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정의구현 가신다-99화 (99/170)

# 99

[99화] 심판(審判) (3)

“그날이 의미가 있는 날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이기에 15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계십니까? 궁금하군요. 좀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음, 당연히 의미가 있죠. 있다마다요. 제가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가 있습니까? 그날,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친구와의 의리를 끊어내는 날이니까요. 당연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죠.”

김진철을 말하나 보군!

“친구와의 의리를 끊는 날이라고요?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주십시오.”

“네. 깨복장구 친구였던 어떤 놈의 배신 때문에 이 문신도 다 지워버렸던 날이죠. 여기 옷소매 좀 올려주십시오.”

박정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오른쪽 팔목을 가리키자 교도관이 다가와 옷소매를 올려주었다. 올라간 옷소매 아래로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담배로 지진 듯한 흉터가 드러났다.

“그게 뭡니까?”

“뭐, 검사님도 제 뒷조사를 해보셨을 테니 아시겠지만 제가 고아원 출신인데 그곳에서 같이 자란 친구와 함께 18살 때 불알 두 쪽만 차고 서울로 올라왔습죠.”

박정호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

“그래서 친구랍시고 그놈과 영원한 의리를 약속한다는 의미에서 똑같은 문양의 문신을 팠는데, 놈이 절 배신했습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계속하십시오.”

“그래서, 그날 홧김에 자주 가던 술집으로 가 그곳에서 담뱃불로 문신을 지져버렸습니다. 저로서는 이가 갈릴 정도로 참담한 날이었으니 기억이 날 수밖에요. 그날 너무 열이 받아 난동을 피웠기 때문에 사건일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람들은 차고 넘칠 겁니다.”

박정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음, 자신만만하군. 그 정도 증인이야 지금의 권력과 돈이라면 충분히 매수할 수 있었겠지! 아니면, 협박했거나…….

“그렇군요. 그렇다면 2월 21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박정호 씨가 목동 부근에서 있었다는 것은 분명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겠군요. 영화처럼 타임 리프를 하시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렇죠?”

“네? 다… 당연하죠. 그 시간에 저는 그 술집에서 술을 마셨으니깐요? 그 술집 지금도 있으니까 주인한테 확인해보시면 될 것 아닙니까?”

박정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심기를 건드리겠다는 의도였다.

“좋습니다. 그럼 좀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제가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피고는 다수의 차량을 보유한 자동차광이시던데, 맞습니까?”

“네. 제가 원래 차를 좀 좋아합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뇨. 당연히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대한민국에서 문제가 될 리가 없죠. 다만, 그 정도로 차를 좋아하고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면 지금까지 소유했던 차량은 잘 기억하시겠군요. 물론, 그 정도야 보통은 다들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놈은 내가 킹 메이킹 시스템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그 허점을 노려야 했다!

“네. 지금까지 내가 몰았던 차량은 대충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른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1997년, 15년 전 당시, 피고는 무슨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피고의 진술에 의하며 그 당시 변변한 직업이 없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계셨죠?”

“글쎄요. 그땐, 그냥 이것저것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사요? 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냥, 이것저것 팔았다고요!”

박정호가 불쾌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검사는 본 사건과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질문으로 피고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정진웅 변호사가 쉴드를 치며 나섰다.

“피고 측, 이의신청을 채택합니다. 다만, 피고! 여기는 신성한 법정입니다. 태도가 매우 불손하군요. 검사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이 박정호에게 주의를 주었다.

“음… 죄송합니다. 판사님!”

흠흠흠, 박정호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1톤 트럭에 온갖 불법 음란 비디오와 성인용품을 팔았다는 것이 이제 와서 부끄럽다는 건가? 구린내 나는 돈으로 자수성가해보니 그때가 창피한가 보군! 쓰레기 같은 인간!

“좋습니다. 무엇을 파셨는지는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파셨다고 했는데, 그 물건들은 어떤 식으로 판매를 했습니까? 점포에서 판매했나요? 아니면…?”

“음… 그런 것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군요? 물건을 어떻게 팔던 그게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내 물건, 내가 알아서 파는 것도 위법입니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박정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발악했다.

“피고!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피고는 지금 살인 및 살인교사 협의를 받고 법정에 나온 피고인입니다. 피고는 검사가 묻는 말에 답변만 하면 됩니다. 검사에게 질문하지 마세요! 경고합니다! 예의를 갖추세요. 다시 한번 이런 식으로 불손하게 답변할 시에는 법정모독죄를 적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재판장이 준엄한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네. 죄송합니다.”

박정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피고, 검사의 질문에 답변하세요!”

재판장이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요? 좀 전까지만 해도 김현석 씨와의 15년 전에 나눈 대화 내용은 완벽하게 기억하면서 어떻게 물건을 파셨는지는 기억을 못 합니까? 어이가 없군요! 다시 묻겠습니다. 거짓 증언을 하시면 위증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어떻게 파셨습니까?”

“흠… 트럭에 싣고 돌아다니면서 팔았습니다.”

박정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지금 트럭이라고 했습니까? 1997년 당시 박정호 씨는 트럭을 소유하고 계셨군요? 확실합니까?”

“음… 그게. 트럭으로 팔긴 했는데, 그때도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박정호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피고는 필요한 기억만 정확히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는 신기한 두뇌를 소유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제가 15년 전, 기억을 되살려드리죠.”

지이이잉.

리모컨 버튼을 눌러 법정 중앙에 있는 스크린을 내렸다.

[서울 4하 4416, 제조사 : 세한 자동차, 차종 : binggo Ⅱ]

화면에 나타난 사진은 박정호가 당시 소유하고 있었던 차종의 사진이었다.

“지금 화면에 나타난 차종은 당시 박정호의 명의로 되어있던 1톤 트럭입니다. 박정호 씨! 이젠 기억이 나십니까?”

나는 날카롭게 박정호를 응시했다.

“네에. 이… 제보니 맞는 것 같군요."

흠흠흠, 어쩔 수 없었는지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피고의 말대로 1997년 당시 피고는 세한 자동차에서 제조한 1톤 트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97년 2월 23일, 박윤석 기자가 사고를 당한 시점에서 이틀이 지난 후, 트럭을 급히 매각하셨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흠, 장사도 안 되고 해서 다른 일을 하려고 팔았습니다.”

“그래요? 그것참!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제가 어렵게 거래 내역을 확보해 확인해 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시세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파셨더라고요? 게다가, 매매 시점에 차량 앞 범퍼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는데 수리를 하지도 않았고요. 피고의 진술대로 당시엔 피고가 경제적으로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는데 소중한 트럭을 그렇게 낮은 가격에 매매했을 만큼 급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게.”

긴장했는지 박정호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혹시, 증거를 인멸하려던 목적은 아니었습니까?”

나는 그를 매의 눈으로 쏘아보았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검사는 추측성 발언으로 유도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장진웅 변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채택합니다. 검사는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추측성 발언은 삼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화면을 보시죠!”

틱, 나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PPT 화면을 바꿨다.

일련번호 : M 0765-1997-0221-8311.

위반 일시 : 1997년 2월 21일 01시 40분.

위반 차량 : 서울 4하 4416.

위반 장소 : 양화대교 북단 1.

위반 내용 : 속도 (제한 : 60 주행 : 120 초과 : 60)

적용 법령 : 제17조 3항.

PPT 화면에 등장한 속도위반 내역이다.

* * *

한 달 전,

“이 수사관님, 혹시 1997년 2월 21일 새벽에 양화대교나 성산대교 아니면 목동과 연결된 도로의 CCTV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시간이 너무 지나서 확인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알아보겠습니다.”

“네. 그리고 혹시 목동과 연결된 주변 도로에서 접촉사고나 교통법규 위반 사례가 있었다면 전부 취합해 주세요. 놈이 박 기자님을 죽이고 바로 운전을 했다면 심적으로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을 겁니다. 흥분된 상태에서 운전했다면 분명히 뭔가 사소한 일이라도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접촉사고나 신호위반 같은 교통법규 위반을 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확인 부탁합니다.”

“네. 경찰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며칠 후,

“부장님! 부장님의 예상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도로공사 CCTV 자료는 이미 삭제되고 없는데, 하늘이 도왔네요. 사건일, 박정호가 속도위반을 했었더군요. 위반 딱지가 발부된 적이 있었더군요. 아마도, 놈이 정신없이 트럭을 매매하다 보니 미쳐 이 부분을 신경 쓰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요? 박정호 차량이 확실합니까?”

“네. 보십시오. 서울 4하 4416! 박정호가 소유한 트럭이 확실합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결정적 단서를 잡아낼 수 있었다.

* * *

“뭐, 뭐야? 양화대교 북단이면…… 목동 인근이잖아?”

“저기 시간 좀 봐! 새벽 1시 40분? 저, 저 시간이면 박정호가 동두천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시간 아냐?”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경악했다.

“그런데, 뭐야? 운전자는 확인이 안 되잖아? 다른 사람이 운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 아냐?”

물론,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PPT 화면 속에 사진은 앞 유리를 뿌옇게 처리해 운전자의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다.

“뭐…… 뭐야. 저. 저걸 어떻게….”

박정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화면 속에 나타난 사진은 당시, 박정호가 소유하고 있던 서울 4하 4416 차량을 몰고 양화대교를 규정 속도를 초과해 질주하다 속도제한 카메라에 찍힌 것입니다.”

“위반 시간을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위반 시각이 박윤석 기자, 사망 추정 시각인 새벽 1시에서 40분이 지난 시각으로 확인되는데, 피고의 진술에 따르면 이 시간이면 피고는 동두천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셔야 할 시간인데,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나는 포인트로 화면 속 사진을 가리켰다.

“그…… 게. 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 차가 제 소유인 것은 맞지만 내가 운전했다는 증거가 없잖습니까?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아… 친구, 친구가 운전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 아 맞습니다.”

박정호가 당황했는지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사진 속 자신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요? 사진 속 운전자가 본인이 아니란 말씀이신 건가요?”

“네. 저…… 저는 그 당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제가 무슨 운전을 합니까? 제… 제가 아닙니다.”

박정호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건가? 그럼, 여기서 끝장을 내주지!

틱, 나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화면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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