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응징(膺懲) (2)
<특검 취조실>.
“어… 이, 이 눈빛… 당신… 어디서 본 듯한데…….”
박정호가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 전에 김현석이 했던 말과 똑같다!
“뭐예요. 눈빛이라뇨? 무슨 수작을 부리시는 겁니까?”
두 사람 전부 내 눈빛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양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박 기자! 맞아! 똑똑히 기억이 난다! 그자가 죽기 직전, 나를 쳐다봤던 눈빛과 똑같아! 나를 멸시하는 듯한 그 눈빛을 내가 어떻게 잊겠는가? 그나저나 어떻게 이자에게서 그 눈빛이 보이는 건가? 혹시? 아들? 아니지. 성이 다르지 않은가? 아무튼, 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 말은 꺼낼 수는 없지 않은가?
“놓으시죠! 아픕니다. 검사가 이렇게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겁니까?”
박정호가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
나는 할 수 없이 쥐고 있던 그의 목덜미를 풀어주었다.
“변호사를 선임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부터는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할 겁니다.”
박정호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다만, 명심하세요. 그 묵비권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의 얼굴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경고했다.
* * *
이렇게 해서, 박정호의 심문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진표 군의 증언과 그가 가지고 있던 증거인 사진 뒷면에 써진 필체가 김현석의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김현석의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더불어, 박정호의 친구였던 김진철의 증언, 그리고 최근에 우리가 확보한 박정호 부하들의 난동 영상을 토대로 구속영장이 꾸려졌고 다행히도 법원이 채택함으로써 박정호 구속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법원의 준엄한 판결만 남은 상황이었다.
아버지! 반드시, 놈이 법정 최고형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엄마! 내가 반드시 아버지 원수를 갚을게! 조금만 기다려 줘!
박정호, 김현석! 무엇을 기대하든지 그 이상일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했다.
반드시 밝혀낸다!
이제부터는 박정호와 김현석이 주도한 이준구 살인, 정우랜드의 정치 비자금의 유통경로 파악에 집중해 수사해야 했다.
<전중호 팀장실>.
“아무튼, 김 부장, 자네는 정말, 뭐라고 표현할 단어가 없게 만드는구먼. 15년 된 사건을 단숨에 해결을 해버리니, 휴, 할 말이 없군!”
전준호 팀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여간, 선배님은 못 말린다니깐요! 저걸 다 언제 조사한 거래요?”
장 검이 수사자료를 가리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음… 이제부터는 이준구 타살과 한일 물산을 둘러싼 비자금 유통경로 파악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특검 수사에 집중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팀장님!”
나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아냐 아냐, 자네 덕에 박정호, 김현석을 구속할 수 있었잖아. 게다가, 김현석의 자백을 받아낸 부분은 신의 한 수였어. 그리고, 자네 말대로 박윤석 기자의 죽음은 이번 사건과 맥을 같이하고 있잖은가!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고. 이번 수사를 통해 우리도 힘을 받았으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특검님도 지금 굉장히 흐뭇해 하신다네.”
전중호 팀장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네. 맞아요. 일단, 박정호와 김현석의 검은 연결고리가 확인되었고 구속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예요. 좀 더 둘의 관계를 파악하다 보면 뭔가 나와도 나올 거예요. 이번 일을 계기로 여론이 우리 쪽으로 급격히 기울면서 수사가 훨씬 탄력을 받게 됐어요.”
장 검이 옆에서 거들었다.
“장 검 말이 백번 맞아! 이제, 여론도 우리 쪽에 우호적이고 야당 쪽 의원들도 수사를 좀 더 지켜보자는 분위기로 바뀌었어. 이젠, 우리도 수사에 박차를 가해보자고! 자자! 파이팅하자고!”
전준호 팀장이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네!”
“네!”
“음… 우선, 정우랜드 쪽 자금이 한일 물산 쪽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을 잡는 것이 우선이야. 일단, 지난번 압수 수색한 결과는 별거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이미 정우 쪽에서 조치해 뒀겠지만 그래도 한일 물산을 파보면 뭐라도 건져낼 거야.”
전준호 팀장이 입술을 매만졌다.
“음… 팀장님,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헐, 선배님! 이미 복안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장 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글쎄. 확실하진 않지만, 짚이는 데가 하나 있어서 그래. 확인해 보고 확실해지면 그때 얘기해줄게.”
나는 가볍게 장 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역시, 물건이야. 물건!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조물주께서 너를 내게 보낸 거 아니겠냐! 너만 믿는다, 정환아!”
하하하, 전준호 팀장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 * *
<교외 한적한 카페>.
나는 김진철이 소개해준 그의 부하 김삼수를 만나기 위해 교외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
김삼수는 한일 물산에서 영업부장직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는 김진철이 박정호를 견제하기 위해 심어놓은 그의 첩자였다. 워낙 우직하고 충성심이 대단해 박정호가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부하 중에 하나로써 궂은일은 도맡아 그가 처리해왔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네에. 김삼수입니다. 형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단정한 옷차림에 예의 바른 모습이 여느 조폭과는 달라 보였다. 그가 인사를 한 후 손을 내밀었다.
“네.”
우리는 간단히 통성명한 후에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한일 물산이 언제부터 정우랜드의 외주인력을 공급했던 겁니까? 그전까지는 다른 업체가 맞았던 것 같은데요.”
“음, 아마도 5년 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원래, 정우랜드의 인력수급은 공정한 공개입찰로 결정했는데, 한일 물산이 참여한 후에 완전히 유명무실해졌어요. 형식적으론 입찰은 진행했는데 입찰에 참여한 다른 업체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모두 박정호가 무력으로 협박을 가했기 때문에 유명무실했어요. 이제는 완전, 턴키 방식의 수의계약 형태나 다름없어요. 입찰은 형식적으로 돼버렸고요. 예전에 한 업체가 이를 문제 삼고 의문을 제기했다가 완전 결딴 났습니다. 박정호가 조직원을 동원해 쑥대밭을 만들어 놨거든요. 이제는 경쟁상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거의 거저먹기나 다름없습니다.”
“그랬군요. 자료를 조사해보니, 한일 물산 장부에 기재된 인력 단가와 정우에서 실 지급한 인력 단가가 차이가 나던데요.”
“네. 잘 보셨습니다. 실제로 정우에서 주는 단가가 장부상 단가보다 10%가 높습니다. 그 차이가 엄청나죠. 그걸 빼돌려 그 돈으로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죠.”
김삼수가 미간을 좁히며 심각하게 말했다.
“음, 그러면, 그렇게 조성된 비자금은 누가 관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무리 자료를 검토해봐도 돈의 출처를 알 수 없더군요. 분명, 금융거래는 없었습니다.”
“저도 거기까지는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조상진이란 사람이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상진요? 그 사람은 또 누군가요?”
“네. 박정호의 매형입니다. 그자가 비자금을 전부 관리하는 것으로 아는데, 자세한 사항은 저도 모릅니다.”
“조상진,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경북 의성에서 마늘 농사를 짓는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박정호가 워낙, 그쪽은 극비에 부쳐 놓은 상태라 더 이상의 정보는 저에게도 없습니다.”
“네? 마늘 농사를 짓고 있다면 그럼, 농부란 말입니까?”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좀, 의외지만 사실 남의 눈을 피하기엔 안성맞춤이긴 하죠.”
김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농부가 수백 원대의 비자금을 관리한다? 뭔가 냄새가 진동하는군!
“음, 알겠습니다.”
“네. 그자를 만나보시면 뭔가 나와도 나오겠죠!”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저는 이준구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자살이 아닐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시죠?”
“정우와 한일간의 비자금 유통 내역에 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이준구 사장, 박정호 사장 그리고 박정호의 오른팔인 김정동 말고는 없습니다.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 세 사람만이 비자금에 관여했죠. 그런데, 지금 박정호와 김정동은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분명, 박정호가 그의 심복인 김정동과 최장수에게 시켜 이준구를 제거했을 겁니다. 자필 유언장을 쓰게 한 후에 죽여버리는 수법까지 동일하더군요. 아마, 김정동이 꾸민 일일 겁니다.”
“혹시,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 몇 번 있었죠. 한일 물산에 하청을 대던 모 업체 대표도 박정호를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결국, 이준구와 같은 방식으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때도 김정동과 최장수의 짓이었습니까?”
“네.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이 세 사람은 거의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습니다. 김정동과 최장수는 박정호가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인간들이에요. 충성심이 엄청난 사람들이죠.”
“흠, 알겠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빵에 계시는 형님이 검사님을 도와주라 하셨습니다. 저는 형님의 뜻을 따를 뿐이지요. 그나저나, 검사님! 저도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더는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쯤에서 저도 그만두려고 합니다.”
김삼수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뇨!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그곳에서 버텨 주십시오. 김정동과 최장수 이 두 사람, 주거침입 및 사생활 침해죄에다 자금 횡령으로 기소돼 구속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박정호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김삼수 씨뿐일 겁니다. 그가 분명, 삼수 씨한테 중요한 정보를 흘릴 겁니다. 심적으로 힘드시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부탁합니다.”
“흠, 네. 알겠습니다.”
후, 그가 길게 숨을 뿜어냈다.
“감사합니다.”
* * *
<대치동 특검 사옥, 사무실>.
“장 검, 우리 여행 한 번 갈까?”
“네? 선… 배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수사로 다들 난린데 뜬금없이 무슨 여행이오?”
장 검이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음, 데이트하자면서!”
나는 그녀를 보며 피식거렸다.
“그렇긴 한데,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장 검이 목 밑까지 빨개진 채, 말을 더듬었다.
“흠… 왜 얼굴은 빨개지고 그래?”
“그… 게, 갑자기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장 검이 검지를 마주치며 얼굴을 붉혔다.
“장 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범인 잡으러 가는데 마음에 준비가 왜 필요해?”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아무래도 의성에 돈나무가 자라고 있는 듯싶다. 가서 뽑아오자!”
“네? 돈나무요?”
“그래.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할 테니까, 빨리 준비해. 어쩌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니까 짐 챙겨서 로비로 내려와! 이미 팀장님한테는 허락을 받아뒀으니 걱정하지 말고!”
“네. 아… 알았어요.”
장 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