깐만! 퀘스트는 분명히 성벽을 ..!”
천마는 천강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훌쩍 뛰어 내려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혀어엉!!”
천강은 절규 어린 탄식을 쏟아내며 하는 수 없이 천마의 뒤를 따라 그도 성벽 아래로 낙하했다.
성주와 에르바는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천강을 멍 하니 바라보다 서로를 마주보았다.
“원래 이럴 계획이었습니까,에르바님?"
“그럴 리가요.”
“..이제 어쩌죠?”
“ 하아-.”
에르바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도 천마를 따라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에,에르바님!!”
“에르바님!!”
그를 호위하던 마법사들도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우,우리는 지옥 끝까지라도 에르바님을 따라야 한다!!”
“오오오-!!”
“가자!!”
그들도 결국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치 삼천궁녀의 그것처럼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 숫자가 늘어나는 중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성문이 열렸지?”
“뭔가 이상한데? 왜 성문을 열라고 한거야?”
플레이어들도 굳건하던 성문이 전부 열리자 당황해했다. 그런 그들에게 다시 한번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 밖으로 나오거라!! 우리의 돌파구는 바로 저 앞에 있다!!”
천마의 목소리를 듣게 된 플레이어들은 혼란에 빠졌다.
“성벽을 방어하는 거 아니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이대로 나가는 거라고?”
하지만 그들의 혼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대륙의 영웅께서 우릴 부르신다!!”
“모두 그분을 따라 진격하라!!”
“오오오오-!!”
마타하니 도시에 있는 기사단이 천마의 명령에 따라 성문 밖을 나가 돌진하고 있었다.
“우,우리도 나갈까?”
“무조건 천마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잖아.”
플레이어들도 하나 둘 그 뒤를 따랐다.
어영부영 눈치만 보던 플레이어들과 망설이고만 있던 플레이어들도 용기를 얻고 성문 밖을 나섰으며,이제 레벨 5밖에 되지 않은 초보자들도 나무로 만든 목검을 들고 진격했다.
“가즈아!!”
“이건 못 먹어도 고지!!”
“내 레벨에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냐!”
어차피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리 부담되는 일도 아니었다. 죽는다고 해도 초보 자들은 경험치를 잃거나 레벨이 떨어지지도 않으니까.
24시간 동안 게임을 하지 못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해도 괜찮았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에.
“혀어어엉!!”
하지만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전장에 나설 순 없었다. 천강이 바로 그러했다.
워낙 천마의 속도가 빨라 거리를 좁히지 못 하고 있던 천강은 제 형을 애타게 불렀다.
“얼른 따라오너라!! 이 얼마나 피가 끓고 기쁜 일이란 말이냐! 이런 싸움터는 굉장히 오랜만이구나!”
우다다 뛰어 가는 천마의 뒷모습만 봐도 지금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알겠으니까 같이 좀 가!! 형 혼자 들어 가지 말고!! 뒤에 기사단도 오잖아!!”
“본좌는 언제나 가장 먼저 돌진하고 제일 먼저 적장의 목을 벤다!! 그것이 본좌의 명예이니라!”
“위험하다구우우!!”
천강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천마는 어느 새 적들과 가까워졌다.
“구우우?”
“ 캬오?”
고기 방패로 선봉에 서서 돌진하고 있던 구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뒤에는 언데드 들이 줄지어 흐느적거리며 오고 있었는데,천마가 높이 날아올라 그들 가운데로 떨어졌다.
콰콰콱-!!
“구우우-!!”
“캬오오-!!”
언데드,구울,오크,등등.
그 외에도 야생의 맹수처럼 생긴 몬스터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얼굴에 묻은 검은 피를 닦아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오너라. 와서 본좌를 성장시키거라! 얼른‘!”
“캬오오오!!”
몬스터들은 먹잇감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천마는 마음껏 검무를 펼치며 헤젓고 다녔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본좌는 이런 것을 원했다! 서로가 엉켜 가며 싸우는 이러한 난투를!”
베고 또 베어가며 쉴 새 없이 천마의 칼이 움직였다.
“으아아아!! 젠장!!”
천강도 탱커답게 몸통박치기를 하며 천마가 있는 곳까지 전진했다.
“부,붙지 마! 이 새끼들아!”
구울들이 그런 천강을 붙잡았고, 언데드들도 끈적하게 천강에게 달라붙었다.
천강은 어거지로 그것들을 떼어내며 간신히 천마가 있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형. 이제 좀 천천히……"
“본좌는 먼저 간다! 천천히 따라 오너라,아우!”
“ 엑?"
겨우 따라잡았더니,천마는 벌써 다른 곳으 로 횡 날아가 버렸다.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가 있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 맞았다.
천강은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마나를 대부분 소진하고 말았다. 그런데 천마는 마나를 거의 소진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나통이 커서?
아니. 천마의 마나는 일반 플레이어와 조금 다르다.
마나를 소비하면 포션이나,혹은 스킬로 마나를 채워야 하는 게 일반적인 시스템이다. 그런데 천마는 마나를 소비하면 그것들이 알아서 충전이 된다.
조금만 지나면 마나가 다시 꽉 차서 끊이지 않고 스킬을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한 동력 그 자체라고 해야 하나.”
천마의 운기조식이 그만큼 굉장한 스킬이긴 했다.
끊이지 않고 마력을 쓸 수 있게 해 주다니.
그거야 말로 대마법사 수준 아닌가.
“크오오-!!”
“캬오오!!”
“하-. 괜히 따라와서 두드려 맞게 생겼네.”
순식간에 어둠의 군단에게 둘러싸인 천강.
그는 하는 수 없이 죽기 전까지 여기서 싸워 야만 했다.
“그래. 다 덤벼 시발!!”
“캬오오오!!”
그리고 그가 용맹하게 언데드들을 향해 돌진 하려는 순간.
화아악-! 좌아아악-!!
“ 웅?”
그를 포위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순식 간에 얼어 버리고 말았다. 천강은 눈을 몇 번 껌뻑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뭐하세요,거기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냉기가 풀풀 느껴지는 에르바.
그녀의 마법이 여기 있는 몬스터들을 죄다 얼려 버린 것이었다.
에르바가 가까이 다가오자 천강은 갑옷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차가움을 느꼈다.
“아. 방금 저기로 가셨.."
천강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에르바는 천마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얼음을 타고 몬스터들을 뛰어넘는 그녀를 보며 천강은 혀를 내둘렀다.
“ 헉헉”
“에,에르바님!!”
그 뒤로는 에르바의 뒤를 헐레벌떡 따라오던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도 핵핵 거리며 천강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천강은 이들과 묘한 동질감과 전우애를 느꼈다.
너도 나랑 같은 상황이냐는 안쓰러운 눈빛.
“이동 버프라도 걸어 드릴까요?”
“아,예.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그쪽도……"
마법사들과 천강은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한 뒤 크게 심호흡을 했다.
“혀어엉!!”
“에르바님!!”
그리고 그들은 다시 천마와 에르바를 찾으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들의 서글픈 외침을 알고 있는 건지,아니면 무시를 하는 건지 에르바는 괴물들을 사정없이 베고 있는 천마를 조우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어둠의 마법에 잠식당한 골렘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쿠웅-!! 콰직-!
골렘들은 단단한 바위 주먹을 날리며 천마를 공격해 보았지만, 움직임이 느려 천마의 몸에 스치지도 못했다.
문제는 천마가 골렘 하나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여러 몬스터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나 많이 어둠의 마법에 잠식당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에 게 죄다 흑마법을 써 버린 것인지, 에르바는 이번 일의 배후가 궁금해졌다. 이 정도로 세력이 커질 때까지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 하다니.
제국의 정보력이 이렇게 덜 떨어진 수준이었 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오오!!”
쿠웅-!!
천마가 골렘의 머리를 깨뜨리면서 그 큰 몸뚱이가 바닥에 쿵 쓰러졌다.
에르바는 기회를 보고 있다 천마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광역 냉기 마법을 시전했다.
화아아악-!!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죄다 얼어 버리면서 천마는 잠시 검을 거두었다.
“본좌는 싸움에 끼어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천마님을 지키는 것이 저희 마법 군단의 역할이라서요.”
천마는 기분이 언짢기 보다는 이런 광경을 참 오랜만에 보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오랜만에 보는군.”
“ 예?”
“이렇게 사방을 얼려 버리는무공 말이다. 북해빙궁에 있던 그 늙은이가 이런 식으로 싹 다 얼려 버리는 걸 좋아하긴 했었지.”
에르바가 무협지를 읽은 게 아니라면 당연히 알아듣지 못할 얘기였다.
북해빙궁은 새외무림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냉기를 기반으로 한 무공을 쓴다.
지금 에르바 가 주변을 순식간에 얼려 버린 것처럼 북해빙궁 무공에서도 이와 비슷한 초식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본좌를 도울 필요 없다.”
“그럴 순 없어요. 천마님께서는 지금 혼자 싸우시 는 게 아니 에요. 뒤 따라 오는 수많은 병사들은 오직 천마님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병사? 지휘는 성주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었나?”
천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고 있는데, 때마침 기마병들이 몬스터들을 뚫고 천마 앞까지 다다랐다.
“대륙의 영웅이시여!”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 위에서 내려와 정중히 예의를 차렸다.
“저는마타하니 제 1 기사단장 미르엘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업적에 부디 동참하게 해 주십시오.”
그 뒤를 따라 기사들이 인사를 올리고 있었 는데,그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음. 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잘못 보신 겁니다.”
“아닌데. 분명 어디서 봤을 텐데.”
저번에 천마를 토벌단에 넣었다가마찰이 생겨 충돌까지 이어진 기사단장 아르헨도 그곳에 있었다.
“뭐하고 있는가. 얼른 신께서 선택하신 대륙의 영웅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그는 애써 천마의 시선을 피해 보았지만,다른 기사단장들의 압박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장 아르헨이라고 합니다. 자, 잘부탁 드리겠습니다.”
아르헨은 이 상황이 매우 치욕스러운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본좌는 이미 옛 일을 다 잊었다. 그러니 그대도 잊거라. 과거에 우리가 비록 충돌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처,천마님.”
아르헨 기사단장과 천마의 극적인 화해에 뒤 늦게 도착한 천강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아르헨이란 놈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천마가 저렇게 인자한 모습을 보이는 걸 영상으로 올린다면 꽤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 고로 너는 지금부터 기사단을 이끌지 말고 본좌만 따라오너라.”
“...예?”
분명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본좌의 말이 들리지 않은가? 기사단은 다른 자에게 맡기고 넌 본좌의 뒤를 따라오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 기사단을 지휘해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마침 본좌가 수행원이 필요 해서 말이야. 절대 고기 방패로 쓰려고 그런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냥 본좌의 뒤를 졸졸 따라오다 가끔씩 공격을 대신 맞아주면 된다.”
누가 봐도 고기방패로 쓰겠다는 의도가 풀풀 드러났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기사단장들도 천마의 의견에 적극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천마 님을 지켜드릴 호위병이 마침 필요했는데,기사단장 정도의 위 치라면 충분히 천마님을 지켜 드릴 수 있겠지요.”
“후후. 아르헨이라면 매우 적격일 겁니다. 기사도의 본분을 잊지 않고 매순간 기사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니까요.”
기사단장들도 아르헨에게 어지간히 쌓인게 많은 모양이 었다.
거기다 그들은 아예 한 술 더 뜨기까지 했다.
“이걸 가져가도록 하십시오. 기사의 맹세라는 팬던트입니다. 아르헨이 이것을 쓰면 천마님이 받는 모든 데미지의 7할 이상을 대신 받게 됩니다.”
[기사의 맹세를 얻으셨습니다.]
[시전자가 대상으로 지정한 상대를 대신해 70% 데미지를 입습니다.]
기사의 펜던트.
누군가를 호위할 때 쓰는 아이템으로,결코 흔하지가 않은 레어템이었다.
“음. 쓸 만한 물건이로군. 고맙게 받도록 하겠다.”
“영웅께서 쓰시는 것이라면 영광입니다. 아르헨 기사단장. 부디 영웅을 잘 지켜드리도록. 저희는 영웅이 만드신 길을 따라 진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장들이 눈빛과 목소리로 협박을 하자 아르헨은 손을 벌벌 떨며 기사의 맹세를 시전했다.
“저 아르헨은 기사의 명예와 영광을 모두 천마님에게 돌리도록 하겠습니 다.”
[기사단장 아르헨이 당신과 영광스러운 맹세를 맺었습니다. 이제 모든 데미지의 70%를 아르헨이 대신 입게 됩니다.]
“자. 이제 가자! 본좌의 뒤를 바짝 쫓아오거라!”
완전히 사색이 되어 버린 아르헨은 빠르게 몬스터들을 향해 나아가는 천마의 뒤를 억지로 따라가야만 했다.
“ ……아르헨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비정상인가?”
제일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르헨이 오늘은 왠지 짠하게 느껴지는 천강이었다.
< 52화. 기사의 맹세〉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