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화] 누명(陋名) (1)
<정은 법률사무소>.
“어르신,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와 장 검은 빛의 속도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들놈 때문에 왔습니다.”
겨울인데도 얇은 점퍼를 입고 입는 모습이 추레해 보였다. 쩍쩍 갈라진 손등과 깊이 팬 주름이 안쓰러워 보이는 노인이었다.
“아드님이오?”
“네. 제 아들놈의 변호를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수척한 모습이 맘고생이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르신,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보십시오.”
나는 의자를 남자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아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네. 우리 아들놈이 지금 살인누명을 쓰고 수감되어 있어요. 하지만, 누명을 쓴 겁니다. 우리 애는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호영이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겁니다!”
아들의 무죄를 항변하는 표정에 안타까움과 진실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네? 어르신, 사… 살인이라고… 요?”
남자의 ‘살인’이라는 말에 장 검이 화들짝 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네. 하지만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흐음, 남자가 얼어붙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제 아들놈이 은혜를 죽일 리 없어요.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남자가 천천히 아들과 연관된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이름은 서호영. 30세, 직업은 평범한 일반 회사원이다.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김은혜를 목 졸라 교살한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남자는 우리에게 그의 상고심 변호를 맡아달라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살인사건은 형사사건 중 가장 1심을 뒤집기 어려운 사건이고 일반적으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들이 피하는 유형이었다. 당연히, 남자는 수많은 로펌과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사건을 의뢰했지만 거절당하고 이곳에까지 온 것이 틀림없었다.
“음, 어르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번 맡아보기…….”
하지만, 그의 눈빛이 너무도 간절했기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사건을 수임하기로 했다.
“자… 잠깐만요! 어르신, 죄송하지만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희가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요. 잠깐이면 됩니다. 어르신!”
“네에. 알겠습니다.”
남자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선배님! 전, 반대예요. 이 사건 절대 맡으시면 안 돼요. 절대요!”
남자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장 검이 단호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그렇게 기다리던 첫 의뢰인이잖아. 왜? 수임료 때문에? 그건 말이야…….”
“아뇨. 그것도 그거지만 1심에서 이미 유죄가 인정된 사건이에요. 내용을 들어보니 뒤집기는 거의 불가능해요. 게다가, 변호사 개업하고 첫 사건이라고요. 첫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선배님도 잘 아시잖아요! 첫 사건에 패소하면 앞으로 우리, 일하는 것 힘들어져요. 진짜 이번 사건 뒤집기 불가능하다고요! 안 돼요. 정말!”
장 검이 단호한 표정으로 연신 도리질을 했다.
“흠, 장 검! 내가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데, 우리가 돈 벌려고 변호사 개업한 거 아니잖아. 좀 더 자세를 낮추고 소외된 계층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이 일 시작한 거 아냐? 그런데 우리가 사람 가려가면서 변호하면 우리가 그렇게 욕했던 사람들과 뭐가 달라? 만약에 진짜로 저분의 말이 맞는다면 어쩔 거야? 30살이면 아직 꽃도 피지 못한 청춘인데, 20년을 감옥에서 썩는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1심에서 유죄가 확정됐는데도 이렇게 항소를 하기는 쉽지 않아! 분명, 뭔가 억울한 면이 있을 거야. 그리고 어르신의 눈빛 봤지? 저런 눈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못 해.”
“…….”
“물론, 장 검의 말대로 서호영이 살인자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인이라도 해보자! 일단, 공판자료 좀 살펴보고 그때 가서도 유죄가 확실하다면 나도 이 사건을 맡을 이유는 없어. 유죄를 무죄로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흐음.”
“일단, 우리가 맡아보자. 그리고 누가 그래? 뒤집기가 불가능하다고?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 1심을 뒤집은 판례도 수없이 많고 무엇보다 내가 얼마 전에 그 일을 해냈잖아. 장 검, 벌써 잊은 거야?”
나는 장 검의 손을 잡고 살며시 웃어주었다.
“아무튼, 저 황소고집을 내가 무슨 수로 꺾어! 알았어요. 알았어!”
후,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장 검이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르신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씀드려.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
“네에.”
잠시 후,
“흠, 어르신, 저희가 이번 사건 맡아보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이미 포기하고 있었는지 어두웠던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럼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 계세요. 저희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임료를 많이….”
꿀꺽, 남자가 침을 삼켜 넘기며 머뭇거렸다.
“수임료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가능하신 만큼만 주시면 돼요. 정 안되시면 나중에 여유 되실 때 주셔도 됩니다.”
“네에.”
남자가 힘없이 대답했다.
“흠, 정 힘드시면 안 주셔도…….”
선배님!
장 검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눈을 흘겼다.
“감……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성의 표시는 하겠습니다.”
남자는 장 검의 눈치를 살피더니 벌떡 일어나 연신 허리를 숙였다.
* * *
<서울남부지방법원>.
일단,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와 장 검은 법원을 찾아 서호영의 변호를 맡았다고 공지하고 공판 자료를 열람했다.
“일단 공판 자료부터 열람해보자고! 자료를 살펴보면 대략 윤곽이 나오겠지!”
“네에.”
여전히 못마땅했는지 장 검의 대답이 시원찮았다.
“장 검, 지금이라도 하지 말까? 장 검이 하지 말라면 안 할게!”
나는 장 검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헐, 됐네요. 됐어!”
장 검이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포기한 모양이었다.
“어? 장준환 검사? 이 사람이 이 사건의 담당 검사인가?”
장 검이 공판 자료를 넘겨보다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해 했다.
“왜? 아는 사람이야?”
“네. 저랑 연수원 동기예요. 저보다 나이는 4살인가 5살 많은데 야망이 엄청난 사람이거든요. 이 사건 담당 검사가 장준환 검사였구나.”
장 검이 공판 자료를 넘겨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은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다.
“어떤 사람인데 표정이 그래?”
“음, 뭐랄까…… 굉장히 고지식하고 승리욕이 강한 사람이에요. 한 번은 연수원 때 모의재판을 열었는데 패소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냥 단순한 모의재판을 항소한다고까지 했으니깐 말 다 했죠. 세상 첨 봤어요. 그런 사람!”
장 검이 몸을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음, 검사라면 뭐, 그 정도 승리욕은 있어야지!”
“헐, 선배님이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때 장준환 검사가 피고 측 변호인을 맡았었는데 피고가 12세 여아를 성폭행한 30대 남성이었어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내세워 무죄를 주장했었거든요. 12세 여아를 성폭행한 파렴치한에게 무슨 근거와 논리가 있을 수 있었겠어요. 근데 그 사람은 오직 재판에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죠. 그 사람이 무죄를 증명한다고 내세운 논리를 보면… 어휴, 지금 생각해봐도 소름이…….”
장 검이 손바닥으로 양팔을 연신 문질렀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군.”
“그나저나 이 사람이 담당 검사면 정말 이 사건 쉽지 않겠는데요? 느낌이 별로 안 좋아요. 어휴, 이 인간 얼굴을 또 봐야 한다니 끔찍해요. 끔찍해!”
“그럼 포기할까?”
슬쩍 장 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진짜! 자꾸 간 보실래요? 나도 오기가 있죠. 뭐, 이렇게 된 이상 한번 붙어보는 거죠. 연수원 때 당한 것도 있고 이참에 리벤지 매치 한번 제대로 붙어보죠, 뭐.”
장 검이 양 주먹에 힘을 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순간, 살짝 팬 그녀의 보조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나, 상큼한 그녀였다.
예쁘네!
“…….”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얼굴에 뭐 묻었나요?”
장 검이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아냐, 아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공판 자료나 검토해 보자고!”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쁜 손! 하마터면 그녀의 볼에 손을 댈 뻔했다. 나는 공판 자료를 들어 올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싱겁긴!”
잠시 후,
“음, 이거 빠져나갈 방법이 없겠는데요? 빼박이에요. 누가 봐도 명백히 서호영이 범인이잖아요!”
공판 자료를 검토한 장 검이 비관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그 판단은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서호영이 여자친구와 모텔에 들어간 시각은 12월 5일 밤 11시, 약간의 술을 마신 두 사람은 함께 모텔에 투숙했고 다음 날 아침 7시 서호영은 혼자서 모텔을 빠져나갔다. 당시 모텔 CCTV가 고장 났긴 했지만, 모텔 주인과 직원이 그가 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전날, 서호영이 직원에게 아침 8시에 모닝콜을 해달라고 요청했었지만, 직원이 실수로 오전 7시에 모닝콜을 했다는 특이사항까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진술은 신빙성이 있었다. 후에 서호영이 오전 11시에 다시 모텔로 돌아와 여자친구인 김은혜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었다.
“모든 정황이 서호영을 범인이라고 가리키고 있어요. 국과수 감식 자료를 보면, 김은혜의 사망 추정 시각은 새벽 3시에서 적어도 새벽 5시예요. 그 시간에 두 사람은 모텔에 투숙해 있었고 같은 방에 들어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에요. 더 볼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장 검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음, 그래도 몇 가지 미심쩍은 것들이 있어. 자봐! 살해 현장에서 서호영의 것이 아닌 체모가 발견됐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남아 있잖아!”
나는 공판 자료를 펼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뇨. 그건 숙박업소의 특성상 그럴 수가 있어요.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체모는 충분히 남아 있을 수 있고 외부 흔적도 마찬가지예요. 그 정도 가지고는 서호영의 무죄를 절대 입증할 수 없죠.”
장 검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
“게다가, 살해 동기도 뚜렷해요. 두 사람은 결혼을 전제로 5년 넘게 사귀고 있었어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죠. 김은혜의 집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정황상 김은혜 역시, 점점 사랑이 식어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서호영은 계속해서 박윤정에게 결혼을 재촉했겠죠? 그녀가 망설이며 차일피일 대답을 미뤘고 추측건대 사건 일도 두 사람은 그 문제로 심하게 다퉜던 거 같아요. 여기 보세요! 방 주변에서 큰 소리가 났다는 증언이 있잖아요.”
“흠, 그렇군.”
장 검의 말대로 사건 일 두 사람이 다툰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었다.
“결국, 김은혜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서호영이 술김에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장 검의 추론은 논리적으로 타당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녀와는 달랐다.
어쩌면 서호영은 범인이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장 검! 장 검이 놓친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놓쳐요? 뭘요?”
장 검이 나를 쳐다보며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