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화] 반전의 서막 (1)
“정 검사님, 뭘 찾았다는 겁니까?”
“목격자를 찾았습니다! XX산에서 박장우를 목격했다더군요.”
정 검사가 목소리 톤을 높이며 흥분했다.
“목격자요? 확실합니까?”
“네.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수연이 사망한 시점과 유사한 시기에 박장우를 목격한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인근에서 산책하던 그가 사진까지 찍어서 보관하고 있었더라고요.”
“사진이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네.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지만, 확실히 박장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음… 일단 지검으로 빨리 들어오세요. 저도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부장님! 바로 지검으로 가겠습니다.”
하늘이 돕는군! 사진이라… 이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공판을 연기할 수 있어!
<김정환 부장실>.
“부장님! 오셨습니까?”
정 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먼저 와계셨군요.”
“아…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목격자가 박장우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나는 서둘러 외투를 벗어 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네. 확실합니다. 목격자가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제가 몇 장을 인화해서 가져왔습니다. 보시죠.”
정 검사가 노란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훤칠한 키에 단단한 몸매, 거기에 눈에 띄게 긴 팔!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박장우가 맞다!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하산하는 남자의 사진이었다. 사진이 흔들려 정확히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은 박장우가 틀림없었다. 특히나, 남들보다 한 뼘은 더 긴 듯한 팔이 틀림없이 박장우였다.
게다가 박장우의 사진이 찍힌 장소는 이수연이 암매장된 장소와 불과 50m 떨어진 지점이고 특히, 사진에 찍혀진 날짜는 이수연이 사망한 날짜와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이 사진을 어떻게 확보하게 된 거죠?”
“산책하던 지역 주민, 한상수 씨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한상수 씨가 박장우의 열혈팬이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확실히 그를 알아봤다고 합니다. 산에서 급히 내려오던 박장우를 알아보고 찍어둔 사진이라더군요.”
“음, 그런데 좀 이상하군요. 박장우가 자신이 사진에 찍힌 걸 알았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요? 어떡하든 사진을 없애려 했을 텐데요?”
나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의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사실, 저도 그 부분이 의문이었는데, 그 분말로는 아마 자기가 사진 찍는 걸 몰랐을 거라고 하네요.”
“왜죠?”
“자기가 몰래 찍은 이유도 있지만, 박장우가 모자를 눌러쓰고 뭔가에 쫓기듯이 정신없이 뛰어갔다더군요. 뭔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대요. 그분이 사인을 받으려고 뒤쫓아가면서 이름을 불렀는데도 못 들은 눈치였더랍니다.”
맞아! 당황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
“…….”
“게다가, 이거 좀 보십시오. 이게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정 검사가 특이한 모양의 펜던트와 박장우의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 박장우가 차고 있던 목걸이 펜던트와 동일한 문양이었다.
“같은 모양이군요.”
나는 사진과 펜던트를 번갈아 유심히 쳐다보았다.
“네. 맞아요. 이것도 박장우가 떨어뜨린 건데, 한상수 씨가 주어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나 봅니다. 박장우가 이수연을 암매장한 후, 정신없이 산에서 내려오다 펜던트를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펜던트가 박장우의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제가 알아보니 이게 예전에 도미니카에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구입한 펜던트더군요. 스포츠 방송에도 몇 번 언급된 적이 있었어요. 당시 클래식에 참가한 선수들에게만 제공했던 한정품이라 국내에서 판매된 적이 없습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손이 빠른 사람이었다. 정 검사가 나름대로 사전에 조사해둔 모양이었다.
이 정도 정황과 증거면 충분히 공판을 연기할 수 있다!
“정 검사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주 중요한 증거를 잡아 오셨습니다. 가뭄의 단비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장님에 비하면 새 발에 핍니다!”
하하하, 정 검사가 상기된 얼굴로 광대를 씰룩거렸다.
“정 검사님, 국과수에 사진 분석을 의뢰해주세요. 이 사진이 분명히 박장우의 사진이 맞는다면 이수연 타살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넵. 바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장우! 너, 딱 걸렸어!
정 검사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리고, XX산 주변도 다시 한번 샅샅이 뒤져봐 주세요. 분명,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나올 겁니다. 이 정도 서툰 뒤처리라면 뭔가 실수가 더 있었을 겁니다. 또, 최근에 박장우가 부동산을 구매한 이력이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특히, XX산 주변의 한적한 별장이나 아니면 빌라 같은 것이면 더 좋겠군요. 물론, XX산 주변에 박장우나 가족, 친인척 소유의 부동산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넵! 알겠습니다!”
정 검사가 차례 자세를 취하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을 가득 메우는 듯했다.
<조진호 판사 자택>.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기에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한밤중에 조진호 판사의 자택을 방문했다. 현재로선 이 방법 말고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부장님, 사안이 너무 급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흠… 듣던 대로 열혈 검사 맞으십니다그려!”
껄껄껄, 조진호 부장판사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음, 그래도 우리 집을 찾아주신 손님인데 차라도 한잔하시죠.”
“여보, 여기 차 좀 내와요!”
“네. 알았어요.”
“부장님, 아닙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도 송구스러운데….”
나는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도 아직 잠이 덜 깨서 정신이 맑지 못하군요. 차라도 한잔해야 김 부장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조진호 부장판사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죄…… 송합니다.”
“자… 이제, 정신도 맑아졌으니 이 밤중에 제집을 찾아주신 이유나 한번 들어볼까요? 뭐가 이렇게 우리 김 부장님을 설레게 했을까요?”
조진호 부장판사가 천천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네. 우선 이 서류를 먼저 봐주십시오.”
나는 자료를 분석해 정리한 문서를 그에게 전달했다.
“흠. 그럼 어디 볼까요?”
조진호 부장이 안경을 낀 후, 천천히 서류를 읽어나갔다.
잠시 후,
“흠… 이거 반전이군요.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이 자료, 꽤 심각한 자료인데요?”
조진호 부장판사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팔짱을 끼었다.
“네. 보신 바와 같이 이수연의 죽음은 한유리 사건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수연이 유일한 목격자니까요!”
“흠… 그럼, 확보된 증거품들은 국과수 검증을 받아둔 겁니까? 검증이 되지 않은 자료는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시죠?”
“네. 물론입니다. 일부는 이미 검증을 마친 상태고 일부는 지금 검증 중입니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증거 등록을 해두겠습니다.”
“후, 이쯤 되면 제가 김정환 부장님을 한 번 도와줘야 하나요?”
조진호 부장판사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이수연이 촬영한 사건일 파일을 찾아오겠습니다.”
“음… 좋습니다. 김 부장님을 한 번 믿어보죠. 정명수 변호사는 어떡하든 설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짝, 조진호 판사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입 모양을 일자로 만들었다.
“3주만 주십시오. 3주 안에 반드시 스모킹 건을 찾아오겠습니다.”
“3주라… 이거, 3주 후면 세상이 발칵 뒤집히겠구먼…… 좋습니다. 3주 드리리다. 아무튼, 그 안에 반드시 그 동영상 찾아오셔야 합니다. 김 부장님!”
“네. 반드시 찾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날,
<서울고등법원, 재심 전담 판사실>.
조진호 판사가 공판일을 연기하기 위해 박장우의 변호인, 정명수 변호사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뭐라고요? 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공판을 연기하다뇨?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정명수 변호사가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음… 정 변호사님, 그렇게 흥분하시지 마시고, 검사 측에서 수사가 좀 미진하다고 하니 시간을 좀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자… 진정하시고 이거 좀 마시세요!”
조진호 부장이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그에게 내밀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공판 하루 앞두고 연기라뇨? 나, 무능한 검사라고 대놓고 제 얼굴에 먹칠하는 것 아닙니까? 이럴 거면 상고는 왜 한 거야? 에이!”
화가 전혀 누그러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정명수 변호사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떡합니까? 김정환 검사도 이번 일을 맡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봅니다. 수사의 진척이 없나 보더군요. 게다가, 법리 싸움에서도 변호사님과 상대가 되지 않잖습니까? 그리고 변호사님도 검사셨잖습니까! 후배를 생각해서 좀 시간을 줍시다. 김정환 부장도 뭔가 체면치레는 할 수 있는 거리를 가지고 있어야 이 재판에 명분이 설 것 아닙니까? 넓은 아량으로 좀 봐주십시다. 얼떨결에 사건 맡아서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닌가 보더군요.”
“후배요? 후배는 무슨 후배예요? 전, 그따위 근본도 없는 지방검사 출신을 후배로 둔 적 없습니다.”
흠, 흠, 흠, 정명수 변호사가 헛기침하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 허락하신 거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조진호 부장판사가 은근슬쩍 못을 박았다.
“흠… 알겠습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다만, 이번뿐입니다. 더 이상의 자비를 담아둘 만큼 큰 그릇이 못 됩니다. 전!”
정명수 변호사가 마지못해 조진호 부장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입장에선 담당 판사와 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검사 측에 통보하겠습니다!"
허허허, 조진호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너털거렸다.
흠, 이건 타협이 아니고 일방적인 통보군!
“그저 부장님 얼굴 봐서 이번 한 번만 넘어가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허허, 이거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그 인간에다 그놈이라더니… 무능하긴! 하는 짓이 똑같아!”
쯧쯧쯧, 정명수 변호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전중호 차장과 나를 염두에 둔 말인 것 같았다.
* * *
<김정환의 오피스텔>.
한유리 사건 1차 공판기일 일주일 전,
조진호 부장판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공판기일을 연기할 수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한유리 사건의 스모킹 건이 될 수 있는 이수연의 동영상 파일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설마, 파일 원본을 박장우가 가지고 있는 건가?
일반적이라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원본 파일을 넘기진 않았을 텐데….
이수연 씨! 도대체 어디에 파일을 숨겨둔 겁니까?
나는 오피스텔 창에 붙어있는 이수연과 관련된 자료들을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저… 저건 뭐지?
그 순간, 이수연의 시체 사진이 내 시야를 잡아당겼다.
손…… 손이 왜 저리지?
이수연의 오른손이 이상했다. 숫자 2를 표시하는 것처럼 검지와 중지가 펼쳐진 채 굳어있었다. 정확한 모양은 아니었지만 분명 숫자 2를 나타내는 형태였다.
숫자 2를 표시한 건가?
나는 그녀의 사진을 떼어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숫자 2라… 숫자 2?
다잉 메시지!
마… 맞아! 이건, 이수연이 죽기 직전까지 뭔가를 나 타려고 한 게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