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정의구현 가신다-137화 (137/170)

# 137

[137화] 배신(背信) (1)

박민재와 이삿짐 직원들은 이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정지수 씨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박민재가 이삿짐을 내려놓고는 명함을 받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10년 넘게 매니저로 일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듯한데…….

“정지수 씨 매니저시죠?”

“네.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정지수 씨에 관해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수차례 전화도 해보고 회사도 찾아가 봤는데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아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네. 근데 어쩌죠? 보시는 것처럼, 제가 지금 이사 준비로 무척 바쁜데…….”

박민재가 어깨를 들썩이며 입을 삐죽거렸다.

“박민재 씨! 10년을 넘게 한 가족처럼 함께한 사람이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30분 정도 시간을 할애하기 힘드신 겁니까? 너무하지 않나요?”

“네, 네 알겠습니다. 이 오피스텔 지하에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 가 계시죠. 곧, 내려가겠습니다.”

흠흠흠, 박민재가 헛기침하며 마지못해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피스텔 지하, 카페>.

“뭐, 드시겠습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한 잔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되도록 짧게 부탁합니다. 길게 시간을 낼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박민재가 목이 타는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사를 하시나 보네요? 이삿짐이…….”

“네. 누나도 저렇게 되고 해서 마땅히 먹고살 것도 없고 해서 고향으로 내려가려고요.”

박민재가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정지수 씨가 박민재 씨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던데요.”

“흠, 그렇겠죠. 누나가 워낙 낯을 가려서 저 말고는 사람들하고 친분이 없어요.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허구한 날 경찰들 찾아와 귀찮게 하고 무엇보다 더 이 바닥은 이렇게 한 번 구정물 튀기면 끝장이거든요. 누가가 이렇게 망가지면서 저도 설 자리가 없어졌어요. 어차피, 누나는 재기하기도 힘들고 저도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젠 이 바닥을 뜨려고 합니다. 저도 아주 진절머리가 나요.”

박민재가 혀를 내두르며 진저리를 쳤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정지수 씨는 박민재 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텐데요.”

“변호사님도 신문을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화장실에서 마약 투여에 사용된 주사기까지 나왔잖습니까? 솔직히, 가망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완전 빼박이죠. 저도 마음은 아프지만 제 살 길은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경찰 조사에서 할 얘기는 전부 했습니다. 저도 지쳤다고요. 더 할 얘기도 없고요. 이젠 저도 막 헷갈립니다.”

박민재가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비벼댔다.

10년 넘게 친남매처럼 지냈다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모든 사람이 그녀를 외면해도 끝까지 당신만은 믿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비정하군!

“그렇군요. 그럼 몇 가지만 여쭙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정지수 씨가 마약에 손댈 정도면 사전에 전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심리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아니면…….”

“음, 누나가 최근 영화 문제로 제작사와 마찰이 좀 있었어요. 원래, 극도로 노출을 꺼리는 사람인데, 영화사 쪽에서 고수위 베드신을 요구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계약을 파기하네, 마네 심적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최근에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거든요. 아무튼, 원래 과묵한 사람인데 부쩍 말수도 적어지고 식사도 거르고 아무튼, 성격도 신경질적으로 변했어요. 매사에 짜증이었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박민재가 술술 털어놓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음, 스케줄 관리를 본인이 전부 하시죠?”

“네. 제가 관리했습니다.”

“그러면, 최근에 정지수 씨가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제가 확인할 수 있을까요?”

“흠, 그게 좀 곤란한 게.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들이야 회사에 가면 나와 있으니 상관없는데 누나가 사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저도 몰라요. 누나는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지인들을 만날 때는 혼자 나가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10년을 넘게 함께 일했는데 누나 집에 들어간 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일이 있을 때는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죠. 하긴, 저 말고도 누나 집에 들어간 사람은 누나 어머님 말고는 없을 겁니다.”

모든 질문을 원천적으로 막으려는 생각이야! 자신은 정지수의 사생활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건가? 아니!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궁금한 것이 생기면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사는 어디로 가십니까?”

“흠, 경북 영천으로 갑니다. 거기가 제 고향이에요. 참,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가능하면 연락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심신이 지쳐서 이러다간 저도 미쳐 버릴 것 같아요. 당분간 고향에 내려가서 마음을 추슬러야겠습니다.”

박민재가 냉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흐음, 알겠습니다. 참! 골프를 좋아하시나 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쩍 말을 내뱉었다.

“네?”

“좀 전에 보니, 명품 골프채 같던데요.”

“아, 그게…… 제 거 아니에요. 지인이 해외 나가면서 제게 맡겨 놓은 거예요. 한국에 들어오면 가져갈 겁니다. 제 주제에 무슨 골프를 치겠습니까?”

박민재가 잠시 멈칫했지만, 금세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골프 교본에 골프 장갑, 신발까지 맡겨 놓았단 말인가? 웃기는군!

“그렇군요. 아무튼,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기 조심하시고요! 보기엔 무척 건강해 보이시는데 의외로 약골이신가 보군요!”

“네? 네에.”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변호사님, 누나한테 힘내라고 전해주십시오. 나중에 어느 정도 정리되면 면회 가겠습니다. 어휴, 어쩌다 마약에 손을 대서는…….”

박민재가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거렸다.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 * *

<정은 법률사무소>.

“사무장님, 최근 일주일 사이에 발행된 일간지 전부 취합해 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상앙 일보, 서아 일보…… 그리고 한민족 일보!”

공 수사관이 신문 뭉치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신문사별로 펼쳐놓았다.

‘화장실에서 주사기까지 나왔잖습니까? 솔직히, 가망 없는 것 아닙니까?’

순간, 박민재의 말이 떠올랐다.

없어! 어디에도 정지수의 집에서 나온 주사기가 화장실에서 발견됐다는 기사는 없다!

모든 신문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막연하게 정지수의 자택에서 주사기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만 있을 뿐, 어디에도 화장실을 언급한 신문사는 없었다. 물론, TV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사무장님, 이 신문이 전부인가요?”

“암요. 국내에서 발간되는 신문은 이게 다예요. 지역신문까지 가져올까요?”

“아뇨, 아뇨. 이 정도면 됐습니다.”

분명, 박민재 이 사람!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

“사무장님, 혹시, ‘요마’라는 골프용품 제조사를 아세요?”

“요마요? 음, 알다마다요. 아마 타이거 우즈도 그 회사에서 만든 골프채를 쓸걸요? 제가 요즘 골프에 입문해서 좀 압니다만 그런데 왜요?”

공 수사관이 허공에 스윙하는 몸짓을 취하며 말했다.

“많이 비싼 건가요?”

“무지하게 비싸죠. 그리고 아무한테나 팔지도 않아요. 아이언 하나가 돈 천은 하니까, 세트로 구입하려면 한 일억은 줘야 할걸요? 왜요? 변호사님도 입문하시게? 초급자한테는 그런 명품 골프채는 의미 없고, 그냥, 국산 거…….”

1억을 호가하는 명품 골프채라… 박민재 월급에 이게 가당키나 하나?

“사무장님, 혹시, 그게 중고로도 거래가 되나요?”

“없어서 못 사죠. 워낙,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작업한 골프채에 한정수량으로 제작된 거라 중고시장에 나오면 바로 나갈걸요? 우리나라도 돈 좀 있는 벼락부자들이 많잖아요. 그 골프채가 셀럽의 상징이라 오히려 중고가 더 값이 나가요. 그거, 돈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공 수사관이 입맛을 다시며 씁쓸해 했다.

만약 박민재가 그 골프채를 자금 세탁용으로 받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 골프채를 박민재에게 준 사람은 누굴까? 그를 밝혀야 한다. 그가 이 사건의 스모킹 건이야!

“그… 그래요! 엄청나군요. 그나저나 사무장님, 혹시 박민재한테 사람 하나 붙일 수 있을까요?”

“사람이오? 왜요? 미행 붙이시게?”

“아무래도 박민재가 수상합니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흠, 쓸만한 인재야, 널리고 널렸죠. 돈이 문제지.”

공 수사관이 코끝을 매만지며 좌우로 흔들어댔다.

“이 정도면 될까요?”

나는 그에게 박엔정에서 받은 수임료 3천만 원이 찍힌 통장을 내보였다.

“어, 박엔정에서 수임료 들어온 겁니까?”

“네.”

“흠, 뭐. 이 정도면 특급은 아니더라도 쓸만한 A급은 섭외할 수 있겠는데요? 빨대라고 아주 이 바닥엔 프로급인 놈을 알고 있습니다.”

“빨대요?”

“아, 네. 한 번 꽂으면 척수까지 뽑아낸다고 해서 빨대예요. 그 인간이면 아주 박민재를 발가벗겨 올 겁니다.”

공 수사관이 자랑스럽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무튼, 최대한 불법적인 요소는 배제하고 자료 취합해 보세요.”

“네. 제가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참, 그나저나 영수증은 받아오십시오!”

“섭섭한데요. 변호사님,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뭐, 연말 정산이라도 받으시게요?”

공 수사관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뇨, 아뇨. 사무장님이야, 당연히 믿죠. 사무장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돈을 못 믿어서 그렇지!"

크크크, 나도 모르게 사악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에. 돈이 무섭긴 하…… 네? 아, 진짜 변호사님!”

공 수사관이 고개를 끄덕이다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진짜, 농담!”

나는 양 손바닥을 펼쳐 그를 진정시켰다.

* * *

일주일 후,

띠리리링.

기다리던 공 수사관의 전화였다.

“변호사님, 접니다.”

“네. 수사관님, 지금 어디세요?”

“네. 지금 영천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중인데요.”

“어떻게 됐습니까? 쓸만한 자료가 나오던가요?”

“변호사님! 빨대가 제대로 빨대를 꼽은 것 같은데요?”

경상북도 영천은 박민재가 내려간 그의 고향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보세요.”

점점 심장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빨대에게서 자료를 넘겨받았는데, 박민재, 이 인간 완전 생양아치네요.”

“양아치라뇨?”

“전화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지금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사무실 들어가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네. 빨리 들어오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