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화] 폭로(暴露) (3)
<전중호 팀장실>.
“팀장님, 정진표 군의 진술을 받아왔습니다. 박정호 바로 체포영장 발부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것 좀 보시죠!”
나는 전준호 팀장에게 정진표가 건네준 사진을 내보였다.
“…….”
하지만,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전준호 차장이 말없이 사진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심심치 않은 분위기였다.
“팀장님! 지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겁니까? 놈이 눈치채고 증거를 인멸하기 전에 잡아 와야합니다. 또한, 한일 물산 압수수색 영장과 박정호의 금융계좌 압수수색도 해야 해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마음이 조급했기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부었다.
“그래. 알았으니까 영장청구서 써와. 아무튼, 수고했어.”
“네? 그… 게 끝입니까?”
그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정환아! 흠…… 이거 생각보다 쉽지가 않겠어! 야당 쪽에서도 수위를 조절하자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아무래도 기분이 쎄하다.”
전준호 차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아직 몸통은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검찰청장은커녕, 김현석도 그냥 돌려보낸 상황인데 그런데 무슨 수위를 조절한다는 거죠? 조절할 수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강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있는데 무슨 엉뚱한 말씀이세요? 팀장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야당 쪽 원내대표들이 직접 특검님한테 언질 해 놓은 듯해. 어차피 진철훈 대표야 워낙 이미지에 똥칠했으니 회생 불능이고 하니 적당한 선에서 덮자는 거겠지. 깊숙이 들어가 봐야 자신들도 줄줄이 엮이게 생겼으니 이쯤 하자는 거야. 정권은 5년이지만 재벌은 영원하다, 뭐, 그런 논리 아니겠어? 정치하는 사람들로서 괜히 재벌들한테 밉보일 필요 있겠나 싶은 거겠지. 추악한 인간들, 정우한테 돈 안 받아 처먹은 의원들이 얼마나 되겠나? 더럽지만 이게 우리나라 정치 현실인 걸 어찌하겠나.”
전중호 팀장이 먹구름이 잔뜩 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특검님의 의중은 어떠십니까? 설마, 그들과 같은 생각이신 겁니까? 혹시 팀장님도 같은 생각이신 건 아니죠?”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음…… 글쎄.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분이셔서 잘은 모르겠지만 특검님도 요즘 속이 속이 아니실 거야! 요즘 소화도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 특검님 입장을 우리도 좀 고려해드려야 하지 않겠나?”
전준호 차장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팀장님! 우리가 언제 그 사람들 도움받고 일했습니까?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하면 됩니다. 팀장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죄지은 사람은 벌을 받게 해야 한다고! 그게 상식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진정해. 김 부장! 세상일이 다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아니야. 김 부장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기다리긴 뭘 기다린다는 건가? 이러다가, 꼬리마저 놓치게 된다!
“음, 제가 복안이 있습니다. 이 꽉 막힌 이 고구마 정국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야 합니다.”
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뭐? 뚫어?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전중호 차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쪽에서 자꾸 얕은 술수로 여론을 호도한다면 우리도 맞불을 놔야죠. 제대로 카운터펀치를 날려보려 합니다.”
“카운터펀치? 지금 복싱해?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알아듣겠나? 자세히 말해봐. 난, 자네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면 항상 불안불안 해. 물론,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짜릿짜릿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전준호 차장이 눈을 반짝거렸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말도 있잖습니까? 여론을 조작하는 추악한 짓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뼛속까지 느끼게 해줄 겁니다. 그래야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생각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한민족신문, 정치부 기자 박철훈! 그가 정의의 나팔수가 되어줄 겁니다!
나는 머릿속에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교외, 한적한 카페>.
나는 순천지청 시절 윤상원 부장의 주선으로 알게 된 한민족신문의 수석기자 박철훈을 만나기 위해 교외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 민감한 일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오래간만입니다. 김정환 검사님!”
박철훈 기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그나저나 특검에 차출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의구현은 잘 되시고 계십니까?”
그가 환하게 웃었다.
“아뇨. 그래서 제가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검사님이 그런 얼굴을 하시니 긴장되는군요!”
“그… 게 정말입니까? 믿기지 않는군요!”
나는 그에게 아버지 사건의 용의자인 박정호와 그의 배후에 있는 중수부장 김현석의 커넥션 및 박정호가 소유하고 있는 한일 물산이 정우그룹과 정관계 인사 간의 검은 고리임을 낱낱이 밝혔다.
“바… 박 선배님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타살이란 말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박철훈 기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 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네. 15년 전 사고를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의 진술과 그의 유죄를 뒷받침할 만한 증인, 그리고 타살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해 두었습니다.”
“그럼, 뭘 더 망설이십니까?”
그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요즘 정가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관성처럼 오랜 기간 끊어내지 못한 꼬리 자르기의 악습을 되풀이하려고 합니다. 기자님이 저를, 아니 대한민국의 정의를 위해서 도와주십시오! 기자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음, 박 기자님은 저도 잘 알고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예전에 제 사수셨죠. 정말 우리 후배들에겐 버팀목 같은 분이셨어요. 수습기자 시절부터 그분은 저의 롤모델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는 타협을 모르셨던 분이었어요. 워낙, 대쪽 같은 분이셔서 웬만한 진보적 인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요. 당신이 취재한 기사가 자체 검열에서 조금이라도 걸러지면 노발대발하셨습니다. 편집장하고 맞서시던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아버지!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
“검사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신문사가 상당히 진보 성향 언론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님의 기사는 워낙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으셔서 우리가 다 말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후배들한테는 참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항상 우리 편에서 서서 사주와 맞서셨습니다. 우리에겐 정말 든든한 버팀목이셨죠.”
그의 눈빛이 아련해지는 듯했다.
“그…… 러셨습니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었는데, 한 번은 선배님과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신 적이 있었어요.”
그가 15년이 넘은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님! 좀 휘기도 하시고 그러십시오. 그렇게 대쪽같이 뻣뻣하면 누가 알아주기나 합니까?”
승진도 못 하시는 선배님이 안타까워 그에게 물었습니다.
“흠, 내 아들 상우의 꿈이 뭔지 아나?”
뜬금없이 아드님 얘기를 꺼내셨어요.
“네? 글쎄요.”
“음… 녀석의 꿈이 대통령이라더군.”
“그래요? 상우, 이 녀석 꿈 한번 대차네요.”
“근데, 그 이유가 말이야 가관이야. 대통령이 되면 뭐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고 사람들을 신하처럼 부릴 수 있어서 대통령이 꿈이라더군.”
“그런 말을 했습니까? 허허, 그놈 참!”
“가만히 생각해보니 웃을 일이 아니더군. 그 어린 나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랬던 거야. 굳이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돈 있고 권력이 있으면 사람 위에 군림하며 갑질하는 세상, 지금 세상이 그렇지 않나?”
“흐음, 그렇긴 하군요. 상우가 어른이 된 세상은 좀 바뀌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게 자네나 내가 할 일이야. 우리 상우가 자식을 낳아 그 아이가 꿈을 얘기할 때, 적어도 내가 아들놈한테 들었던 말은 듣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 힘으로 힘들다고 포기하면 우리 후세대 또 그 후세대들도 이런 세상에서 고통받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네. 내가 새로운 세상의 밀알이 될 수만 있다면 한평생 후회 없지 않겠나?”
“박 기자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진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신 분이셨죠. 오늘따라 더욱더 그분이 그리워지는군요.”
박철훈 기자의 눈 주위가 벌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가 꿈꾸시던 세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반드시!
나는 양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음… 좋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듯 박철훈 기자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일은 지난번 이길상 사건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는 검찰총장이에요. 굉장히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의지를 확인해야 했다.
“흠, 제가 이 나이에 아들 볼 나이는 아니지만, 우리 손자가 상우 군 같은 이유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면 저승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선배님을 뵙겠습니까?”
“…….”
“흠… 저도 살 만큼 살았습니다. 이제야 사리 분별이 좀 되는군요. 뭐가 옳은지 그른지 이제야 감이 좀 잡힙니다, 그려. 김정환 검사님!”
그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네. 제가 반드시 정의가 살아 있음을 온 세상에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도 김정환 검사님의 의지를 믿어보도록 하죠!”
박철훈 기자가 내 양손을 움켜쥐었다.
* * *
<이틀 후, 한민족신문 1면, 헤드라인>.
[어떤 의로운 정치부 기자의 억울한 죽음 : 15년 전, 본 보의 정치부 기자였던 박윤석 기자는 새벽 트럭에 치여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특집기사는 15년 전 아버지의 죽음과 지금의 정우 그룹 비자금 사건이 연속 선상에 있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다뤘고 본 기사는 일파만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세상을 폭풍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했고 정국은 혼란스러워졌다.
[뭐야? 이게 정말 사실이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깡패를 동원해?]
[결국, 이준구 사장도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거군!]
[배후에 중수부장에 검찰총장까지 헐, 이게 나라냐?]
인터넷을 통해 퍼진 여론은 한여름 장마철 물 불어나듯이 급속도로 휘몰아쳐 갔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는 듯 보였다.
<특검 사무실>.
띠리리링.
전중호 차장의 전화였다.
“김 부장, 이게 축하할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축하해!”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박정호 체포영장 통과됐어. 가서 잡아 와!”
“저… 정말입니까?”
“그래, 그래, 그리고 또 하나 더 기쁜 소식이 있어. 김현석 중수부장 구속영장도 통과됐으니까 이제 자네 맘껏 수사해봐. 하여간, 자넨 진짜 못 말리겠구먼, 못 말려!”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고 했던가?
이제부터, 내가 나설 차례가 온 것 같군! 짜릿한 역전 홈런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