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98화] 심판(審判) (2)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417호>.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자 싸늘한 긴장감이 법정을 휘감아 돌았다.
“박정호 씨! 묻겠습니다. 박정호 씨는 평소에 기억력은 좋으신 편입니까?”
나는 차분하게 첫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네. 나쁜 편은 아닙니다.”
그가 눈에 힘을 줘 말했다.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기세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군요? 그것이 15년 전의 일이라도 말입니다.”
“흠, 기억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박정호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이 사진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정진표가 지금까지 간직하다 나에게 전달한 아버지 사진을 그 앞에 내밀었다.
“네. 기억이 납니다.”
그가 사진을 잠시 내려보더니 박정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뭐라고? 기억이 난다고? 지금까지 그렇게 모른다고 잡아떼던 사진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 기억이 난다고?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 사진이 기억이 난다고 하셨습니까? 확실합니까?”
“네! 똑똑히 기억이 납니다.”
박정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이빨을 악다물었다.
“네.”
박정호가 비웃듯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본 사진은 15년 전, 박윤석 씨가 사망한 장소에서 피고인 박정호가 떨어뜨린 것으로 당시 8세 어린이였던 정진표 군이 습득해 지금까지 보관했던 것입니다. 사진 뒤쪽에 써진 글씨는 필체 감식 결과 저기 앉아 있는 김현석 피고의 필체임이 밝혀졌습니다.”
나는 김현석의 자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확대된 사진의 뒷면을 방청석을 향해 들어 올렸다.
“따라서 본 사진은 김현석이 살인을 교사하고 박정호가 실행에 옮겼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피고 박정호가 김현석의 사주를 받아 박윤석 기자의 집 부근 골목에서 그를 살해했다는 것을 증명할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검사 속으로 돌아갔다.
박정호가 절대적으로 부인할 것에 대비해 추가 질문을 구상했던 나로서는 그의 순순한 자백이 더없이 찜찜했다. 영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흠, 박정호 저 인간 무슨 수작인 거야? 지금 분명히 사진을 알고 있다고 한 거지?”
옆에 앉아 있던 정상현 부장이 코끝을 찡그렸다.
“글쎄요. 일단 그런데,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피고 측 변호인, 반대 신문하십시오.”
“네.”
재판장의 지시에 장진웅 변호사가 서류뭉치를 들고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피고는 저기 앉아 있는 김현석 씨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장진웅 변호사가 손바닥을 펴 김현석을 가리켰다.
“네. 제가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서울에 올라와 고생할 때 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이십니다. 저에게는 부모와도 같은 분이시죠. 저분 덕에 저는 지긋지긋한 건달 생활을 접고 새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음지에서 양지로 구원해준 은인 중 은인이십니다. 저는 저분께 죽어서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박정호가 주절주절 김현석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음, 지금까지 철저하게 김현석과의 관계를 부인하던 박정호가 지금은 180도 마음을 바꿔 두 사람 사이의 커넥션을 인정하고 있다?
분명, 이건 그들의 입장에선 절대적으로 불리한 진술이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진술을 하는 것인가? 당연히, 범행을 자백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지 않은가?
“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가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죠. 만약에 피고가 말씀하신 데로 그런 부모와도 같은 은인인 김현석 씨를 누군가가 모함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피고가 알게 됐다면 박정호 씨 입장에선 어땠을 것 같습니까?”
“씨x! 아마도 죽여버렸을지도 모르죠!”
박정호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의 눈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어머 어머! 저 눈 좀 봐!”
“무섭다 무서워!”
방청석이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그 순간, 나는 방청석으로 시선을 돌려 어머니를 쳐다봤다.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어머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모함? 괴롭혀? 지금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가?
순간, 혈소판이 휘몰아치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피고! 신성한 법정에서 욕설 사용을 자제하세요!”
법정이 소란스러워지자 재판장이 박정호에게 경고했다.
“네. 죄송합니다! 재판장님!”
피식, 박정호가 고개를 숙여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전혀 반성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 뻔뻔함 그 자체였다.
게다가,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살해 혐의를 부인하겠다는 건가?
꿀꺽, 나도 모르게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흠,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장진웅 변호사가 가슴을 앞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네. 지금부터 말씀드리죠!”
박정호가 고개를 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신데 그렇게 안색이 어두우십니까?”
그날따라 선생님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습니다. 혼자서 깡술을 마시고 계셔서, 그래서 걱정되는 마음에 제가 여쭸습니다.
“아냐, 아냐. 별거 아니니까 넌 신경 쓰지 마라. 그나저나 너 완전히 손은 씻은 거지? 절대로 그 바닥으로 다시 들어가면 안 돼! 그곳은 너랑 어울리지 않아. 이제 맘잡고 성실하게 살아야 해!”
이상했어요! 그날따라 선생님은 못 마시던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분을 알게 된 이후로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뭐든 할 테니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답답합니다. 선생님!”
“아냐, 아냐.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말래도!”
“선생님! 제발!”
“그게 말이야. 한민족일보의 박 기자라고 있는데 나를 너무 힘들게 하네. 아마도 나에 대해서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듯해! 정말 괴로워 죽겠어!”
정말 선생님은 괴로워하셨습니다. 결국, 저의 끈질긴 요청에 속내를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다 못해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정진웅 변호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박 기자를 봐버린… 아니, 다시는 선생님을 괴롭히지 못하게 손을 봐주려고 했죠. 그런데 선생님은 완강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랬군요. 그러니까 피고는 김현석 씨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한민족신문 박윤석 기자를 해할 모의를 했다는 건가요?”
정진웅 변호사가 안경을 치켜들며 말했다.
“아뇨, 아뇨. 마음속에선 박 기자를 향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제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한때는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봐버리자’라는 마음을 먹었던 적도 있었지만 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정치부 기자를 건드리겠습니까?
박정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마음만 그렇게 품었었던 것이지 범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했거나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는 말씀인가요?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솔직히, 여기 계신 분들도 전부 경험해 봤겠지만 바쁜데 뒤늦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사람이나, 길게 줄 서 있는데 새치기하는 인간들 보면 속으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까? 다들 그런 생각 한 번쯤은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게 죄가 됩니까? 아니잖습니까?”
박정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이…… 것이었어! 정진웅 변호사의 전략!
현재까지는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태, 목격자라고 해봐야 15년 전에 8살 꼬마였던 정진표가 전부! 게다가, 그마저도 진표는 서번트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다. 그의 진술은 객관적인 신빙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쪽으로 몰아가겠다는 의지다. 증언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다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야.
아버지를 해할 의도는 마음속에 품었던 적은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
김현석의 이미지가 다소 손상되더라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잘하면 무죄, 아니면 형법 255조, 250조와 253조에 의하면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니 적어도 살인이 아닌 범죄 예비, 음모로 몰아 형을 낮추려는 전략이야.
간교한 인간!
나는 입술을 이빨로 잘근거렸다.
“네. 알겠습니다.”
획, 정진웅 변호사가 방청석 쪽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죽이거나 해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60 평생을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상상 속에서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잠시나마 나쁜 생각을 했던 것을 사죄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에 죗값을 물어야 한다면 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죠! 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겁니다. 당연히! 세상 어느 곳에도 사람의 마음을 판단해 유죄를 선고하고 처벌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감옥에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진웅 변호사가 방청석을 훑어보며 눈을 빛냈다.
“당연히, 제 머릿속에서 죽었던 그분들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약 이 모든 것이 죄가 된다면 여기 계신 방청객들을 포함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장진웅 변호사가 주변에 시선을 흩뿌리며 말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특검이 피고를 압박할 목적으로 15년 전 단순 뺑소니 사고로 사망한 박윤석 기자를 전략적으로 끌어들여 기획 수사를 한 점! 같은 법조인으로서 심히 유감스럽고 개탄스러운 심정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형사소송법 307조에 의거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피고를 매도하는 검사의 행위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에 재판장님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리며 심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특검이 한 방 먹었네!”
“역시, 변호사계의 대부다운 논리야!”
"김정환 검사가 어떻게 반격하는지 두고 보자고!"
방청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흐음, 지금으로써는 진표 군의 진술은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렇게 된다면 아버지 사진 역시, 증거로써 무게감이 상당히 떨어지게 된다.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맞다! 우선, 사건일 그 시각에 술집에 있었다던 박정호의 알리바이를 깨야 한다. 알리바이를 깬 후, 정진표의 진술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
“검사 추가 심문하겠습니까?”
재판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가 말했다.
“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정호 앞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피고! 묻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셨던 것이 사실이라면 피고는 대단한 기억력을 보유하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있었던 다른 일들도 분명 기억하시고 계실 텐데요. 맞습니까?”
나는 박정호를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흐음, 기억할 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결,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사건일 1997년 2월 21일 밤, 그 시각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겠군요.”
제발! 기억해라! 모른다고 하지 말아라! 제발…….
“흐음…… 기억이 납니다. 그날은 제게 의미가 있는 날이었으니까요.”
박정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그렇지! 걸려들었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