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배신(背信) (2)
<정은 법률사무소>.
한 시간 후, 공 수사관이 옆구리에 두툼한 서류뭉치를 끼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수사관님, 어서 오십시오.”
“네. 변호사님, 많이 기다리셨죠? 기다리신 만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대박 뉴스를 물고 왔으니까요.”
공 수사관이 상기된 표정으로 옆구리에서 서류뭉치를 빼내 들어 올렸다.
“네. 기대되는데요. 뭔가 큰 이슈가 나온 겁니까?”
“암요. 당연하죠. 이 자료를 좀 보시죠!”
공 수사관이 서류봉투에서 맨 처음 꺼내든 자료는 최근 몇 달간, 박민재의 통화 기록이었다.
“이 빨간색으로 표시된 건 뭐죠?”
페이지마다 같은 전화번호에 빨간색 밑줄이 쳐져 있었다. 페이지당, 수백 개가 넘었다.
“공교롭게도 정지수가 구속되기 몇 달 전부터 박민재는 계속 누군가와 통화했습니다. 하루 평균 5회에서 10회가량, 한 달에 300건, 석 달 동안 총 814회 통화를 했습죠. 박민재가 정지수와 회사 말고는 통화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 정도면 가족 이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전 마누라한테도 이 정도로 자주 걸지는 않아요. 분명 뭔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수상한 건, 이렇게 뻔질나게 통화했었는데 최근에는 전혀 통화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변호사님, 아무래도 냄새가 나는 것 같죠?”
공 수사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잡고 좌우로 비틀었다.
흠, 맞아! 공 수사관의 말대로 분명 뭔가 있다! 박민재가 전화를 건 대상만 찾아낼 수 있다면 일은 쉽게 풀릴 수도 있다.
“혹시, 그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아내셨나요?”
“흠, 그게 좀 아쉬운 게, 어떤 노숙자의 신상 정보를 털어서 만든 대포폰이더군요. 그래서 아직은 실소유주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아! 그런데, 박민재 통신 정보는 어떻게 확보하신 거죠? 혹시 불법…….”
“아이고, 우리 변호사님, 또 고귀한 선비 정신 나오시네. 큰일을 위해서는 자잘한 건 넘어가시죠. 다들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안 하면 이 바닥에선 아무것도 못 해요. 자연 도태된다고요.”
공 수사관이 손가락으로 입 옆을 긁적거렸다.
“흠, 그래도 불법적인 건 안 돼요. 법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사람이 불법을 저지르는 건 모순이잖아요. 합법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불법이 합법이 될 수는 없죠.”
“하여간, 고리타분하시긴, 그럼, 뭐, 몰래 사진 찍는 거나 미행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겠네요. 그럼 왜 저한테 이 일을 시키신 거예요?”
공 수사관이 입을 삐죽거렸다.
“아뇨. 불법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개방된 장소에서 사람을 쫓거나 자주 가는 장소에서 잠복하는 정도로는 형사 처분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초상권을 침해해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공개된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정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느 정도 허용이 되죠. 그래서 제가 부탁드린 겁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하여간. 내가 어떻게 변호사님을 이깁니까? 법으로 이기겠습니까? 뭐로 이기겠습니까? 제가 졌습니다. 졌어요.”
공 수사관이 양손을 내저으며 잔뜩 미간을 좁혔다.
“그나저나, 이거 말고 다른 건 뭐 없습니까?”
“왜요? 뭘, 더 알고 싶으신 게 있기는 하세요?”
여전히 공 수사관이 빈정거렸다.
“휴, 왜 그러세요? 진짜. 저녁에 돼지껍질 사겠습니다.”
“진짜죠? 정말 사는 겁니다. 이거랑 같이!”
공 수사관이 소주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반색했다. 하여간, 단순한 성격이었다.
“당연하죠. 돼지껍질에 소주가 빠지면 안 되죠.”
“있죠. 당연히! 이 정도로 대박 뉴스라 할 수 없죠. 변호사님 말대로 요마 골프 클럽의 주인은 박민재였습니다. 고향에 내려가자마자 제주도 골프장에 갔어요.”
공 수사관이 눈을 빛내며 사진 몇 장을 꺼내 들었다. 박민재와 낯선 남자가 골프장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진이었다.
“흠, 박민재가 예전에도 골프를 치러 다녔나요?”
“아뇨! 그 인간, 골프에 ‘골’자도 모르는 위인이에요. 스크린 골프장도 한 번 안 가 본 인간이거든요. 근데, 이상한 게 고급 골프 클럽은 들고 다니긴 하는데 골프를 치는 게 주목적은 아닌 듯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아무래도, 골프 클럽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는 의도 같아요. 거기 사진 보세요. 박민재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공 수사관이 손가락으로 사진 속 남자를 가리켰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GM의 재무 담당 중역이에요. 박민재가 제주 골프장에서 GM 기획 상무, 이상호를 만난 것이 포착됐습니다. 이게, 이게 진짜 대박 뉴스죠!”
공 수사관이 사진 속의 남자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GM 기획, 이 상무요? GM이라면 국내 최대의 기획사 아닙니까?”
GM사는 국내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로 음악, 영화, 스포츠 분야를 망라한 최고의 스타들을 보유한 대기업이다. 그에 반해 YTS는 신생 기획사로 대표 연예인이 정지수 한 명뿐인 영세 기획사였다. 최근까지도 GM은 정지수를 영입에 공을 들였지만, 그녀는 GM의 엄청난 자금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지인이 설립한 YTS와 계약했다. 일종의 의리 계약이었다.
“그러니까 더 구린내가 난다는 거죠. 정지수가 구속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표 쓰고 고향에 내려갔는데, 내려가자마자 GM 기획 상무를 비밀리에 만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뭔가 야로가 있는 게 틀림없죠.”
공 수사관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군! 이렇게 된다면 뭔가 일이 점점 복잡해질 것 같은데? GM이라…….
“아무튼, 수고 많으셨고요. 조금 더 밀착 마크를 해주세요. 그리고 최대한 그 대포폰의 실소유주를 알아봐 주십시오. 그 대포폰 소유주가 이번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을 것 같군요.”
“어, 그거, 불법 아닌가요?”
“아뇨. 대포폰이 불법이죠. 실질 소유주가 밝혀지면 검찰에 고소할 예정입니다. 대포폰을 사용하면 형법 제…….”
“아아! 됐네요. 아무튼, 내가 어떻게 변호사님을 이기겠습니까? 눼, 눼!”
공 수사관이 양손을 들어 펼쳐 보이며 혀를 내둘렀다.
* * *
<서울 동부 구치소>.
나는 몇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어 정지수를 만나러 구치소로 향했다.
[첫 번째 미션을 수행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역시, 박민재가 이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것이 틀림없었군!
구치소 입구를 지나자마자 중저음의 목소리가 차 안을 꽉 채웠다.
[상세 힌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
“YES!”
[상세 힌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건 뭐지? 낱말퀴즈인가?
킹 메이킹 시스템이 보여준 힌트는 십자 말 퀴즈였다. 화면 중앙에 박민재의 이름이 나타났고 가운데 글자인 ‘민’자 아래로 두 개의 빈 네모 칸이 연달아 생성되었다.
“뭐야? ‘민’자로 시작하는 세 글자의 단어? 비어있는 두 개의 칸을 유추하라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당연히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단어겠지?”
[물론입니다.]
‘민’자로 시작하는 세 개의 글자로 구성된 단어라…… 음, 세 글자, 세 글자라…… 그렇다면 사람의 이름을 뜻할 가능성이 농후하겠군!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차에서 내려 천천히 접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접견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변호사님.”
일주일 사이에 더욱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광대가 툭 튀어나온 모습이 애처로웠다. 말 한마디 내뱉기도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1차 공판이 얼마 남지 않아 더욱더 예민해진 듯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될 겁니다.”
“네에.”
그녀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에 매니저 박민재 씨가 지수 씨의 아파트에 드나들었나요?”
“아뇨. 민재가 우리 집에 들어온 적은 없었거든요. 제가 조금 결벽증 같은 게 있어서 누가 저의 집으로 들어오는 걸 극도로 꺼리거든요.”
박민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박민재가 그녀의 허락 없이 집에 들어간 정황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현관 비밀번호도 당연히 모르겠군요?”
“네. 알 리가 없죠! 그런데 왜요?”
“아뇨.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네에.”
만약, 화장실에 주사기를 가져다 놓은 사람이 박민재라면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그래요. 그럼,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누가 있나요?”
“음, 아마도 엄마 말고는 없을 거예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비밀번호가 뭔지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음, 제가 데뷔한 영화가 개봉하던 날이 비밀번호예요. 그날이 9월 26일이었거든요. 그래서 0926을 현관 비밀번호로 입력해 뒀습니다.”
첫 영화 개봉일이라…… 그 정도 번호라면 박민재가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는 번호다.
“음. 그렇군요. 그나저나 혹시, 박민재 씨가 고향으로 내려간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박민재는 정지수가 구속된 후 이튿날 단 하루 면회를 왔을 뿐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구치소에 찾아오지 않았다.
“네? 아뇨. 전혀 몰랐어요. 민재가 영천에 내려갔나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닌데, 거기가 민재 고향이긴 하지만 일가친척도 없는 곳인데 왜 내려갔는지 모르겠네요. 명절 때 고향 얘기만 나와도 몸서리를 치며 싫어했어요. 저와 같이 있는 동안은 단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간 적이 없었거든요. 제 기억으론 그렇습니다.”
역시, 고향에 내려간다는 것은 구실일 뿐이었어. 자신을 최대한 수사 선상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였겠지.
“그랬군요…….”
“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혹시, 평소에 정지수 씨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글…… 쎄요. 지금까지 전 남한테 해를 끼치며 살진 않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음, 그럼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정지수 씨가 이렇게 구치소에 갇히게 되면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굴까요?”
“음…… 글쎄요.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이라면 서영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정지수가 귀밑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이라… 그렇지! 민서영. 십자 말 퀴즈의 세로 세 글자! 두 번째 미션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이 될 듯하군!
“서영이요? 혹시, 배우 민서영 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박정욱 감독님의 새 영화, ‘애증의 조건’ 여주로 서영이가 먼저 캐스팅됐었거든요. 워낙 대작이라 여배우라면 누구든 탐을 냈을 만한 캐릭터였어요. 이미 GM에서 물밑작업을 해둬서 내부적으로 서영이가 주연으로 내정된 상태였어요.”
“흠, 그랬군요. 계속 말씀하시죠.”
“네. 그런데, 영화 촬영 첫날에 감독님이 돌연 틀어버리셨어요. 저 아니면 영화를 안 찍겠다고 보이콧을 하셨거든요. 보통 이런 경우가 거의 없어서 제작사나 서영이나 무척이나 황당했을 거예요. 제작사 측에서 감독님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워낙 거장이신 감독님이라 어쩔 수가 없었나 봐요. 결국, 감독님의 뜻대로 제가 주연을 맡게 됐어요. 그 바람에 서영이가 맘고생이 무척 심했을 겁니다.”
정지수가 천천히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혹시, 민서영 씨 소속사가 GM 기획인가요?”
“네. 맞아요. GM에서 이 영화에 굉장한 공을 들였거든요. 서영이가 GM의 간판스타급이었으니까 회사 측에서도 타격이 컸을 겁니다.”
흠, 박민지, 민서영 그리고 GM 기획의 이상호 상무! 이렇게 연결이 된다? 이러게 되면 얼추 밑그림은 그려지는 셈인가?
“네. 알겠습니다. 흐음, 이제 첫 공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체력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힘든 싸움이 계속될 거예요.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네에. 전 변호사님만 믿겠습니다.”
“네.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에.”
잠시 후,
[두 번째 미션을 해결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접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예상대로 굵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역시, 십자 말 퀴즈의 정답은 민서영인가?”
[네. 상세 힌트권을 제공할까요?]
“당연하지!”
뭐…… 뭐지?
곧이어 킹 메이킹 시스템이 상태창에 띄운 영상을 본 순간,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에 나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