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화] 독전(毒銭) (1)
경상북도 의성.
장 검과 나는 조상진을 만나기 위해 의성으로 향했다.
“음… 그러니까 박정호의 매형인 조상진이 모든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거죠? 맞나요?”
나는 의성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장 검에게 정우랜드과 한일 물산 간에 조성된 비자금에 관한 모든 얘기를 해주었다.
“그래.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김삼수의 말에 의하면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조상진에게 자금을 맡긴 거라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재무관리를 해본 적도 농부가 그런 큰돈을 어떻게 관리를 했을까?”
“흠, 그러게요. 저도 좀 의아하네요. 어쩌면 자금 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내려가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죠.”
“…….”
4시간 남짓, 어느덧 우리는 의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조상진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의성에서도 촌인 가음면 양지리의 농가였다. 우리는 미리 확보한 주소를 이용해 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시나요?”
“아무도 없나 봐요?”
장 검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는 듯했다.
“누꼬?”
탁탁탁, 그 순간 한 노파가 수건으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들어왔다.
“네. 혹시, 이 집에 조상진 씨라고 계십니까?”
“상진이 말하는 기가? 갸는 와 찾는데? 니도 노름빚 쳐 받으러 왔나?”
“네?”
“하이고야, 허리 아파 죽것데이. 내는 죽어따 깨나도 돈 가진 거 없다. 돈 가질러 온 거믄 배째라카이. 여긴 암 것도 없데이.”
할머니가 허리를 두드리며 마루에 몸을 걸쳐 앉았다.
노름빚? 조상진이 도박을 한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요. 저는 조상진 씨의 후배인데 좀 급한 일이 있어서 형님을 좀 만났으면 해서요. 혹시, 어르신은 조상진 씨와 어떤 관계입니까?”
나는 대충 조상진의 후배라고 둘러댔다.
“그 육시럴 놈을 왜 자꾸 찾는 기가? 그놈의 자슥, 손모가지를 잘라뿐지야 내가 속이 후련데이. 농사는 안 짓고 돈이 어디서 나가 허구헌 날 노름방에 댕기면서 지랄하고 다닌다 안 하나. 창시를 꺼내 씹어 묵어도 쉬언찮데이. 갸는 인제 내 아가 아니데이.”
할머니가 육두문자를 쏟아내며 투덜거렸다.
“어르신 제가 도와드릴게요.”
할머니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장 검이 재빨리 다가가 부축했다.
“고맙데이. 샥신이 쑤셔가 죽것데이. 내도 인제 갈 때가 다 된갑다.”
“어르신, 그럼 조상진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 검이 노파의 눈치를 보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썩을 놈을 내가 아나? 읍내 까질러가가 노름하고 있것지! 육시럴 놈!”
“아, 그래요….”
“갸는 언제 기 들어올지 모른데이 쳐들어오고 싶을 적에 들어 오것제. 후배라고 했제? 그라믄, 때 다 됐는데 밥이라도 묵을라면 묵고 가구로.”
노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어르신, 조심하세요!”
장 검이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부축했다.
“음, 조상진이 도박을 하나 보네요.”
장 검이 집을 나서며 말했다.
“그런가 보군.”
“뭔가 냄새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일단 쉬고 내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네. 알겠어요.”
<근처 민박집>.
“방 두 개만 주세요!”
“와? 지금 뭐라카노? 니그 부부 아이가?”
“네? 아뇨, 아뇨. 직장동료입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연신 손사래를 쳤다.
“참말이가? 이상타? 나가 볼 땐 부부가 맞다카이?”
“진짜! 진짜 아니에요. 네버, 네버.”
장 검이 새빨개진 얼굴로 양손을 흔들었다.
장 검과 나는 어쩔 수 없이 근처 민박집에 방을 잡고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우리는 각자 방을 잡고 의성에서의 첫날밤을 보내야 했다.
“장 검, 그럼 잘 자고 내일 봐!”
“네. 선배님도 주무세요!”
얼마 후,
똑똑똑!
“선…… 배님! 주무세요?”
장 검이 목소리 톤을 잔뜩 죽여 문에 대고 말했다.
“어? 장 검? 아직 안 자긴 하는데 무슨 일 있어? 드…… 들어와.”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었다.
“흠,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도무지 잠이 안 와서… 요. 혹시, 안 주무시면 산책이나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장 검이 손바닥으로 양어깨를 문지르며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래? 그러지 뭐. 잠깐만 기다려 옷 좀 입고 나올게.”
* * *
잠시 후,
“제가 잠을 깨운 건 아니에요?”
“흠, 아냐. 나도 이것저것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안 오던 참이었어.”
우리 둘은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새벽 바람은 차가왔지만 상쾌한 공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어느새, 조상진의 마늘밭 근처에까지 오고 말았다.
“와! 선배님 저기 좀 보세요. 별이 쏟아질 것 같아요!”
그 순간, 장 검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목소리 톤을 높이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정말 그러네! 저렇게 많은 별은 오랜만이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별을 볼 수 없잖아!”
“음, 그건 선배님이 평소에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아서 그래요. 전, 그래도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서울 하늘에도 별은 볼 수 있거든요?”
“그런가?”
그러고보니, 요즘 통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리 여기 잠깐 앉을까?”
“네. 고마워요.”
내가 외투를 벗어 밭두렁 위에 올려놓아주자 장 검이 빙긋이 웃었다.
“선배님! 근데,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장 검이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뭔데?”
“음, 박 기자님 말인데요. 선배님이랑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서요. 사실, 지난번에 박정호 취조하실 때 좀 놀랐거든요.”
장 검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왜?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흠, 뭐랄까? 아 맞다! 무협 영화 같은 거 보면 부모의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주인공 같은 비장함이랄까? 아무튼, 박정호를 응시하는 선배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한이 서려 보였다고 나 할까요? 아무튼, 박 기자님과는 어떤 사이세요?”
장 검이 궁금한 듯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그랬나? 장 검이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 박 기자님이라, 음, 내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셔.”
나는 장 검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흠, 역시 그런 거였군요. 자세히 알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더 이상은 묻지 않을게요. 어차피 물어본다고 대답해줄 선배님도 아니고, 그렇죠?”
“…….”
“저 봐 저 봐. 역시, 내 예상이 맞다니깐?”
장 검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입을 삐죽거렸다.
“장 검, 장 검은 빙의 같은 걸 믿어?”
그냥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네?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그런 게 어딨어요? 전 그런, 비과학적인 현상은 안 믿어요. 음, 그런 건 점쟁이 같은 사람들이 사기칠 때 쓰는 수법 아닌가요?”
그렇지! 나도 믿을 수가 없는 데, 장 검이 어떻게 그걸 믿겠어. 물어본 내가 바보지!
“후후, 그렇지? 아무래도 빙의 같은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
“그럼요! 당연하죠. 음, 그러고 보니 수상한데, 선배님 혹시, 저 몰래 점 같은 거 보러 다니시는 거예요?”
획, 장 검이 갑자기 몸을 돌려세우며 나를 째려봤다.
“아냐 아냐, 그런 거!”
나는 연신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나저나 선배님! 조상진은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숨겨뒀을까요? 아까 언뜻 보니 금고 같은 것도 없던데!”
그렇게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고 그녀가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 화제를 바꿨다.
“궁금해?”
“네. 당연히 궁금하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 내려온 거잖아요. 선배님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기!”
나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가락으로 눈앞에 펼쳐진 마늘밭을 가리켰다.
“네? 저기라뇨? 서, 설마 저 마늘밭에 묻어뒀다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죠?”
장 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맞아! 저 마늘밭을 파보면 박정호가 숨겨둔 독전이 나올 거야.”
“에이 농담이죠?”
“궁금하면 장 검이 내려가서 한번 파보던가!”
“진짜, 장난하지 말고요!”
장 검이 내 팔을 살짝 비틀었다.
“아야! 아파! 진짜라니까, 분명히 조상진이 저기에다 비자금을 숨겨뒀을 거야.”
나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지…… 진짜예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는 거죠?”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조상진의 집을 들른 후에 확신을 두게 됐어.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왜 그런지 이유를 알려줄 테니까!”
나는 황당해 하는 장 검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조상진은 농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일반적으로 마늘은 10월 말에서 11월 말에 씨를 뿌리는데, 겨울철, 얼음이 얼기 전에 방한 비닐을 씌워 얼지 않도록 해야 하거든. 그런데, 저길 봐! 조상신의 밭은 비닐이 여기저기 찢겨 나가 있거나 아예 방한 비닐도 없는 곳이 태반이잖아. 왜 그럴까?”
“음… 관리를 전혀 안 했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거죠?”
“맞아! 당연히 조상진은 마늘밭을 관리할 이유가 없었던 거겠지. 게다가, 마늘밭에는 잡풀이 많이 올라와 고랑에 제초용 부직포를 깔아둬야 하거든. 봄에는 바빠서 시간이 별로 없어. 더욱더 지금 해둬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것마저도 전혀 보이지 않았어!”
“흠, 일단 조상진이 큰돈을 만지고 있으니 마늘밭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 아닐까요?”
“아니, 절대! 조상진은 그 돈에 손을 댈 수 없었을 거야. 박정호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만약에 그 비자금에 손을 댔다가는 아무리 매형이라도 무사하지 못할걸?”
“흠… 그것참, 이상하군요. 좀 전에, 조상진의 모친이 한 소리 중에 그가 도박 빚을 잔뜩 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농사도 안 지으면서 어디서 돈이 생겨서 도박했을까요? 비자금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가만있자. 아니지! 아! 맞다! 건드렸네! 건드렸던 거예요.”
장 검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래, 지금 장 검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야. 아마도 조상진은 박정호의 비자금에 손을 댔을 개연성이 커! 처음에야 그럴 맘이 없었겠지만 결국, 도박에 빠진 그가 독전에 손을 대고 만 거지.”
“흠,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그 비자금이 저 마늘밭에 있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후후, 나도 그게 의아했는데, 오늘 조상진의 집에서 해답을 찾았어!”
“그게 뭐죠?”
장 검이 궁금한 듯,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소형 굴착기! 이게 답이야. 사실, 고랑과 이랑을 파는 트랙터면 몰라도 농사를 짓는 사람의 집에 굴착기가 있을 필요는 없지! 만약 밭을 뒤집으려 필요하다 할지라도 굴착기 기사를 부르지 본인이 직접 하지는 않거든. 그런데, 조상신의 뒷마당에 굴착기가 있더군. 당연히, 굴착기 기사를 부를 순 없었겠지. 저 안에 들어있는 독전을 들키면 안 될 테니 말이야.”
“아아! 그래서 아까 잠시 뒤쪽으로 가신 거군요! 음… 맞아요! 마늘밭에 숨겨두더라도 들키지 않으려면 깊이 땅을 파야 했겠죠.”
장 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특히 겨울철엔 땅이 굳어서 삽이나 곡괭이 가지고는 팔 수 없지. 그런데, 아까 그 굴착기 엔진이 따뜻했거든! 이것이 뭘 뜻하는 건지 알겠어?”
“음, 사용하진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 맞아요. 조상진은 우리가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 굴착기를 사용했어요. 그렇다면, 도박 자금으로 쓰기 위해 그가 박정호의 비자금에 손을 댔다는 뜻이 되는데…….”
“빙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조상진은 박정호의 비자금에 손을 대서 도박을 한 것이 틀림없어.”
“음… 만약에 선배님의 추론이 맞는다면, 조상진, 이 사람 지금 지대로 똥줄이 탔을 텐데요. 구속된 박정호가 이곳에 숨겨둔 비자금을 가만둘 리가 없잖아요. 분명, 조상진에게 연락했을 거예요.”
“당연하지! 그러니 조상진은 더욱더 마음이 급할 거야. 이미, 비자금에 손을 대서 엄청난 돈을 잃었을 테니 말이야. 흠, 박정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자신은 무사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을 거야. 당연히 조상진은 이 돈을 메꿔야 했을 텐데, 신용불량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조상진이 무슨 수로 그 돈을 메꿀 수 있겠어!”
“흠, 이제야 그림이 좀 나오네요. 결국, 조상진은 도박해서 이를 메꾸려고 한 거예요!”
“…….”
나는 대답 대신 장 검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음, 선배님! 이렇게 정황이 드러난 이상, 내일이라도 당장, 경찰을 동원해서 마늘밭을 파보면 되겠네요!”
“아니! 그래선 안 되지. 남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침해할 수는 없을뿐더러 이곳에서 돈이 나온다 해도 그 돈이 박정호의 비자금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어. 어차피 현금이다 보니 발뺌을 해버리면 우리도 대책이 없거든. 괜히 섣불리 그랬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볼 수 있는 일이야.”
“그럼, 어떡하죠?”
장 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건 걱정하지 마! 스스로 파내게 하면 되니까!”
“네네. 스스로 파내면 되죠. 네? 스스로 파내요?”
그 순간, 장 검이 얼굴을 돌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