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승소할 수 없는 사건 (2)
<상앙 일보, 김정주 주필 집무실>.
보궐선거를 끝낸 후 한동안 찾아뵙지 못했기에 안부도 물을 겸 최근에 박 회장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관해 상의하고자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어서 와요. 김 검사, 아니지, 아니지! 이젠 김 변호사라 해야 맞나? 반가워요. 김 변!”
김정주 주필이 양팔을 뻗어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주필님!”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그럼,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선거 떨어진 사람이 뭘 하겠나. 그냥 쥐 죽은 듯이 글이나 쓰고 있다네. 뭘 그렇게 서 있어. 앉지!”
김정주 주필이 자리를 안내했다.
“네.”
“사실은, 주필님! 박엔정 박 회장한테서 연락이…….”
나는 박 회장이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에 초대한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그래? 그게 정말이야? 박 회장이 직접 전화를 했다고?”
김정주 주필이 눈동자를 위로 뜨며 의아해 했다.
“네. 며칠 전에 저에게 직접 전화를 주셨습니다. 음, 이번 주말에 자택에서 식사나 하자고 하시더군요.”
“뭐? 게다가 자택으로? 진짜야? 이거,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먼.”
김정주 주필이 놀란 눈을 끄게 떴다.
“네. 자택에서 식사하자고 하시더군요.”
“허허허, 이것 참! 놀랄 노자 군! 박 회장, 그 양반, 웬만해선 집으로 사람 안 들이는데… 김 변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나 보군! 아무튼, 놀라운 일이야!”
김정주 주필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긁어내렸다.
“일단, 직접 전화까지 하셨는데 거부하는 건 예의 어긋나는 듯해서 초대에 응하긴 했는데, 영 부담스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흠, 부담스러워할 것 없어. 자네를 집으로 초대했다는 건 그만큼 자네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거니까. 무조건 가! 박 회장이란 사람,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몇 안 되는 브레인이야. 권불십년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지지 않는 해야. 자네도 잘 알겠지만, 검사 시절에도 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소신대로 처리했잖아.”
“네. 저도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선배님이십니다.”
“게다가, 검사 생활 접고 로펌을 세운 후에도 정도를 걸으면서 성공한 몇 안 되는 법조인이라고! 물론, 지금의 박엔정이면 어떤 권력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공룡이 됐지만 말이야. 과거엔 여러 번 고비가 있었지. 그때마다 특유의 결단력으로 지금의 박엔정을 만들었어.”
“흠, 저도 법조계에서 신화로 남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런 박 회장이 자네를 집으로 초대했다는 것은 그가 그리는 큰 그림 속에 자네를 집어넣겠다는 뜻이 되는 거야. 반드시, 그 사람을 자네의 조력자로 만들어야 해. 자네도 지난번, 선거에서 느꼈겠지만, 정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박 회장만 자네가 가진다면 자네의 꿈을 이룰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줄 거야.”
“흠,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순히 저녁 식사를 위해서 저를 부르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당연하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면 뭔가 통과의례를 거쳐야겠지!”
“통과의례요?”
“흠, 내 생각엔 말이야. 박 회장이 자네에게 뭔가 제안을 할 것 같은데?”
“제안이오? 어떤…….”
“그야 나도 알 수가 없지. 하지만, 자네나 박 회장이나 접점은 하나뿐이잖나?”
“흠, 접점이라…….”
“미리 걱정할 건 없어! 만나보면 알겠지! 아무튼, 그 사람을 반드시 자네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
“참! 자네. 바둑은 좀 둘 줄 아나? 그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바둑이오? 음, 어릴 때, 아버지에게 배운 정도입니다.”
“잘 두나?”
“흠, 프로급은 아니지만 아마 5단 정도의 실력은 됩니다.”
“5단이라…… 그것참, 다행이군. 아무래도 하늘이 자네를 돕는 듯해! 아마도 박 회장이 바둑광이라지 아마?”
김정주 주필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박 회장 자택>.
멋진 집이군!
며칠 후 주말, 박 회장의 자택을 찾았다. 고즈넉한 처마가 유려한 곡선을 자랑했고 향긋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야생화가 흐드러진 정원, 잔잔한 물결이 이는 연못을 갖춘 아름다운 고택이었다.
“어서 오이소! 김 변호사!”
박 회장이 나를 보자 버선발로 나와 나를 맞이했다.
“네. 회장님!”
“퍼뜩, 안으로 드가입시더!”
개량 한복을 입은 수수한 차림의 박 회장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김 비서야, 뭐 하노? 퍼뜩, 손님 안 모시고! 우리 김 변호사님, 얼매나 시장하겠나? 얼른 내실로 모시그라.”
“아닙니다. 회장님!”
나는 과분한 환대에 당황스러웠다.
“이쪽으로 가시죠!”
정갈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김 비서라는 사람이 나를 내실로 안내했다.
“네.”
<박 회장 자택 내실>.
김 비서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내실엔 특급 요리사까지 초빙해 차린 예술 같은 요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스별로 나오는 갖가지 음식들은 말 그대로 산해진미(山海珍味)였다. 형형색색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었다.
“회장님, 이건 너무 과분한 것 같은데요.”
숟가락을 들기에도 부담스러운 음식들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와 예? 입맛에 안 맞는교? 다시 내오라 할까요?”
박 회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음, 먹겠습니다.”
“그라요? 어떻게, 음식들이 우리 김 변호사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이건 뭐, 음식이야? 예술이야?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음식들이 훌륭합니다.”
젓가락으로 산적을 들어 입에 넣자 음식이 입안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듯했다.
“참말잉교? 귀한 손님 모셔다가 결례를 범하면 어쩌나 얼매나 걱정이 되던지. 내가 가슴을 얼마나 졸였는지 아능교?”
껄껄, 허리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호탕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맘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호랑이의 그것이었다.
“야야, 김 비서야, 이만 상 내가그레이!”
“네 회장님!”
단순히 먹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사치스러운 음식들이었다. 어느새, 먹는 둥 마는 둥 2시간여가 흘러 가버렸다.
잠시 후,
“음, 우리 김 변은 취미가 뭔교?”
상을 물린 후, 박 회장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그냥, 시간 날 때, 책을 보거나 바둑을 좀 둡니다.”
딱히 취미랄 것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두던 바둑이 유일한 특기이자 취미였다. 프로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구력을 굳이 따지자면 아마 5단쯤 되는 실력이었다.
“참말잉교? 나도 바둑을 억수로 좋아한데이. 이왕 이렇게 내 집을 오신 김에 우리 대국 한 수 할까요? 시간 괜찮지요?”
김정주 주필의 말대로 박 회장은 바둑광이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흠, 내. 특별히 바쁜 일은 없습니다.”
“하모, 하모, 오늘 내가 운이 억수로 좋데이.”
박 회장이 김 비서를 불러 대국 준비를 했다.
몇 시간 후,
결국, 뜻하지 않게 대국이 시작되었고 박 회장이 두 판을 내리 졌다.
“허허허, 이거 참말로 어처구니없데이. 대마불사라 카드만, 어째 이런 일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 회장이 연신 다리의 위치를 바꿔가며 전전긍긍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김 변호사님, 딱! 한 판만 더 둘 수 있능교?”
박 회장이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검지를 내밀었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드디어 세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번 판의 판세는 확실히 박 회장이 유리해 보였다. 박 회장이 저돌적으로 중앙을 공략하며 밀고 들어왔다. 법정에서 승기를 잡으면 불도저처럼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는 그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밀리는 형국이었다. 어느새, 중앙 공격에 성공한 그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이긴데이! 이 정도면 확실히 내가 우세한 거 아이가?”
박 회장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공피고아(功彼顧我)! 소탐대실(小貪大失)!
법정에서는 최고의 승부사지만 바둑판에선 어쩔 수 없는 하수시군요! 바둑 판세 전체를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공격하시는군요. 그렇게 중앙을 탐하시니 지금, 우 하변과 좌 상변이 위태롭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듯 죽어있는 미생이군요. 회장님은 또, 지셨습니다!
툭, 나는 우 하변의 대마의 숨통을 끊어내는 한 수를 두었다.
“허허허, 이게 무슨 일이고?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데이. 분명 살았었는데…….”
당황한 박 회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刮肉取骨(괄육취골)! 이대도강(李代桃殭)!
내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취한다. 작은 것을 내주고 큰일을 도모한다는 바둑의 정석이지요. 회장님! 죄송하지만, 이번 판도 회장님이 이기기가 힘드실 것 같습니다. 결국, 나는 뒷심을 발휘하며 끝내기 단계에서 팻감을 늘리는 묘수로 기적의 반집 역전승을 거둬냈다. 겉보기엔 박빙의 승부였지만 사실 박 회장은 나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겉치레와 체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큰 병폐, 상대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일부러 져주고 싶지 않았다.
“허허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데이… 내가 우애 진 겁니꺼? 이 판은 정말 내가 이기는 줄 알았는데.”
박 회장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훔쳐냈다.
“…….”
“내가 졌습니다. 내가 한참 하수인 기라.”
박 회장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며 돌을 던졌다.
“아뇨,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회장님도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허허허, 빈말이라도 참말로 듣기 좋구먼, 김 변호사 실력이 프로급이다 안 하요! 그나저나, 김 변호사!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능교?”
박 회장이 바둑돌을 주워 담으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늙은이가 아들이 없어가, 우리 김 변이 아들멩키로 좋아가 그라는데, 인자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능교?”
박 회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상관없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시죠!”
“맞나? 정말이가? 참말로 대단하데이. 어디서 바둑을 배운 기가?”
박 회장이 바둑판을 치우며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후후후, 엄청난 친화력이다! 저 친화력에 저돌적인 추진력이 지금의 박엔정을 만들었겠지?
“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조금씩 배웠습니다.”
“맞나? 아버지가 참말로 바둑을 잘 두시는갑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데?”
“흠, 살아계셨으면 65세가 되셨을 겁니다.”
“아이고야, 내가 실례를 한갑다. 이를 우야면 좋노?”
박 회장이 안절부절못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참말로 비슷한 데가 많은 기라. 내도 우리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이가. 살아 있으믄 지금 김 변 정도 나이가 될 낀데…….”
어느새, 박 회장의 눈빛이 흐려졌다.
“…….”
“우리, 앞으로 잘 지내 보그래이. 동병상련 아이가?”
박 회장이 다가와 내 손을 부여잡았다.
“…….”
* * *
잠시 후,
“김 비서, 그 서류 좀 가지고 들어와!”
좀 전까지 진한 사투리와는 다르게 완벽한 표준어였다.
“네. 회장님!”
“수고했어. 그만 나가봐!”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서류봉투를 박 회장에게 건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김 변, 이것 좀 보게.”
박 회장이 좀 전과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나를 초대한 진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게 뭡니까?”
“음, 이 사건, 김 변이 맡아줬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