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변수(變數) (2)
“음, 박 선생을 한번 만나려고 하는데 연락이 안 되는군요. 수사관님이 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박 선생이 누구죠? 아… 아! 그 필체 모사하는 양반이요? 이제 생각나네. 박선출 씨!”
“네. 맞습니다. 제가 급히 그분을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전화번호가 바뀌었나 봅니다. 연락이 안 되네요.”
“음… 뭐, 이곳저곳 안테나 세워보면 연락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 양반은 왜요?”
“공 수사관님! 또!”
“죄송합니다. 검사님! 그냥 궁금해서 그러죠.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수배해 보겠습니다.”
흐흐흐, 공 수사관이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네. 부탁합니다. 최대한 빨리 좀 연결해 주세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넵. 걱정 마십시오. 검사님!”
분명히 이준구의 유서는 위조됐을 거야! 박 선생이라면 진실을 밝혀줄 거야!
나는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이튿날, 특검 소회의실>.
“검사님, 곧 있으면 박 선생이 그쪽으로 갈 겁니다.”
공 수사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드디어 찾으셨군요!”
“제가 누굽니까! 동원할 수 있는 똘마니는 죄다 동원해서 찾아냈습니다. 처음엔 나 몰라라 모른 척하더니만 검사님이 찾는다고 하니까 대뜸 가겠다 하더구먼요. 역시 검사님은 끗발이 죽이십니다!”
하하하, 공 수사관이 너스레를 떨었다.
“끗발은요, 무슨? 아무튼, 감사합니다. 나중에 순천 한번 내려갈게요! 돼지껍데기나 먹으러 갑시다.”
“어이쿠, 오신다면야 저야 언제든지 대환영입니다. 돼지껍데기야 신물 나도록 제가 대접합죠. 참! 그나저나 우리 예쁜 장영은 검사님도 잘 계시죠? 어떻게 갑자기 그쪽으로 발령을 받아셔셔서 작별 인사도 못했음요!”
“네. 잘 있습니다. 수사관님도 장 검 얼마나 대찬 여잔지 잘 아시잖아요.”
“크음, 글쵸! 정말 웬만한 남자들은 저리 가라죠. 아무튼, 우리 장 검사님 잘 좀 부탁합니다.”
공 수사관이 마치 자신의 여동생인 양 부탁했다. 하여간, 오지랖은 태평양보다 넓은 사람이었다.
똑똑똑!
“수사관님, 누가 왔나 보네요. 나중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네? 네네네. 알겠습니다.”
“들어오세요!”
공 수사관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허름한 옷차림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 선생!
그는 필체 모사의 달인 박 선생, 박선출이었다.
“박 선생님, 어서 오세요!”
“김 검사님, 오랜만입니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나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와! 여기가 말로만 듣던 특검이군요. 내 생전 처음으로 이런 곳엘 와보고 촌놈이 완전 출세했네요!”
박 선생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검사님 덕에 맘 편안하게 잘 지냈습니다.”
30분여 동안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눈 나는 본격적인 대화로 들어갔다.
“박 선생님, 선생님께서 확인해주셔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준구의 유서를 전달했다.
“음, 이게 그 유명한 유서군요!”
박 선생이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들어 필체를 확인했다. 워낙 매스컴에서 오르락내리락했던 이슈라 그 역시, 단번에 눈치챈 듯했다.
“네. 맞습니다. 이 유서의 필적 감정을 부탁드리려고요.”
“음……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이 사람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음, 자필 서류나 일기장 뭐 그런 건 없습니까?”
박 선생이 유서를 흔들어 보였다.
“네.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이걸 보시면 참고가 되실 거예요.”
나는 박 선생에게 이준구의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음, 검사님이 이런 걸 내밀 때는 뭔가 걸쩍지근하단 소린데… 어디 보자! 얼마나 잘 베꼈는지!”
박 선생이 천천히 다이어리를 넘기며 신중하게 이준구의 필체를 확인했다.
잠시 후,
“흐음…… 검사님, 이건 아무리 봐도 위조가 아닌데요? 누가 이 유서가 위조라고 하던가요?”
탁, 박 선생이 돋보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네? 지금 위조가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준구의 아내분도 남편의 유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봐주세요!”
나는 다시 이준구의 유서를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검사님, 제가 이 짓만 벌써 30년을 했습니다. 그냥 청진기 대보면 진단 바로 나와요! 볼 것도 없이 이건 이준구 본인의 유서가 맞습니다. 정확히 필체가 일치해요!”
박 선생이 관자놀이를 손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유서장을 들고 있던 내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검사님!”
“뭐죠? 뭐 이상한 것이라도 발견했습니까?”
나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박 선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해보시죠!”
조바심이 났다. 나는 마른 입술에 연신 침을 묻히며 그를 주시했다.
“쪼까, 껄적지근 것이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분명, 이준구가 직접 쓴 유서가 맞긴 한데 그의 유서가 아닐 수도 있겠는데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멘트였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검사님! 제가 저것 좀 써도 되겠습니까?”
박 선생이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물론입니다.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이 모든, 이 일로, 안타깝다. 등등]
슥슥 쓱, 박 선생이 단상 쪽으로 나가더니 마커를 들고 보드에 몇 개의 단어를 적어 넣었다.
“이준구의 유서에서 발견된 반복된 단어들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겁니까? 제가 보기엔 평범한 단어들인데요.”
“당연히 문제가 심오하다 마다요. 자… 지금부터 설명 들어갈 테니 맘 단단히 잡수십시오. 검사님!”
박 선생이 가볍게 코를 쥐고 흔들었다.
“모든 필체엔 그 사람만의 독특한 특성이 드러나게 돼있어요. 아마도 이준구, 이 사람은 굉장히 꼼꼼하고 깔끔한 성격일 겁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사람이죠. 자… 보시죠!”
휘리릭, 박선생이 이준구의 다이어리를 펼쳐들었다.
“이상한 것을 못 찾으시겠습니까?”
“글쎄요. 글자 간격이 좀 촘촘한 것 말고는 특별해 보이는 것이 없는데….”
유심히 살펴봤지만 별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바로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이준구의 다이어리에 적힌 자간은 매우 촘촘하죠. 이 사람, 분명 꼼꼼한 성격입니다. 암요! 제가 장담합죠. 아무튼, 각설하고 이와 달리 이 유서의 자간은 굉장히 넓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그건 뭘 뜻하는 거죠?”
그의 말대로 유서의 자간이 다이어리의 자간보다 훨씬 넓었다.
“음… 장담할 순 없지만, 이준구가 글을 쓸 당시에 상당히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죠! 그러니, 평소와는 다르게 자간이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글에 집중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박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외부의 압박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음… 그럴 확률이 높긴 하지만 자살하기 직전이라면 외부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상당히 흔들렸을 테니 외압이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지만, 이것을 보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탕탕, 박 선생이 화이트보드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래! 유서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계속 말씀해 주시죠!”
“네. 이준구는 매사 깔끔하고 꼼꼼한 성격이에요. 그래서 글을 쓸 때도 쓸데없는 조사나 지시어로 글자를 낭비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유서 속에는 ‘이’라는 지시어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박선생이 이준구의 다이어리 중 몇 문장을 칠판에 옮겨 적었다.
[사업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다.]
[사건을 크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보십시오. 불필요한 지시어가 들어간 문장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그의 말대로 필요한 단어만 사용한 간략한 문장이었다.
“게다가 이준구는 ‘안타깝다’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서에는 계속 반복되죠!”
[우리 딸이 시험에 떨어져서 애석하다.]
“이준구는 ‘안타깝다’란 단어 대신 주로 ‘애석하다’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특징인 거죠. 아무리 죽기 직전에 쓴 유서라 해도 평소 자신의 글 쓰는 습성을 버리진 않거든요.”
“박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준구의 유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이 바로 이거군요!”
막혔던 기도가 뚫린 듯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받아쓰기!”
“받아쓰기!”
박 선생과 나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
“맞아요! 누군가 이준구를 위협해 받아쓰게 한 겁니다!”
“빙고!”
박 선생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누군가 이준구에게 위력을 가해 유서를 쓰게 한 거야! 분명, 이준구가 순순히 유서를 쓸 만큼 그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었던 거겠지! 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유서를 쓰긴 했지만 죽음의 순간, 그도 두려웠을 거야! 당연히 반항했을 테고… 맞아! 베란다! 베란다 난간이 휘어진 이유도 그 때문이야!
그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검사님! 검사님!”
내가 넋을 잃고 깊은 생각에 빠져있자 박 선생이 반복해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얽혔던 실타래가 풀린 것 같습니다.”
“흠……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박 선생이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제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준구에게 유서를 쓰게 한 놈들은 악질 조폭이거나 사채업자일겁니다. 그것도 악질 중에 최악질 놈들의 짓이죠. 이런 짓은 이길상도 안 한다.”
카악 퉤, 박 선생이 가래침을 모아 휴지통에 뱉어버렸다.
조폭이라…… 이거 느낌이 쎄하군!
“…….”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박 선생이 주섬주섬 옷가지와 가방을 챙겼다.
“여기까지 힘든 걸음 하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아뇨,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게 볼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내려가 봐야 해요.”
그가 정중히 거절했다.
“진짜, 감사합니다. 박 선생님!”
“아닙니다. 김 검사님처럼 이렇게 열정적이고 정의로운 검사는 난생처음이군요! 앞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오르시더라도 지금 이 마음, 잊지 마십시오!”
박 선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참! 검사님! 주제넘은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실타래가 엉켰을 때 가끔은 싹둑 잘라버리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암튼, 꼭 범인 잡으십시오!”
“네? 네에. 알겠습니다.”
쾅, 그가 가방을 둘러메고 무심히 문을 나섰다.
가위로 과감히 잘라버린다…….
흐음,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