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유전 유죄(有錢有罪) (4) & 장 검! 걱정 마 (1)
“저, 저기 있는 사람입니다.”
김상식이 방청석에 앉아있던 김태현을 지목했다. 김태현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뭐, 뭐야? 김태현 대표? 지금 H 그룹의 김태현을 말하는 거야?”
“지금 김태현 대표를 가리키는 게 맞지?”
방청석은 핵폭탄이라도 터진 듯 빈사 상태였다. 마치 슬로비디오가 재생되는 듯 기자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태현을 응시했다.
“지, 지금 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모, 모함이야. 저, 저 새끼, 당장 끌어내!”
방청객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모이자 당황한 김태현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게, 대표님! 진정하십시오. 기자들도 있고…… 지, 지금 보는 눈이 많습니다.”
수행비서 최창호가 흥분한 김태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조용! 전부, 조용히 하세요. 더 소란을 피울 시, 법정 소란죄를 적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혼란해진 법정이 못마땅한 듯 목소리 톤을 높이며 격노했다.
“증인,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증인의 진술은 본 재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심각한 발언입니다. 만약, 확실한 근거나 물증 없이 증인의 심증만으로 한 진술이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증인을 사주한 사람이 김태현 씨가 확실합니까?”
그 순간, 박인수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재판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네.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이 있습니다.”
김상식 대신 내가 답했다.
“변호인, 확실합니까?”
“네. 재판장님! 지금부터 돈만 있으면 마치 자신이 조물주가 된 양,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어리석은 금수저의 추악한 모습을 이 자리에서 공개토록 하겠습니다. 재판장님, 본 영상을 재생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재판장에게 USB를 내밀어 보였다.
“재판장님! 안 됩니다. 피고 측 변호인이 제시한 증거는 사전에 협의가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국과수 검증을 거치지 않은 미확인 증거물입니다. 조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절대, 지금 공개할 수 없습니다. 검증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박인수 검사가 급제동을 걸고 나섰다. 다급한 그가 목에 핏발을 세웠다.
“음, 정황상 피고 측 변호인이 제시한 증거물은 본 재판의 본질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판결을 위한 필수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본 재판장의 판단입니다. 변호인!”
“네.”
“추후, 증거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변호인과 피고가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재판장님!”
“좋습니다. 공개하십시오.”
‘알긴 뭘 알아. 수면제 처먹고 정신없는 상태에서 투약한 건데… 쓸데없는 걱정 말고 입단속이나 잘하라고! 내일 2차 공판 때는 분명 끝장을 볼 거니까 걱정 마…….’
“서, 설마 했는데…….”
법정 중앙에 스크린이 내려와 화면이 켜지고 조금씩 김태현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충격에 빠진 방청객들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패닉 상태였다.
“뭐, 뭐야? 아…… 아냐! 지금 누굴 모함하는 거야? 이…… 이건 음모야. 저 새끼들의 음모라고, 지, 지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천하의 김태현이라고!”
“대표님, 진정하십시오.”
“다, 당장, 조 변호사한테 전화해. 당장!”
김태현이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악다구니를 부렸다.
“다 죽여버릴 거야! 나를 건드려? 그러고도 너희들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대표님! 진정하십시오.”
반쯤 눈이 풀린 김태현이 방청석을 벗어나 비틀거리다 갑자기 증인석을 향해 돌진했다.
“경위! 저, 저 사람 제지하세요!”
화들짝 놀란 재판장이 소리쳤다.
“네!”
두 명의 경위가 황급히 뛰어 들어가던 김태현의 몸을 잡았다.
“놔, 놓으라고 이거 안 놔! 저,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법원 경위가 달려가 김태현의 양팔을 결박하자 그가 팔을 뿌리치며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야 이 개새끼야! 넌 내가 누군지 몰라? 죽고 싶어! 조 변호사, 조 변호사 당장 오라고 해! 당장!”
발버둥을 치다 발을 헛디딘 김태현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탐욕과 아집으로 점철된 가진 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저, 저 사람! 당장 퇴장시키세요!”
어이없다는 듯이 그 장면을 목격한 재판장이 소리쳤다. 법정은 아수라장이었다.
“흠,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요.”
김정주 주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걸 유전유죄(有錢有罪)라고 해야 할까요. 그나저나 병석에 있는 김 회장이 걱정입니다.”
흐려진 박 회장의 눈빛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잠시 후,
김태현의 소란으로 한바탕 소란했던 법정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다시 재판이 시작되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검사! 반대 심문하겠습니까?”
“아, 아니요. 반대 심문하지 않겠습니다.”
천하의 박인수 검사도 더는 버틸 힘이 없는 듯했다. 그거 링을 향해 수건을 내던졌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2차 공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선고 공판은 3주 후, 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인수 검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판장이 말을 이어받았다. 초유의 폭력사태가 벌어진 2차 공판이 마침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판사 생활 15년에 조폭이 법정에 난입해 난리를 피우고 증인이 쫓겨나가는 건 처음 보는구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재판장이 비공개 재판을 선언하며 서둘러 법정을 빠져나갔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흑흑흑, 정지수가 맥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후, 나는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들어 올렸다. 앙상해진 어깨, 그녀가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 복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검사님!”
법정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길에 박인수 검사와 마주쳤다.
“…….”
박인수 검사가 시선을 피하며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검사님, 이거 받으십시오.”
나는 그의 옷소매를 잡으며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김태현 대표와 GM 기획 그리고 사성파, 안정국에 관한 파일입니다. 김태현과 안정국의 검은 커넥션 그리고 GM 기획 주가 조작 정황 등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걸 왜 제게 주십니까?”
“이 사건, 검사님이 끝맺음을 지어 주셨으면 하고요.”
“병 주고 약 주기입니까?”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그런 거. 저도 초반엔 검사님의 맹공에 휘청했습니다. 그냥, 운이 좋았죠! 그건 그렇고, 지금 검찰에서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해주실 수 있는 분은 검사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공자님이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했던가요?”
“지금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검사님 주변에 사람이 없잖습니까? 남들은 금줄이다 동아줄이다 못 잡아서 안달이던데 검사님은 독고다이시던데요? 저처럼요.”
“네?”
박인수 검사의 이마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농담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물고기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 물은 분명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의 생명수가 될 겁니다. 그리고 잡어들이 사라진 그 물속에서 정의의 물고기는 살아 펄떡일 겁니다. 저는 그런 검사님을 믿습니다.”
“꿈보다 해몽이군요.”
“그런가요?”
하하하,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밝게 웃었다.
“음, 저도 이번 재판을 통해 느낀 게 많습니다. 자료는 받아두겠습니다. 아무튼, 김 변호사님도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박인수 검사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네. 재판 끝나면 줄 없고 백 없는 것도 인연인데, 소주나 한잔합시다.”
“후후후, 그럽시다.”
한 달 후,
‘정지수를 무죄 판결한다. 피고 정지수는…….’
예상대로 정지수는 최종 선고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변호사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음, 앞으로 좋은 영화 많이 찍으셔서 관객들 즐겁게 해주시면 됩니다.”
한편, 증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피고 신분으로 바뀐 김태현은 정지수 마약 사건 모의뿐만 아니라 연예인 지망생 성폭행, GM 기획 주가 조작 사건 등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남부 구치소>.
팟팟! 팟팟팟!
김태현이 호송한 줄에 묶여 차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김태현 씨, 걸그룹 샤인의 리더, 이정연 씨 성폭행설이 사실입니까?”
“…….”
한층 수척해진 얼굴의 김태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성파, 안정국 씨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
김태현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으며 말없이 구치소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 높은 줄 모르며 기고만장했던 금수저가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박엔정, 박 회장 집무실>.
정지수 재판을 마무리한 후, 박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로 나를 불렀다.
“수고했어. 김 변! 이번에도 멋지게 해냈구먼.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과찬이십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럼 이 모든 것이 운이란 말인가? 자네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사람 하곤, 조선 시대 사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겸손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나? 일한 만큼, 능력을 발휘하는 만큼, 인정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게 21세기의 미덕일세.”
박 회장이 나를 향해 검지를 흔들었다.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 생각인가? 물론, 우리 회사로 들어올 생각은 없겠지?”
“네. 그렇습니다.”
“후후후, 내가 괜한 걸 물었구먼. 아무튼, 큰일을 할 사람이니 각별하게 신경 쓰도록 하겠네. 머지않아 자네가 세상을 바꿀 날이 올 거야. 그날이 오면 나나 김정주 주필이나 자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겠네. 우리 같이 세상을 바꿔보세나!”
박 회장이 덥석 내 손을 움켜쥐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함께해야 할 사람이다!
“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금세, 교육의 효과를 보는구먼!”
“그나저나, 회장님! 김태현 관련 자료는 어떻게 된 걸까요? 몇 달 전에 익명의 우편으로 사무실에 배달됐습니다. 우편물을 확인해보니 충격이었습니다. 저도 그 부분까지는 알 수 없었거든요. 누가 이 자료를 보낸 걸까요? 절대 손에 넣기 쉬운 자료가 아니었는데요”
“그랬나? 글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던가?”
“네? 그게 무슨 뜻이신지?”
“음, 자네의 정의로움에 감탄한 하늘이 선물을 준 것이 아닐까?”
후후후, 박 회장이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 * *
<서초동, 정은 법률사무소>.
정지수 사건 승소 그리고 장 검의 연이은 사건 수임으로 인해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고 우리 회사는 조금 더 규모를 늘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장 검의 소원이던 서초동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변호사님, 이젠 직원을 좀 늘려야 하지 않을까요?”
공 수사관이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음, 저는 괜찮은데, 사무장님이 힘드시면 뽑으세요.”
“헐, 이건 뭐. 뽑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섭네요.”
공 수사관이 대발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뇨, 아뇨. 진짜. 일이 힘드시면 뽑으세요. 진짜예요.”
“됐네요. 됐어!”
공 수사관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음, 그나저나 장 변한테는 아직 연락 없죠?”
“네. 이모님 수술이 길어지나? 장 변호사님 말로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던데…….”
“음, 장 변이 이모님이랑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특별히 각별하다고 하던데, 수술이 잘돼야 할 텐데요.”
“그러게요.”
띠리리링.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 소리. 장 검의 전화였다.
“장 변! 이제 수술 끝난 거야?”
“서, 선배님…….”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왜? 왜 우는 거야?”
“이모가…… 이모가…….”
“왜 그래? 이모님이 어떻게 되신 건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흑흑흑, 이모가, 이모가 도, 돌아가셨어요.”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