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사람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마라 (1)
<정은 법률사무소>.
“선배님, 일단은 우리가 승기를 잡은 것 같아요.”
장 검이 잔뜩 고무된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될 듯해. 저쪽에서도 다음 공판 때는 칼을 갈고 나올 테니까. 아마도 장준환 검사가 1심을 너무 맹신해서, 이번 공판을 너무 안일하게 준비한 듯해.”
“맞아요. 장준환 검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죠. 그래도 일단 사망 추정 시각이 깨져버렸으니 쉽지 않을 거예요. 판례를 보더라도 사망 추정 시각이 깨진 재판에서 검사 측이 이긴 재판이 없었잖아요. 아 맞다! 선배님 케이스만 빼고!”
장 검이 나를 보며 상큼한 보조개를 피워 올렸다.
“아무튼, 우리도 다음 공판을 철저히 준비하고!”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김성수가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는 말인데요.”
장 검이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음, 일단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지. 온라인 게임이 빠진 김성수는 아침에 서호영이 7시 10분에 모텔을 빠져나가자 친구들과 모의해 김은혜가 혼자 있는 틈을 타, 금품을 노리고 침입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지. 결국, 김은혜가 격렬히 반항하자 당황해 우발적으로 죽인 것으로 보고 있어.”
“맞아요. 일단, 김성수의 친구들이 PC방을 나선 시각이 7시 20분경으로 서호영이 빠져나가자마자 바로 나왔어요. 걸어가는 방향은 분명 모텔 쪽이었고요. 그게 맞는다면 모텔엔 적어도 7시 반에는 도착했을 테고 모텔 주인이 10시에 출근했으니까 2시간 반 사이에 범행을 저질렀겠죠. 범행을 저지르기엔 충분한 시간이에요.”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지. 확실하진 않지만, 모텔 CCTV도 김성수가 고의로 고장을 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
“나쁜 놈들! 이놈들, 다 집어처넣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장 검이 흥분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음, 장 변! 진정하지. 우리는 변호사지 검사가 아니야. 일단은 다음 공판 때는 검찰과 경찰의 가학 수사 여부를 밝혀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흥분한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렇긴 하지만, 놈들을 이대로 둘 순 없잖아요? 게임머니 마련을 위해 사람을 죽이다뇨.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물론, 당연하지. 죄를 지었으면 그만한 죗값을 받게 해야지.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치, 또 혼자만 알고 있는 건가요?”
장 검이 입술을 내밀며 토라졌다.
“그냥, 그게, 아직 확실하진 않아서…….”
이럴 땐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 상책이다.
“아무튼, 진짜 너무 해요!”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 열려있어요!”
그 순간, 누군가가 노크했고 장 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 톤을 높였다.
“어? 어…… 어? 공, 공 수사관님?”
“안녕하세요. 김 검사님!”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순천지청에서 함께 근무했던 공 수사관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는 웬일로 오신 겁니까?”
나는 뜻밖의 그의 등장에 어리둥절했다.
“왜긴 왜입니까? 앞으로 여기서 일하려고 왔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수사관님이 왜 여기서 일을…….”
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장 검으로 향했다.
“놀라셨죠? 공 수사관님이 저희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우리도 사무장님이 필요하잖아요.”
“뭐야? 그럼 장 변은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뭐, 이제 말씀드리려고 했죠. 아무튼, 우리도 베테랑급 사무장님을 영입했으니 좋은 거 아닌가요?"
장검이 공 수사관을 향해 윙크했다.
“그, 그렇긴 한데, 순천에서 멀쩡하게 일하고 계시는 분을……”
“괜찮습니다. 검사님!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가 허구한 날 서울에 가자고 노래를 불러서 이참에 내려온 겁니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 했잖습니까?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올라왔어라. 음, 사무실이 생각보다 솔찬히 후지구마이….”
흐흐흐, 공 수사관이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며 코끝을 찡그렸다.
“장 변, 수사관님이 사무장으로 와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고맙긴 하지만 우린 아직 재무적으로 안정…….”
공 수사관이 들을까, 목소리 톤을 낮춰 장 검에게 속삭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뭘 알아서 한다는 거야?”
“‘정은’의 ‘은’ 자는 제 이름이기도 해요. 정은 법률사무소는 선배님만의 사무실이 아니잖아요? 지금부터, 재무이사는 저니까 아무 말 말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장 검이 검지로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래도……”
“쉿! 아무 말 말라니깐요?”
“아, 알았어!”
“아따, 두 분은 뭔 중헌 이야긴디 그라고 쏙닥거려쌌소?”
공 수사관이 눈치를 듯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럼, 사실 곳은 정하셨어요?”
“아네. 처형이 옥수동에 살아서, 그쪽 동네에 낡은 빌라 하나 얻었습니다. 그나저나 서울은 집값도 허벌나게 비싸 부네요. 코딱지만 한 집이 뭐 한다고 그리 비싸데. 그 정도면 순천서는 대궐에서 살겠구먼.”
공 수사관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서울이 좀 그렇죠. 그나저나 수사관님 말투가 많이 변하셨네요? 원래 사투리가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아, 그거요. 앞으로 서울 살면 평생 못 쓸 것 같아서 한번 실컷 써봤습니다. 어떠요? 지 사투리가 괘안합니까?”
흐흐흐, 공 수사관이 특유의 표정으로 느물거렸다.
“야야! 참말로 구성지구만이라.”
장 검이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취하며 그의 말에 맞받아쳤다.
하하하.
흠, 공 수사관님이라면 사무장으로 제격이긴 하지!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온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아무튼, 비록 순천지청에 근무했지만, 전국구 마당발인 그의 합류로 더없이 든든했다.
<며칠 후, 정은 법률사무소>.
박엔정의 수석 시니어 변호사, 홍정호가 나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다.
“홍정호입니다.”
“네. 김정환입니다.”
“지난번 공판,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표님과 함께 참관했는데 속이 후련하더군요. 저절로 탄성이 나왔습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홍정호가 지난 재판 얘기를 꺼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입니다.”
“역시, 역시,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에 신중함까지 김 변호사님은 뼛속 깊이 타고난 변호사시군요.”
하하하, 홍정호가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웃었다.
“재판 얘기를 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흠, 옛말에 ‘싸워서 이기지 못할 바엔 내 편을 만들어라!’란 말이 있죠, 사실, 지난번에 우리가 김 변호사한테 두 번이나 패소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그때 저희 로펌 입장에서는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저는 단지 법대로 처리했을 뿐입니다.”
“암요. 그걸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대표님은 김 변호사를 눈여겨보고 계셨습니다.”
“…….”
“김 변호사! 초원의 늑대가 왜 강한지 알아요?”
“…….”
“초원의 늑대는 한 번 사냥에 실패하면 두 번 다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더군요. 왠지 아십니까? 두 번의 실패는 곧 굶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실패? 지난번 보궐선거를 말하는 건가?
“음, 말씀을 빙빙 돌리지 마시고 용건만 간단히 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김 변호사! 우리와 함께합시다. 우리 회장님과 대표님은 김 변호사의 야망을 읽고 있어요. 우리와 함께하면 김 변호사가 지금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희가 김 변호사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일단, 이번 사건부터 우리 로펌에서 해결합시다. 대표님은 김 변호사를 시니어 변호사로 모실 생각입니다. 물론, 계약조건도 역대 최고로 대우해 줄 생각이고요. 이건 정말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대우입니다. 이번 사건부터 우리 로펌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검찰과 경찰을 동시에 상대하려면 조직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김 변호사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 사람들 도대체 어디까지 알아보고 온 거야? 우리가 검경의 폭압 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건가?
“좋습니다. 그럼 계약금은 얼마나 주실 생각입니까?”
“음, 원하시는 만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는 만큼이라… 한 천억쯤, 가능할까요?”
나는 어처구니없는 금액을 불러 로펌에 들어갈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려 했다.
“천억이요? 역시 듣던 대로 배포 한번 크군요. 암요.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이라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죠. 제가 회장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하하하, 홍정호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전혀 당황하지 않는 표정과 말투, 그 역시 보통은 넘는 위인이었다.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일단, 못난 저를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로펌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혼자 힘으로 해보고 싶군요.”
사실 그의 조건이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이게 다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부터, 권력과 돈에 얽매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지 마시고 좀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홍정호가 내 팔목을 잡았다.
“아뇨. 앞으로는 더 찾아오지 마십시오. 제 의지는 확고합니다.”
나는 확실한 못을 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흐음, 일단 알겠습니다. 우리 박엔정의 문은 활짝 열려있으니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그러면,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참, 이거 받으시죠.”
홍정호가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름도 상호도 없이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전화번호만 적혀있었다.
“이게 뭡니까?”
“음, 이건 우리 로펌 핫라인 번호입니다. 회장님과 대표님께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 번호죠. 회사 내에서도 주요 중역들 몇몇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겁니다. 아무튼, 이 명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회장님께서 김 변호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흠, 아… 네….”
* * *
그날 이후, 박엔정으로부터 어떠한 연락과 접촉도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렀고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두 번째 공판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김정환의 오피스텔>.
띠리리링.
아침부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공 수사관의 전화였다.
“수사관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변호사님, 아무래도 제가 왕건이를 하나, 건져 올려낸 듯합니다.”
“왕건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음,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안테나를 세워 찾아낸 정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