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39화] 모략(謀略) (1)
뭐…… 뭐지? 이 영상은?
곧이어 킹 메이킹 시스템이 상태창에 띄운 영상을 본 순간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에 나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 지금 저 사람 뭐 하는 짓이야?
웨이터 복장의 한 남자가 와인 잔에 무언가를 타는 장면이었다. 몸과 얼굴이 가려진 채 팔만 보이는 영상이었기에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상 속 배경이 정지수가 연예인 바자에 참석했던 곳과 같은 장소인 건 분명했다.
와인이라…….
‘아뇨. 밥은 먹지 않았지만 와인을 두 어 잔 정도 마신 것 같아요.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 갔는데 정신이 몽롱해졌어요.’
그 순간 정지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지수는 그날 밤 분명 와인을 두 어 잔 마셨다고 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만약에 저 와인 잔에 탄 정체불명의 가루가 수면제라면……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진다! 저자를 찾아내야 한다. 분명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어! 웨이터 복장의 남자! 정지수에게 와인을 건넨 웨이터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띠리리링.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공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장님! 접니다.”
“네. 변호사님. 무슨 일이세요.”
“지난번 정지수가 참석했던 연예인 바자 현장을 담은 CCTV 화면을 좀 확보해 주세요. 아마 장소가 다이아몬드 홀이었을 겁니다.”
“네? 하, 그건 좀 곤란한데…… 그냥 무작정 찾아가서 파일을 달라고 하면 누가 ‘어서 옵쇼. 여기 있습니다.’ 이럽디까? 뭔, 명분 같은 게 있어야죠? 게다가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삭제했을 수도 있는데.”
“누가 H 호텔에 가라고 했습니까? 아마도 검찰 쪽에서 이미 CCTV 영상을 확보해뒀을 겁니다. 그쪽에서 방법을 찾으셔야 할 겁니다.”
“뭐예요. 그러니까, 검찰이 확보한 CCTV 영상을 몰래 빼 와라? 뭐, 이런 겁니까? 그거 불법 아닙니까?”
“누가 몰래 빼 오라 했습니까?”
“그럼, 무슨 수로요?”
“가장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무장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아무튼, 바자 일 CCTV가 필요합니다. 어떻게든 구해오세요.”
“이거 너무 막무가내 아닙니까? 그걸 무슨 수로…… 아! 잠깐! 흠…… 가만있자. 변호사님! 꼭 CCTV 영상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죠?”
“네? 그건 무슨 소리예요. 네. 당연히 상관없습니다. 정지수에게 와인 잔을 건넨 웨이터가 누군지만 확인할 수 있으면 돼요.”
“흠, 웨이터라… 다이아몬드 홀, 알겠습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올 테니 기다리십시오.”
“아무튼, 절대 불법은 안 됩니다. 정상적인…….”
“알았다고요. 합법! 합법적으로 정의롭게 갖다 바치겠습니다.”
“그래요. 아무튼, 최대한 빨리 부탁합니다. 참, 그리고 전 지금 박정욱 감독을 만나고 바로 퇴근할 거니까 사무장님도 정리하시고 알아서 들어가세요.”
“네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 * *
<박정욱 감독, 작업실>.
나는 ‘애증의 조건’ 여주인공 캐스팅 과정의 비화를 확인하기 위해 박정욱 감독의 작업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정지수 씨의 변호를 맡은 김정환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앉으시죠.”
박정욱 감독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드시죠. 지수는 잘 있습니까?”
박정욱이 커피를 건네며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여러 작품을 함께 해온 정이 있어서인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흠, 심적으로 고통이 커서 그런지 많이 힘들어합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당연히 그렇겠죠. 하루아침에 부와 명예를 잃어버렸으니…… 한 번 면회를 간다, 간다 하면서 못가고 있네요. 내일이라도 한 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후, 박정욱이 안타까운 듯 입김을 불어 앞머리를 날렸다.
“…….”
“변호사님이 잘 좀 보살펴 주십시오. 지수는 영혼이 맑은 아이예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전, 지금도 지수가 필로폰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죠? 연예인들 마약 사건이 종종 있었잖습니까? 그렇게 확신할 정도면 이유가 있을 텐데요.”
“아뇨. 지수는 마약에 의존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여기까지 올라왔어요. 의지가 강한 아이죠. 마약 같은 거로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을 날릴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예전에 지수가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의가 왔었죠. 메이저 영화사에다 상대 배우도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였던 브래드 딘이었으니까 세계적인 톱 배우로 발돋움할 절호의 찬스였는데, 단호히 거절했었죠.”
“이유가 뭐였죠?”
“모든 조건은 최고 대우였는데 배역이 문제였어요. 여자주인공 역할이 마약에 중독된 동양계 의사였는데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 팬들이 혹시나 모방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만큼 지수는 마약을 혐오했던 배우였어요. 그래서 마약 근절 캠페인 출연 제의가 왔을 때도 흔쾌히 승낙했어요. 당연히 보수도 받지 않았죠. 그만큼, 자기 관리도 철저했고 오로지 연기밖에 모르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박정욱 감독의 눈이 흐려지는 듯했다.
“그랬군요.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크랭크인이 들어가자마자 여주가 민서영 씨에서 지수 씨로 바뀌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요? 제가 알기론, 원래 민서영 씨가 여주로 내정되어 있던 것으로 아는데요.”
“흠, 그건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서영이는 그 역을 맡을 만한 능력이 되지 못했어요. 그 역할은 내면 연기가 중요한데, 서영이는 눈빛부터가 탐욕에 젖어 천박한 아이였습니다. 절대 내가 원하는 연기를 할 수 없는 배우였어요.”
“그랬군요.”
“게다가 이 시나리오는 애초에 지수를 염두에 두고 쓴 건데. 제작사 측에서 강력하게 서영이를 추천해서 어쩔 수 없이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한 컷도 찍을 수가 없었죠. 지수 같은 경우는 끊임없이 캐릭터를 연구해 완전히 몰입했는데 서영이는 연기만으로 볼 땐, 쓰레기급에 가까웠습니다. 외모 덕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서영이는 B급 배우가 딱 어울리는 수준이었어요. 발전 가능성도 없었고요.”
박정욱이 씁쓸한지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피우셔도 됩니다.”
“그래도 될까요? 나도 담배 이걸 끊어야 하는데, 요즘 같아서는….”
틱, 후.
박정욱이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궁금한 게 있는데, 연기력이 부족한 민서영을 여주로 만들기 위해 GM에서도 엄청난 투자와 로비를 했을 거로 예상이 되는데 감독님이 정지수 씨로 여주를 바꾸자고 했을 때 마찰이 심했을 텐데요. 어땠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당연히 심했죠. 제가 이 바닥에 들어온 지 25년이 넘는데, 난생처음 협박이라는 것을 당해봤습니다.”
“협박이오?”
“네. 민서영을 여주로 안 쓰면 이 바닥에서 매장하겠다더군요. 게다가, 어처구니없게 문체부 장관님까지 동원해서 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박정욱이 치를 떨며 양 주먹에 힘을 주었다.
“문체부 장관이면, 영화감독 출신인 이상동 씨잖습니까?”
“네. 맞아요. 저하고는 막역한 선후배 사이였죠. 하지만, 전 아닌 건 때려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라 끝까지 버텼던 거죠. 다행히, 내가 나름 이 바닥에서 쌓아놓은 인덕이 좀 있어서 그런지, 남자주인공 우석이를 비롯해 다른 배우들도 내 편에 서줘 촬영 보이콧을 하는 바람에 간신히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흐음, 박정욱이 깊게 숨을 내뱉었다.
H 그룹의 셋째 아들 김태현은 GM 기획사 대표와 동기동창 사이, 게다가 김태현은 GM의 주식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다. 김태현 정도면 충분히 문체부 장관을 움직일 수 있을 테고…… 도대체, 이 사건이 어느 선까지 연결이 되어 있단 말인가? 어쩌면, 정지수는 그들의 권력 다툼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세력과 맞붙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정지수 씨와 오랫동안 영화를 하셨으니 지수 씨에 관해서 잘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제가 지수랑 벌써 10년 째예요. 그간 찍은 영화만 4편이고, 지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정도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입니다.”
“흠, 그러면, 최근 들어서 지수 씨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습니까? 아주 사소한 것도 좋으니 말씀해 주세요.”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박정욱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예를 들면, 좀 불안해한다거나, 아니면…….”
“맞아요! 있었어요. 불안해한다기보다는 안절부절못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신경질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웬만해서 촬영 중에 불만을 표시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간혹, 굉장히 예민했거든요.”
박정욱이 생각이 났는지 목소리 톤을 높였다.
"예민했다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때는 굉장히 초조해하기도 하고 때론 심하게 갈증이 난다고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요?”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좀 이상했죠!”
“어떻게 이상했단 말씀입니까?”
“희한한 게 원래 커피를 잘 마시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커피를 마시고 나면 편안해진다고 했어요. 그래서 항상, 매니저가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오곤 했죠.”
“매니저 박민재 씨를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그 친구 이름이 박민재였죠.”
“근데 커피를 마시면 안정이 된다고요?”
“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매니저가 항상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와 대기하고 있었어요. 원래, 지수가 카페인에 예민해서 커피를 안 마시는데…….”
박정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를 마시면 안정이 된다? 그것도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이?
서…… 설마!
“박민재가 항상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가지고 있었던 게 확실합니까?”
그 순간,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네에. 쉬는 시간에 매니저가 지수에게 건네주는 걸 여러 번 봤어요. 매니저가 커피를 주면 지수가 거의 한 컵씩 받아 마셨죠.”
박정욱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네.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언제든지 오셔도 좋습니다. 저도 힘닿는 데까지는 돕겠습니다. 지수,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나중에 법정에 증인으로 서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당연하죠. 지수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박민지! 너, 딱 걸렸어!
나도 모르게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 *
며칠 후, 정지수 사건 첫 공판 일주일 전.
<정은 법률사무소>.
쾅!
공 수사관이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변호사님! 영상 확보했습니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USB를 들어 올리며 헐떡거렸다.
“네? 정말요? 검찰에서 순순히 파일을 내주던가요?”
“에이. 설마요.”
공 수사관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요?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다, 방법이 있습죠!”
크크크, 공 수사관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