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이이제이(以夷制夷) (3) & 승소할 수 없는 사건 (1)
이번 공판 하루 전,
<정은 법률사무소>.
다음 날 열릴 공판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 장 검과 나는 공판 자료를 검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장 변, 할 얘기가 있어.”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나는 장 검에게 장준환 검사와 박 형사의 사이를 이간계로 멀어지게 한 사실을 자세히 설명했다.
“맙소사,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여간, 수년을 같이 일했지만, 선배님은 아직도 파악이 안 되네요.”
장 검이 약간은 놀란 듯 눈을 깜박거렸다.
“일단,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깨진 상황이야. 물론, 원래부터 믿음 같은 것은 없긴 했지만 말이야. 서로를 의심하며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야.”
“음, 그렇다면 박 형사는 최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장준환 검사를 물고 늘어지겠군요. 그래야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니 말이에요. 게다가 사망 추정 시각도 깨진 상황이고 지난번 재판으로 어느 정도 폭력 수사의 정황이 파악된 이상, 마냥 버틸 수도 없으니 말이에요. 다행히 내일 재판은 좀 수월해지겠네요.”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사실, 지금까지도 수사 과정에서의 무리한 강압 수사는 종종 있어 왔어. 경찰 내에서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일이니까, 박 형사로서도 강압 수사가 있었다고 폭로하는 일은 감당 못 할 치명적 타격은 아니야. 문제는 얼마나 사건의 중심에서 멀어지냐인데, 아무튼, 그도 뭔가 승부수를 가지고 있긴 할 거야.”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장준환 검사가 문제인데, 그 성격에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인간,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은 도사견이에요.”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물에 갇힌 물고기 신세인데……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쫓아버렸다는 고사가 있잖아. 이게 바로 죽은 제갈공명이라고!”
나는 장 검에게 빈 USB를 내밀었다.
“근데, 그건 사실 비어있는 거잖아요.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도 뭔가 확실한 증거를 내밀어야 하는데, 비어있는 USB를 증거로 내밀 순 없잖아요. 그게 가장 큰 문제예요.”
“그러니까, 장정환 검사가 스스로 증거를 오픈하도록 해야지. 장정환 검사가 녹음파일을 가지고 있어!”
“네? 노, 녹음파일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드르륵, 장 검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래. 분명히 여우 같은 장정환 검사가 박 형사와 나눈 대화들을 녹음한 파일을 보관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그가 스스로 파일을 깔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재판을 몰고 가야 해.”
“흠, 도대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선배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뭐, 그냥 내 직감이 그래! 아닌가? 꿈에서 봤나? 아무튼, 장정환 검사는 파일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장 변은 법정에서 박 형사가 장정환 검사와 맞서는 대치 정국으로 몰고 가야 해. 그래서 서로 폭로전을 하도록 몰고 가야 한다고! 박 형사 역시, 닳고 닳은 인간이야. 박 형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준비를 해둔 것이 있을 거야. 밑밥은 내가 뿌려뒀으니까 장 변은 침착하게 진술을 유도하기만 하면 돼!”
“밑밥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또 뭐를 하신 거예요?”
“…….”
나는 그녀를 향해 말없이 웃어주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물어본 내가 바보지! 당연히 말 안 해줄 걸 알면서 뭘 물어? 맞죠?”
내가 아무 말 없이 웃자 장 검이 도리질하며 혀를 내둘렀다.
“곧, 알게 될 거야.”
며칠 전,
[첫 번째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장정환 검사를 만나고 나오자 킹 메이킹 시스템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상세 힌트를 확신하시겠습니까? Y/N]
“말해 뭘 해? 당연한 것 아냐? 힌트를 보여줘!”
지이이잉.
킹 메이킹 시스템이 상태창에 띄운 화면은 장정환 검사의 서재였다.
“뭐, 뭐지? 혹시, 장정환 검사가 녹음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나는 뚫어지도록 상태창을 응시했다.
장정환 검사가 자신의 서재에 숨겨둔 금고에서 USB 메모리를 꺼내 컴퓨터에 꽂고 모니터를 응시하는 모습이었다. 모니터에 재생된 화면은 장정환 검사가 박 형사와 무언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소리는 어떻게 된 거야? 소리가 안 들리잖아.”
[…….]
“웁스, 역시 이번 힌트는 여기까지인 건가? 또, 미션을 해결해야 하나?”
[죄송합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미션을 제시할까요?]
“아니, 그럴만한 시간이 없어!”
전혀 상관없다!
잠시 난감했지만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상태창에 나온 장소는 <로마의 휴일>! 두 사람의 비밀 아지트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불 보듯 뻔한 것 아닌가?
중요한 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아니라 장정환 검사가 이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포인트다. 결국, 킹 메이킹 시스템이 내게 보여준 내용이 저 파일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드시, 장정환 검사가 법정에서 스스로 저 파일을 폭로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 어쩌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나는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잡을 것이다.
<시내 모 카페>.
나는 오랑캐를 잡기 위해 또 다른 오랑캐를 만나야만 했다.
“뭐…… 뭐라고요? 법정에서 장정환 검사의 비리를 다 까발리라고요? 그렇게 되면 저도 죽습니다. 절대,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해요.”
박 형사가 고개를 흔들며 완강히 거부했다.
“아뇨, 박 형사님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전부 오픈하셔야 할 겁니다. 당신은 지금 죽어야 사는 상황이에요.”
“주, 죽어야 살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박 형사의 눈망울이 마구 흔들렸다.
“흠, 상부의 명령에 의한 강압 수사로 정직을 당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 10년쯤 교도소에서 요양하시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왜 교도소를 갑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십니까?”
“흠흠흠, 어휴. 진짜 많이도 해 드셨더군요. 공직자 뇌물죄 내용이 어떻게 되더라. 아주 적금을 붓고 계셨구먼. 지금까지 수혈받은 돈이 2억이 넘는군요. 이 정도면 적어도 5년은 사시는데 부족함이 없겠어요.”
나는 장부를 뒤적이며 박 형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목이 타는지 박 형사가 연신 입술에 침을 묻혔다.
“이 사람, 잘 아시죠?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을 테고.”
툭, 나는 테이블 위에 로마의 휴일 영업이사 김상돈이 작성한 비자금 장부를 내밀었다.
최근 3년간 뒤를 봐주는 것을 대가로 약 2억 원 상당의 금품과 현금을 상납받은 내역이었다.
“이, 이걸 어떻게….”
박 형사가 손톱으로 입술을 뜯어내며 안절부절못했다.
“게다가, 증거인멸에 공문서 위조, 위증교사까지 이거, 잘 아시겠지만, 다 합하면 아마도 아드님이 군대 가기 전까지는 나오기 힘드실 텐데. 아! 아드님이 초등학교 3학년이 맞죠?”
테이블 밑으로 박 형사의 다리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변호사님, 자, 잠시만요.”
벌컥벌컥, 목이 타는지 박 형사가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조, 좋습니다. 제가 증언하죠. 다만, 제가 법정에서 증언하면 저도 반대급부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박 형사가 결심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고정했다.
“아, 뭐 없냐, 이건 가요? 살려는 드리지!”
후후후, 무척이나 해보고 싶던 영화 속 대사였다.
“네? 그게 무슨…….”
박 형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뇨, 아뇨. 농담입니다. 이번 공판에서 제대로 증언해주시면 제가 진범을 잡으실 기회를 드리죠. 그때까지 이 모든 사항은 저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왜요? 이 정도 가지고는 부족하십니까?”
“그게…….”
“그리고 박 형사님 스스로 자수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일단 범인 검거에 최선을 다해보세요. 공을 세우시면 누가 압니까? 정상참작이 될지? 아, 그리고 원하시면 제가 변호를 맡아 줄 수는 있을 것 같군요!”
“벼, 변호사님! 살려주십시오!”
박 형사가 덥석 내 손을 움켜잡았다.
“제가 박 형사님을 어떻게 살려드립니까? 다만, 제가 가지고 있는 녹음파일에 지금까지 확보된 이 모든 자료가 오픈되면 박 형사님은 회복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재기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법정에서 증언하신 후에 자수하시면 제가 책임지고 변호를 맡아드리죠. 하지만. 실형은 피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범죄를 저질렀으면 죗값을 받는 것은 인지상정이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박 형사의 손이 마구 흔들렸다.
“TV 광고였던가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현명한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 * *
한 달 후,
“피고, 서호영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한다!”
“호영아! 이제는 살았다! 내 새끼!”
재판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리자 서장수가 쉰 목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항소심 결과는 예상대로 나와 장 변의 압승이었다. 결국, 서호영은 무죄를 선고받고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정환 검사 사건으로 쑥대밭이 된 검찰도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완전한 무죄가 선고된 셈이었다.
“변호사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서호영의 아버지, 서장수가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버님, 이러지 마세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서장수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변호사님은 우리 가문의 은인이십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앞으로 아드님과 행복하게 사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저희 성의라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십시오.”
서장수가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돈 봉투를 꺼내 들었다.
“아닙니다. 아버님, 넣어두세요. 두 분이 행복하게 사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아드님, 그동안 고생했는데 그 돈으로 몸보신이나 좀 시켜 주세요.”
“그래도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은혜를 모른 체합니까? 사채도 탕감시켜주시고, 정말 신세를 너무 져서….”
“정말, 괜찮습니다. 이번 재판 덕에 소문이 나서 의뢰인이 넘쳐나요! 전부, 아버님이 저를 믿고 사건을 맡겨주신 덕택입니다.”
나는 나무 거죽처럼 말라비틀어진 그의 손을 꼭 쥐었다.
* * *
<남부 경찰서>.
“게임 머니를 마련하기 위해 김은혜 씨를 잔인하게 죽인 겁니까?”
“김종국 씨, 피해자 가족에게 전할 말이 없습니까?”
수많은 기자가 호송 줄에 묶인 두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나중에 공식적인 브리핑을 하겠습니다. 모두, 좀 비켜주세요!”
담당 경찰이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올라타!”
경찰이 냉소적인 말투로 말하자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눌러쓴 두 명의 남자들이 황급히 호송차에 올라탔다.
내가 박 형사에게 건네준 자료와 수사팀의 노력으로 김은혜를 죽인 진범이 체포되었다. 예상대로 김성수의 친구들인 김종국, 한현민이었다. 그들은 부족한 게임 머니를 마련하기 위해 김성수와 공모해 XX 모텔로 잠입, 자고 있던 김은혜를 살해하고 그녀의 지갑에서 현금과 신용카드 3장을 훔쳐 달아났었다.
피시방을 주변으로 끈질긴 탐문 수사와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조사한 경찰은 결국, 그들의 시내 모 피시방에서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김종국과 한현민은 살인죄가 적용되었고, 김성수는 위증죄에 증거인멸, 살인방조죄가 적용되어 수감되었다.
일주일 후,
<정은 법률사무소>.
“장 변, 의뢰인 미팅 후에 퇴근해요!”
[네. 선배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그렇게 사건이 정리되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 승소한 덕에 여기저기서 우리를 찾는 의뢰인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띠리리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김정환 변호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누구시죠?”
“내는 박엔정의 박종수 회장이오.”
박엔정의 박종수 회장?
나는 재빨리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지난번 박엔정 시니어 변호사, 홍정호가 건네준 명함에 적인 핫라인 번호와 같은 전화번호였다.
“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신지….”
“음, 내가 김정환 변호사님하고 식사를 한번 할라카는데, 괜찮겠습니꺼?”
군데군데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말투였다.
“글쎄요. 제가 특별히 회장님을 만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껄껄껄,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는갑네.”
“그건 아니지만, 제가 회장님과 식사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허허, 듣던 대로 억수로 까칠하네. 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현업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늙은이라, 요즘 법조계 돌아가는 상황도 궁금하고 말동무나 좀 부탁하려 합니데이.”
국내 최고의 로펌 회장이 법조계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단 말인가? 그저 나를 만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튼, 검찰 대선배이지 한국의 법조계를 좌지우지하는 수장의 제안을 끝까지 뿌리칠 수는 없었다.
“흠, 좋습니다. 그렇다면 식사는 제가 대접하는 것으로 하지요.”
“허허허, 빈틈이 없데이. 그라모 이라면 우야겠습니꺼. 밖에서 먹는 음식은 값만 비싸고 하니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괘안하겠어요?”
“흠,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하모, 하모, 그라믄 나야 영광이제. 고맙소. 김 변! 그라모, 이번 주말 어떻는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국내 최대의 로펌 박엔정의 회장이 나에게 직접 전화를?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