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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님, 정의구현 가신다-108화 (108/170)

# 108

[108화] 이 길이 아니라면 (2)

<신민당 당사>.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나는 여의도에 있는 신민당 당사를 찾았다.

똑똑똑!

“김정환입니다.”

“어서 와요. 김 부장님!”

조민영이 환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불빛을 받은 대머리가 번들거렸다. 그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걸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김정환 검사!”

당 대표 서영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내 전화를 받고 미리 와있었던 모양이었다.

“김정환입니다.”

“자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앉읍시다.”

조민영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네.”

“이번 재판 정말 속 시원하더군요. 언론도 난리가 났어요. 지금 김정환 검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더군요. 역대 이래로 이런 재판은 처음이었어요. 대단하십니다. 김정환 검사!”

자리에 앉자마자 서영찬 대표가 재판 얘기를 꺼냈다.

“음, 그냥 법대로 처리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사탕발림이 귀에 거슬렸다.

“저도 정말 감동이었어요. 김정환 검사님 같은 분이 검찰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이제 그동안 미뤄왔던 검찰 개혁도 머지않았습니다.”

조민영이 고무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도대체 검찰은 무슨 일을 이렇게 처리하는지 모르겠군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듯합니다. 이런 영웅을 김천으로 발령하다니요.”

그는 이미 내 발령 소식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민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웅? 누가? 내가?

나는 영웅이란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영웅이란 단어가 듣기 거북하군요. 저는 그냥 법대로 처리했을 뿐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당연히 그 죗값을 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요.”

나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아! 아!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난 그냥, 언론에 나온 워딩을 그대로 쓴 거라. 생각 없이 한 소리니 너무 괘념치 마세요.”

조민영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당황했다.

“…….”

“흠, 그나저나 김천으로 내려가기로 하신 겁니까? 말이 안 되는 인사인데.”

“네. 위에서 결정한 일을 제가 싫다고 안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흠, 그러시군요. 이미 결정하셨다니 더 늦기 전에 우리도 김 검사에게 제안해야겠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김정환 검사님, 우리 당에 입당해 주십시오. 우리 당은 너무 정체돼 있어요. 김 검사님처럼 패기만만한 젊은 피가 필요합니다. 정체된 우리 당에 활기를 넣기에는 김 검사님만 한 분이 없다는 것이 당론입니다.”

잔뜩 고무된 표정으로 서영찬 대표가 침을 튀며 말했다.

흠, 최근 연운정 게이트가 터지고 특검이 가동되면서 여론의 흐름은 차가울 정도로 여당에서 급격히 멀어지고 있다. 최근 여당의 지지도가 한 자릿수로 떨어지면서 그 덕택에 신민당이 어부지리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심이 신민당을 지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흔한 말로 도긴개긴 정국이었고 대안이 없으니 신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50% 가까이 치솟은 신민당의 지지도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거품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 여당, 검찰과 대척점에 서 있는 나는 그들이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한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통해 또 한 번의 반사이익을 보려는 것이었다.

“글쎄요.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당황스럽군요.”

그들의 제안이 달가울 리 없었다.

“아아,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고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네에.”

“다만, 3개월 후에는 서울 동초갑 보궐선거에 우리 당 후보자로 저는 김정환 검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당 후보로만 나서준다면 당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겠습니다.”

허허허, 서영찬 대표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방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뭐? 동초갑 보궐선거? 동초갑은 최근 단 한 번도 야당이 이겨본 적이 없는 여당의 아성이었다. 반대로 야당의 무덤이었다. 중산층 이상의 보수적인 성향의 유권자가 대부분인 곳으로 진보주의 성향 후보자는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이었다. 원래 이곳에서만 내리 3선에 성공한 김덕수 의원의 지역구였으나 최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의원직을 상실해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아무리 여당이 수세에 몰린 정치 판국이라 할지라도 동초갑은 야당으로서는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나보고 가서 죽으라는 뜻이군!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죽을힘을 다해 싸워 상대에게 상처라도 입히라는 뜻!

“…….”

“흠, 상당히 어려운 지역이긴 하지만 지금의 김 검사의 역량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네만.”

해볼 만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야당 득표율이 10%도 나오지 않는 곳이 해볼 만하다는 뜻인가? 그럼 당신들이 나가지, 왜 나를 끌어들이려 하는가?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으니 나를 끌어들이는 거겠지.

“…….”

그들의 느물거림이 역겨웠다.

내가 요즘 매스컴에 오르내리니 나를 이용해 바람이라도 일으켜보자는 심산! 선거에 이기든 지든 이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어차피 잡을 수 없는 지역구니까…… 하지만 적장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카드!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자들은!

“흠, 쉽게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 그렇죠. 당연히 시간을 드려야죠. 다만, 시일이 촉박하니 최대한 빨리 답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만간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식전이시면 같이 나가서 식사라도? 근처에 좋은 한정식집이…….”

조민영 원내대표가 슬쩍 나를 쳐다봤다.

“아뇨. 괜찮습니다.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아아, 그러신가요? 거기가 맛이….”

식사 제안 거절이 민망했는지 얼굴이 벌게졌다.

“실례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좀 섭섭한데….”

조민영 원내대표가 서영찬을 쳐다보며 난감해 했다.

“아, 그러시죠.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충분히 생각하시고 연락 주십시오.”

조민영이 휴대전화를 들어 음식점에 전화하려 하자 서영찬 대표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

“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조금의 차이도 없는 듯했다.

* * *

<경기도 용미리 추모의 집>.

아버지!

김천으로 내려가기 전에 지금까지 중앙지검 생활도 정리할 겸, 하루 휴가를 내 아버지가 계신 용미리 추모의 집을 찾았다. 너무도 그리운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눈이 들어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 어머니가 다…… 녀 가셨구나!

아직도 은은하게 향기가 살아있는 국화가 아버지의 영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근래에 어머니가 다녀가셨던 게 틀림없었다. 그 순간 한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북받쳐 올라 목이 메었다.

저, 아버지! 이제는 김천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만 짓고 계실 뿐이었다.

혹자가 그러네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그 흙탕물에 들어가 파도를 이루고, 온 세상 사람들이 취해 있으면 나도 술을 마시며 취해 있으라 합니다! 아버지!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발 제게 답을 주십시오.

여전히 아버지는 나를 보면 웃고만 계셨다. 나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뒤로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장영은 검사실>.

다음 날, 나는 장 검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녀의 사무실을 찾았다.

“장 검! 나 떠나기 전에 우리 밥이나…….”

“어? 선배님 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장 검이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거렸다. 그녀는 책장에 사다리를 놓고 책들을 꺼내 박스에 담고 있었다.

“자… 장 검?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요? 뭐 해요? 안 도와주고…… 이렇게 빨리 내려갈 줄 알았으면 다 싸 들고 오지 말걸!”

장검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장에서 서적들을 꺼내더니 손등으로 땀을 닦아냈다.

“그니까. 그건 아는데, 왜 장 검이 짐을 싸냐고?”

“음, 저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요!”

탁탁탁, 장 검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내려보내? 지금 장난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울화가 치밀었다.

“흠, 바늘 가는 데 실도 가야죠. 그게 맞지 않나요? 선배님이 내려가는데 제가 여기 뭐하러 남아 있어요. 저도 김천으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같이 못 간 건 아쉽지만, 순천도 이젠 고향 같아서 좋아요. 역시, 전 순천이 딱 체질인가 봐요!”

후후후, 그녀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비열한 인간들!

“장 검! 당장 짐 안 풀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네?”

“장 검이 왜 다시 순천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여기 장 검만큼 정의롭고 능력 있는 검사가 어딨어? 다들 미친 사람들이야. 제정신이 아니라고!”

나는 장 검이 묶어놓은 책들을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선배님…….”

당황한 장 검이 입술에 손가락을 얹어놓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상돈 차장실>.

쾅! 나는 주먹으로 차장실 문을 내리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지…… 지금 무슨 짓이야?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깜짝 놀란 장상돈 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영은 검사, 순천지청 발령 당장 반려해 주십시오! 부당한 인사발령입니다.”

“난, 또 뭐라고. 그깟 일에 뭔 호들갑이야?”

장상돈 차장이 눈썹을 치켜뜨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깟 일이요? 차장님 눈엔 이 이일이 그깟 일로 보이십니까? 유능한 검사 한 명을 데리고 이렇게 장난질을 하셔도 되는 겁니까? 장 검의 미래는 전혀 생각지도 않으십니까?”

“장난질이라니? 김정환 검사! 지금 장난질이라고 그랬나? 말 함부로 하지 마!”

쾅, 그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장난질이 아니면요, 그럼 뭡니까? 서울중앙지검 발령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내려보냅니까? 장 검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저 하나면 충분한 거 아닙니까?”

“이거 이거, 매스컴 좀 탔다고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구먼. 착각은 자유라지만, 아주 제대로 오해하고 있는구먼! 장영은 검사가 다시 내려가는 게 김 검사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니, 착각하지 마! 지금 모든 것이 다, 김 검사 세상 같지? 검찰 내에서 당신이 그렇게 큰 존재라고 생각해? 자네 밑에 딸린 것들 한꺼번에 쳐내게?”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 검은 원래 특검이 끝내면 다시 원대 복귀시키려고 했는데, 특검님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발령을 냈더니, 일하는 게 영 시원찮아. 그래서 내보내는 거야. 착각하지 말라고 김 검사!”

장상돈 차장이 소리를 지르며 핏대를 세웠다.

치졸한 인간들! 오냐! 그렇게 원한다면 깨끗이 부러져주마!

쾅, 나는 거칠게 문을 걷어차며 뛰쳐 나왔다.

“건방진 새끼……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야.”

쯧쯧쯧, 장상돈 차장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며칠 후,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다!

굴원의 고사에 나온 대로 창랑의 물결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결이 탁하면 내 발을 씻겠다!

다만, 나는 반드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창랑을 다시 맑게 하리라!

띠리리링.

나는 신민당 원내대표 조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정환 검사! 웬일이시오?”

“동초갑 보궐선거 저한테 주신다고 했던 말씀, 지금도 유효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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