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화] 심판(審判) (1)
<정우랜드 본사 사옥>.
“검찰입니다. 지금부터 정우랜드를 압수 수색하겠습니다. 협조해주십시오.”
수십 명의 경찰과 검사들이 정우랜드 본사 사옥에 들이닥쳤다.
“여기 수색영장입니다. 수사에 협조해주십시오!”
정우랜드와 한일 물산 간 비밀리에 조성돼 의성의 마늘밭에 숨겨진 비자금을 확보한 특검은 전격적으로 정우랜드를 압수 수색했다. 압수 수색한 결과, 한일 물산에 지급한 인건비가 부풀려진 이중장부를 적발할 수 있었고 그룹 차원에서 이를 눈감아준 정황이 포착됐다. 따라서, 정우그룹의 실질적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임정우 회장의 장남 김태호 부회장을 구속하는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다. 또한, 끈질긴 추적 끝에 박정호가 조성한 비자금이 검찰총장 및 중수부장 김현석에게 흘러 들어간 정황 또한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특검은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총장 및 중수부장 김현석 기소, 자금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김태호 구속, 살인 및 살인교사, 횡령 및 사기 혐의로 박정호를 구속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모든 것이 마늘밭 비자금이 발견된 후, 수사에 탄력을 받은 특검의 결실이었다.
[성역 없는 특검의 수사에 찬사를 보냅니다!]
[역대급 특검! 검찰총장을 기소하다!]
특검의 발 빠른 수사에 국민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각지에서 보낸 선물들이 대치동 특검 사옥 로비를 빼곡히 매울 정도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특검은 생각지도 못한 암초를 만나야 했다.
<전중호 팀장실>.
“팀장님! 특검 연장이 안 된다뇨?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여기서 멈추면 어떡합니까? 조금만 더 수사하면 이번에야말로 뿌리째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라뇨?”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게. 나도 지금 무척이나 당황스럽다고! 내부적으로 특검 연장은 합의된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난감하군.”
전중호 팀장이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좀 더 조사할 것들이 남았어요. 반드시 특검을 연장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기엔 아직은 증거가 불충분해요!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못 한다고요!”
“정환아, 진정해! 그걸 누가 모르나? 나도 지금 황당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중호 팀장이 양손을 펼쳐 보이며 난감해 했다.
“이렇게 되면 역대 특검과 우리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결국, 잔챙이 몇 마리 쳐내고 덮어버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결국, 꼬리 자르기 특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흠, 나로서도 불가항력이야. 이미 특검 연장은 위에서 반려가 된 상황이고 어쩔 수 없잖아! 일단 확보한 증거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나도 어떡하든 도울 테니까 일단 재판에 맡겨보자.”
전중호 팀장이 흥분한 나를 진정시키려 등을 두드렸다.
“이번 특검 연장은 사전에 여야가 합의한 사항 아닙니까?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해도 되는 겁니까?”
하루에도 수도 없이 바뀌는 박쥐 같은 정치인들이 흉물스러웠다.
“정환아! 내 말 잘 들어. 법안상정 때, 국회에서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며 멱살잡이하던 인간들이 밖에서는 웃으면서 손잡고 밥 먹으러 가는 정치인들이야. 내 눈에 비친 정치인의 모습은 권력에 굶주린 야수의 모습이다! 정치판에 들어가면 멀쩡한 사람들도 괴물로 변해버려. 정환아, 내가 당부하는데, 앞으로도 정치인들의 말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돼! 절대로! 그들은 믿고 자시고 할 존재가 못돼!”
전중호 팀장이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결국, 전중호 팀장의 말대로 특검 연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어쨌든, 70일간의 특검의 모든 수사는 완료되었다. 우리는 특검 수사를 통해 확보한 모든 자료를 서울중앙지검에 넘겼고 재판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한편, 공소유지를 위해 이번 재판에 참여하게 된 검사로는 나를 비롯해 특수 1부의 정상현 부장, 형사 4부의 노준수 부장이 선임되었다. 피고 측 역시, 이에 맞서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변호사계의 대부로 알려진 정진웅 변호사를 필두로 쟁쟁한 변호인단이 포진되었다. 우리는 그들과 법정 안에서 진검승부를 펼쳐야 했다.
첫 번째, 재판 대상자는 박정호 한일 물산 대표와 전직, 대검 중수부장 김현석이었다.
특별검사에 의해 기소된 사건의 제1 심은 서울중앙지방법원 합의부에 전속 관할되어 있어서 박정호 역시, 이곳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박정호의 죄목은 박윤석 기자 살인 및 정우 랜드 이준구 사장 살인교사 그리고 정치자금법 위반, 자금 횡령 및 배임죄였고 김현석은 박윤석 기자 살인교사 및 뇌물수수였다.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치러졌고 150석의 방청권 역시, 하루 만에 동이 날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재판이었다.
* * *
<서울중앙지방법원>.
팡! 팡팡! 팡팡팡!
박정호와 김현석이 포승줄에 묶인 채, 호송차에 내려서자 기자들이 몰려와 연신 카메라 프레쉬를 터트렸다.
두 사람은 카메라 세례가 부담스러웠는지 양손으로 눈을 가렸고 교도관들이 그들을 경호하며 기자들이 늘어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현석 중수부장의 초췌한 모습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와! 저기 들어온다!”
한 기자가 그들을 향해 손짓하자 다른 기자들이 우르르 두 사람에게 몰려갔다.
“박정호 씨, 지금 심정에 대해서 한 말씀만 해주시죠! 한일 물산이 정치 비자금의 세탁처였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김현석 씨! 지금까지 특검의 모든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계셨는데 여전히 심경의 변화가 없으십니까? 한일 물산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박정호 씨, 박윤석 기자 살해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밝혀주실 수 있습니까?”
“김현석 씨, 정우랜드 이준구 사장의 살해를 사주했다는 검찰의 주장을 인정하십니까?”
기자들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야수처럼 그들에게 맹렬히 쫓으며 질문을 토해냈다. 취재 경쟁 또한 올림픽에 출전한 100m 선수처럼 치열했다.
“잠시만 비켜주십시오! 지금 법정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기자님들! 길을 좀 터주세요.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도관들과 경찰들이 두 사람을 호위하며 기자들 틈을 비집고 법원 로비로 향했다.
“박정호 씨, 정우랜드 이준구 사장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했다는 검찰의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김현석 씨! 지난번, 정우 물산 분식회계 사건을 무마한 대가로 정우랜드 주식을 받으신 겁니까?”
가까스로 법원 입구로 들어선 두 사람이 4번 법정 출입구를 통해 들어갔지만 이미 그곳도 기자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그쪽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었다. 아무튼, 기자들과 직원들 간의 몸싸움으로 법원은 아수라장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417호>.
417호 법정, 추악한 역사의 심판장!
이곳은 그동안 대기업 총수 및 거물급 정치인들의 재판이 열렸던 곳으로 유명한 법정이었다.
여기에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 것이다!
나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구절을 되뇌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 이제부터 시작인가?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마음을 가다듬고 법정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어머니!
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고 양발이 중력에 이끌려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50명의 방청객과 수많은 기자!
방청석은 만원이었지만, 내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단 한 사람! 맨 앞쪽에 앉아 있던 여인, 금세라도 눈물이 터질 듯 붉어진 눈망울로 정면을 응시하는 가냘픈 여자!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얼굴만이 클로즈업되어 내 모든 시야를 사로잡았다.
“김 부장 뭐야! 왜 그래?”
“…….”
“어허! 이봐! 정신 차려!”
“네? 네. 죄송합니다.”
“김 부장!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옆에 앉아 있던 정상현 부장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어머니! 지켜봐 주십시오. 당신, 아들이 놈들에게 반드시 정의가 살아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습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네? 아,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털썩, 나는 의자에 몸을 내던지듯 앉았다.
“여기 우리 쇼핑하러 나온 것 아니라고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정신 바짝 차리고 재판에 집중해!”
“네. 알겠습니다.”
“다들 정숙해 주십시오. 그럼, 지금부터 2012 176호 피고 박정호와 김현석의 특정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1심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재판장이 준엄한 목소리로 재판 시작을 알렸다.
“피고는 국민 참여 재판을 원하십니까?”
재판장이 건조한 목소리로 피고에게 물었다.
“아니요. 원하시지 않습니다.”
피고를 대신해 그들의 변호인이 정진웅 변호사가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피고의 성명을 말씀해주십시오.”
“박정호입니다.”
“김현석입니다.”
“현재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무직입니다.”
김현석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미 중수부장 자리에서 물러났기에 무직이라는 답이 맞는 말이긴 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다소 긴장돼 보이긴 했으나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이었다.
“검사, 모두 발언하세요!”
간단한 인정 신문을 마친 후, 재판장이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피고 박정호는 15년 전, 김현석과 공모해 당시 한민족신문에 재직 중이던 정치부 기자 박윤석을 살해하고…… 음….”
순간,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초췌한 얼굴을 마주하자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저, 검사 왜 저러는 거야?”
“표정이 왜 저래?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기센데? 아주 이번 사건에 한이 맺힌 모양이군!”
방청석 이곳저곳에서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김정환 부장!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옆에 앉아 있던 노준수 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검사! 어디 몸이 불편합니까?”
재판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피고 박정호는…….”
후,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힘겹게 공소장을 읽어 내려가 갔다.
“피고 박정호와 김현석은 검사 측에서 제시한 모든 기소 사실을 전면 부인합니다.”
내가 힘겹게 자리에 앉은 후, 정철웅 변호사가 모두 발언을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는 우리 측에서 제기한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고 결국, 한바탕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질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피고인 심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검사! 피고 심문하십시오.”
나와 정진웅 변호사의 모두발언이 끝나자 재판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사, 심문 시작하세요!”
“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피고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