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156화] 죄는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냐 (2)
[한상훈, 나이 27세, 성별 남자. 지적장애 1급.]
정현석 변호사가 스크린에 띄운 화면은 예상대로 한상훈의 신상 명세였다.
“지금 보신 화면은 증인의 프로필입니다. Mental Retardation! 보시는 바와 같이 증인은 지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장애인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증인은 정신지체 1급으로써 7살에서 최대 8살 정도의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행동과 판단을 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거나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활동은 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평생 보호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죠. 당연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는 불가능합니다. 본 변호인의 설명은 XX 대학병원, 정신과 전문의 조영식 박사의 자문을 받은 것임을 밝혀둡니다.”
“뭐야? 역시 정신 장애인이었어!”
“그러게, 변수가 나타났군.”
“그러면, 증인에게 몇 가지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죠. 증인! 신호등은 아시죠?”
정현석 변호사가 천천히 한상훈에게 다가갔다.
“네네. 알아요. 찻길에 있는 거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면 길을 건널 때, 빨간불일 때 건너는 겁니까? 아니면 파란불일 때 건너는 겁니까?”
“파란불요! 당연히 파란불일 때 길을 건너야 해요.”
한상훈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네. 맞습니다. 파란불일 때 길을 건너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이면 건너면 안 되는 거죠?”
“네네. 안 되는 겁니다. 절대 빨간불일 땐 건너면 안 돼요. 사고 나면 아야 해요!”
“그런데, 어제는 왜 빨간불일 때 길을 건넌 겁니까?”
“네? 저, 저 빨간불일 때 안 건넜어요. 분명히 파란불일 때 건넜어요. 빨간불에 건너면 엄마한테 혼나는데…… 아니에요. 전 파란불에 건넜어요.”
한상훈이 울먹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합니까?”
“네네. 확실해요. 저는 어제 파란불일 때 건넜어요.”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횡단보도를 건넌 것이 확실합니까?”
“네네. 우리 집 앞에 있는 찻길에서 파란불일 때 건넜다니까요? 우리 엄마한테 물어봐요!”
“아뇨. 증인은 어제 횡단보도를 건넌 적이 없습니다. 증인은 종일 집에 있었습니다.”
“아닌데…… 나 과자 사러 나갔었는데!”
한상훈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증인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어제 종일 집에만 있었죠. 그 부분은 증인의 어머니로부터 확인받은 부분이니 확실합니다. 재판장님, 피고 어머니 김정순 씨의 녹취 내용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음, 채택합니다.”
재판장이 정현석 변호사가 내민 USB를 받아들었다.
뭐, 뭐야? 기, 기억 오류를 걸고넘어지려는 거야.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일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각인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보통, 7세 미만의 어린애들한테서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야! 따라서, 법정에서 한상훈의 증언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거야!
“뭐, 뭐야? 그러면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거야?”
“아니지. 거짓말은 아니야. 지적장애라 정신연령이 7세 미만이라잖아. 우리 애도 가끔 그럴 때가 있어.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닌데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말을 하더라고! TV나 그런 데서 보고는 자기가 한 일이라고 우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전혀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증인은 지금 마치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헷갈리는 그의 기억을 믿어야 할까요? 그의 증언이 합리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합리적인 판결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증인 신문을 마칩니다.”
그의 노련한 심문에 재판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히는 분위기였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재판은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검사 측, 반대 심문하겠습니까?”
“네. 반대 심문하겠습니다.”
박인수 검사가 의외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맞습니다. 증인은 지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장애우입니다. 현재 27세이지만 정신연령은 7세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과 상식은 떨어지고 사리분별력 또한 현저히 낮은 수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피고 측 변호인의 의견대로 그의 증언은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박인수 검사가 정현석 변호사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했다.
“음, 검사! 그렇다면 변호인 측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겁니까?”
박인수 검사의 의외 발언에 재판장이 그에게 질문했다.
“일반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일반론적이라고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시지 마시고 명확히 밝혀주십시오. 지금 검사의 발언은 이 재판 결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재판장의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네. 일반론적으로 그렇지만, 증인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쉽게 설명하세요!”
재판장이 답답한지 목소리 톤을 높였다.
“네. 그러면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증인의 경우는 보통, 서번트 증후군 환자에게서 보이는 양상과 유사한데 그들은 특정 분야에서 비장애인들의 능력을 크게 뛰어넘는 경이로운 천재성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하지만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증인 역시, 특정 영역에서는 일반인을 뛰어넘는, 아니 그보다 훨씬 우수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복사하듯이 장면을 스캔하고 저장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각인된 기억력은 장기간 저장할 수 있고요.”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떤 특정 영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판장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람입니다. 증인은 사람을 한 번 보면 그 또는 그녀의 특징을 머릿속에 스캔해 각인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여자, 그것도 미모를 지닌 여자의 경우는 거의 완벽하게 기억을 해낼 수 있죠. 저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흠,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검사, 증명할 수 있습니까?”
후유, 재판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먹을 말아 쥐며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네.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몇 가지 테스트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맞아요. 저, 저처럼요. 저 아저씨도 저와 같은 능력을 가진 거예요.”
준표가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래! 너를 떠올리며 찾아낸 거야. 너 아니었으면 이 재판 힘들었을 거다. 고맙다. 준표야!
“그래, 그래. 우리 준표도 그랬지!”
“변호사님, 이거, 이거 냄새가 나는데… 변호사님이 코치하신 것 맞죠! 어쩐지 박인수 검사 심문하는 방식이 변호사님이랑 똑같더니만…….”
공 수사관이 나를 보며 눈을 흘겼다.
“흐음, 그런 것이 중요한가요? 우리는 이 재판에서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팩트죠!”
“실례지만, 뒤에서 세 번째 줄에 계신 여성분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박인수 검사가 방청석을 둘러보더니 미모의 젊은 여성을 일으켜 세웠다.
“네? 저요?”
당황한 여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실례지만 잠시만 일어나 주세요.”
“네에.”
여자가 뻘쭘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이쁘다!”
그 순간, 한상훈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럼, 죄송하지만 잠시 법정 밖으로 나가 주십시오.”
“네에? 나가라고요?”
“네.”
“그, 그냥 나가면 되나요?”
“네. 잠시 나가셨다가 5분 후에 들어오시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박인수 검사가 거듭 사과하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아, 알겠습니다.”
여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법정을 빠져나갔다.
“뭐 하려는 거지?”
“글쎄. 나도 법정에서 이런 장면은 처음이라…….”
“아무튼, 뭔가를 하려는가 본데 두고 보자고!”
방청객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이었다.
“증인, 지금 법정 밖으로 나간 여자를 보셨습니까?”
“네네. 봤어요. 그 누나, 엄청 예뻤어요!”
헤헤, 한상훈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면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인상착의가 뭐예요?”
한상훈이 되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방금 나간 여자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해 주세요.”
“아하! 그럼요. 말할 수 있어요.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입술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입술 오른쪽에 점이 있어요.”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치마는 빨간 줄이랑 검은 줄로 이렇게 이렇게 돼 있어요.”
한상훈이 손가락으로 격자무늬를 그리며 설명했다. 아무래도 체크무늬를 뜻하는 듯했다.
“그 밖에 기억나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반지는…… 목걸이는…… 그리고…….”
한상훈은 마치 사진을 보며 얘기하는 듯 그녀의 특징들을 줄줄 읊었다.
“증인, 수고하셨습니다. 재판장님, 이제 밖으로 나가신 여성분은 들어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경위! 지금 밖으로 나가신 여성분 들어오라고 하십시오.”
재판장이 이제야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판장님!”
재판장의 명령에 경위가 법정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후,
“와! 진짜 말한 대로네. 저 사람, 눈썰미가 장난 아니군!”
“그러게 말이야. 인간 복사기야!”
잠시 밖으로 나갔던 그녀가 경위와 함께 법정으로 들어오자 방청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체크무늬 치마, 갈색의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약지에 낀 반지까지 모든 것이 한상훈의 증언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아주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하군요. 검사 측의 농간에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잔뜩 화가 난 정현석 변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변호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농간이라뇨. 신성한 법정에서 말을 삼가세요.”
재판장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흥분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습니다. 지금도 이런 각본을 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당황스럽군요. 저 여성분과 증인이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만약에 검사 측에서 사전에 조작한 것이라면 이는 절대로 묵과할 수 없습니다.”
정현석 변호사가 손가락으로 한상훈을 가리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변호인! 말씀 삼가세요. 각본이라뇨? 검찰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성분! 묻겠습니다. 증인을 사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 아뇨. 전 오늘 처음 본 분이에요.”
여자가 연신 손사래를 쳤다.
“재판장님, 본 검사는, 이 여성분을 오늘 처음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지금 피고 측 변호인은 본 검사를 아니 검찰 전체를 모독했습니다. 이는 그냥 묵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검사님! 검사님 역시, 연기력이 훌륭하시군요.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이 같은 유치한 깜짝 쇼는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진위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정현석 변호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음, 박인수 검사님! 이젠 어쩔 수 없이 히든카드를 꺼내야 할 듯싶군요!
박인수 검사를 응시하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내 마음을 읽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