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정의구현 가신다-75화 (75/170)

# 75

[75화] 결정적 단서 (2)

<김정환 부장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 여자 주방으로 들어간다. 음식을 만들고 있다. 안 돼! 건들지 마. 그건 나만 쓸 수 있는 성스러운 그릇이야! 내가 오빠를 위해 사다 놓은 그릇이라고! 죽여버릴 거야.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거야!]

험악한 문구와 함께 양손이 잘린 한유리의 사진까지…….

보…… 고 있었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수연은 박장우와 한유리의 사생활 전부를 보고 있었어! 아니, 관찰하고 있었다.

다이어리를 읽고 있던 손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것이 그녀가 죽은 이유이다! 이수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

박장우의 모든 사생활을 영화 보듯 알 수 있다면? 그것도 집 내부 생활까지?

이수연은 박장우의 집에 몰래카메라가 설치해 놓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한유리가 사망한 일에 관한 영상도 남아있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가 된다!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어!

이수연이 찍은 몰래카메라 영상을 반드시 찾아야 해!

나는 눈꺼풀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없다! 여기까지가 전부야!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다음 페이지를 열었지만, 누군가 찢어낸 흔적만 있을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이어리엔 사건일에 관한 기록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한유리가 죽던 일 기록은 물론, 그 이후에 일기를 쓴 흔적은 없었다.

이제야 이상필 씨가 지금까지 숨겨왔던 이수연의 다이어리를 내게 건네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딸의 다이어리를 발견한 이상필 씨는 자신의 딸이 혹시나 한유리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거야! 아버지의 입장에선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딸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더 다이어리를 숨길 이유가 없어진 거지! 그 역시, 딸의 죽음이 이 다이어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띠리리링.

“여보세요! 저 김정환입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이상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에, 검사님!”

“아버님, 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수연 씨 다이어리 일부가 찢겨나간 흔적이 있는데 혹시….”

“보셨군요. 제가 찢은 것이 아닙니다. 찢겨 있더군요. 제가 딸애의 다이어리를 발견했을 때 이미 찢겨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 페이지가 남아있었다면 충분히 법적 증거가 될 수 있었기에 너무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아버님 혹시, 이 다이어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습니까?”

“아뇨. 이 다이어리는 집사람도 모릅니다. 아마 알면…….”

이상필 씨가 말을 잇지 못했다.

“잘하셨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겐 말씀하시지 말아 주십시오!”

“네. 검사님! 전, 검사님만 믿겠습니다. 우리 불쌍한 수연이 눈이라도 감을 수 있게 꼭, 범인을 잡아주세요.”

이상필 씨가 흐느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 검사님, 제 방으로 오십시오!”

“네. 부장님!”

“정 검사님, 이수연이 죽은 시점을 전후로 박장우의 행적을 조사해 주세요. 비밀리에 진행하셔야 합니다.”

나는 헐레벌떡 달려온 정 검사에게 당부했다.

“음… 역시, 이수연의 죽음이 박장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군요!”

정 검사가 입술을 일자로 만들며 말했다.

“특히, 이수연이 변사체로 발견된 지역을 중심으로 탐문을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관할 경찰서엔 이미 조치를 해뒀습니다. 탐문을 하다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올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장우가 야구 배트를 구매한 내역이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부장님, 박장우는 투수잖아요? 배트를 구매할 일이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더욱더 확인하셔야 할 겁니다. 반드시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현금으로 구매했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주요 용품업체를 중심으로 샅샅이 뒤져봐야 할 거예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서두르세요!”

“아… 아아! 알겠습니다!”

정 검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목소리 톤을 높였다.

* * *

<국가 디지털 포렌식 센터>.

박장우가 거주하고 있었던 오피스텔에는 총 132대의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로 복도, 주차장,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것이었다. 한유리 사건이 터지자 검찰은 CCTV를 압수해 확인했지만, 사건일, 박장우와 한유리의 행적에만 초점을 맞춰 조사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분명, 이수연의 모습이 잡힐 거야.

나는 132대의 CCTV 화면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압수해 디지털 포렌식 검사를 의뢰했다.

“연구원님, CCTV 화면이 복구됐습니까?”

“네. 하지만, 일부 화면은 복구를 하지 못했어요. 현재로선 이것이 최선입니다.”

연구원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네. 그럼 화면 좀 볼 수 있을까요? 특히, 한유리가 죽은 3일 전후, 일주일간의 화면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네. 지금 재생하도록 하겠습니다.”

연구원이 천천히 영상을 재생시켰다.

“잠시만요. 멈춰주세요!”

“네.”

맞… 아! 이수연이 틀림없어!

화면이 재생되자 이수연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피스텔 로비에서 그리고 지하주차장에서 그리고 박장우의 오피스텔 정문 앞에서 이수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때로는 박장우와 같이 때로는 이수연 혼자였다.

“연구원님! 화면 멈춰주세요!”

엘리베이터 CCTV에 잡힌 이수연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유유히 박장우의 오피스텔로 걸어 들어갔다.

“저… 거 뭐 하는 거지?”

연구원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이수연이 혼자, 박장우의 오피스텔 현관 도어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부장님, 저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는데요? 어떻게 된 거죠?”

연구원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흠…… 그렇군요. 저도 좀 당황스럽습니다.”

이수연은 마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듯이 자연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고 약 2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박장우의 오피스텔에서 나와 밖으로 나갔다. 거의 3일에 한 번꼴로 오피스텔을 드나드는 모습이었다.

“음…… 없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검색해 봐도 사건일, 이수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역시, 없습니다.”

연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게다가, 이수연은 한유리가 죽은 이후에도 CCTV 화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수연의 자택>.

분명 이수연은 사건 현장을 담고 있는 파일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반드시 그 파일을 찾아야만 한다!

나는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이수연의 자택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네. 실례하겠습니다.”

이상필 씨가 표정 없는 얼굴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초상집 같은 분위기군.

집안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수연의 모친은 정신적 충격과 탈진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동생 역시, 충격으로 군대에 자원입대한 상황이었다. 이상필 씨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제가 이수연 씨 방을 좀 들어가 봐도 될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이상필 씨에게 물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가 이수연의 방을 안내했다.

음… 특별한 것이 없다!

단정하게 꾸며진 방, 방안은 여느 20대 여성의 방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벽에는 박장우의 대형 브로마이드와 자신이 직접 찍은 듯한 박장우의 사진 외에는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

그 흔한, USB 디스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컴퓨터는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아버님, 이 컴퓨터 제가 좀 가져가도 되겠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가리켰다.

“네. 그렇게 하시죠.”

이상필 씨가 힘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언제라도 뭔가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뭐라도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김정환 부장실>.

띠리리링.

나는 곧바로 이수연의 컴퓨터를 국가 디지털 포렌식 센터에 검사 의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연구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떻게, 하드디스크는 복원이 되었습니까?”

“그… 게. 복원은 했지만, 부장님이 원하시는 파일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예상대로였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했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별거 없어요. 동영상이라고는 박장우의 경기 장면, 박장우가 나온 TV 프로그램이나 인터뷰 장면이 전부입니다.”

“혹시, 파일을 삭제한 흔적은 없습니까?”

“네. 몇 개 파일을 삭제한 흔적이 있어서 전부 복원했는데 특별히 단서가 될 만한 영상은 잡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컴퓨터에 영상 파일을 보관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디에?

“음… 그렇군요. 아무튼, 복구한 영상과 데이터는 전부 저에게 보내주십시오.”

“네. 그렇지 않아도 이 수사관에게 전부 보내뒀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음… 박장우는 자신의 집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이사한 것이겠지! 그 몰래카메라를 이수연이 설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녀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녀를 죽였다는 것은 몰래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어딘가에 백업파일이 있을 거야. 분명히!

후, 재심 첫 공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군!

<서울고등법원, 재심 전담 판사실>.

일단, 사건일 영상 파일을 찾을 때까진 공판을 연기해야 한다. 나는 공판기일을 연기하기 위해 담당 부장판사, 조진호 부장 방을 찾았다.

“음… 부장님 사정은 충분히 알겠지만 재심 공판 연기는 불가합니다.”

부장판사, 조진호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부장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10일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스모킹 건을 찾아오겠습니다.”

“음, 저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지만, 피고 측에서 가만있겠어요? 상대는 정명수 변호사예요. 그 사람 성질 알잖아요? 게다가, 증거를 못 찾아서 연기한다고 하면 시작부터 밀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공판을 연기할 명분이 없어요.”

조진호 판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힘들어요. 게다가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초미의 관심사가 된 사건이라고요. 김 부장님 사정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재판을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설사 제가 연기 신청을 받아들인다 해도 정명수 변호사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판 끌고 갈 걸요? 현재 상황에선 그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니까 말입니다. 타협해줄 이유가 없어요.”

“흠, 알겠습니다.”

“김 부장님!”

“네?”

“다만, 공판을 미룰 수 있을 만한 증거나 설득력 있는 정황을 가져오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연기해보겠습니다.”

조진호 판사가 돌아가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네. 알겠습니다. 판사님!”

* * *

한유리 살인사건 재심, 첫 공판 이틀 전.

결국, 나는 스모킹 건이 될 수 있는 영상 파일을 찾지 못한 채, 첫 공판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후, 쉽지 않겠는데…… 일단 어떡하든 버텨야 한다. 영상을 찾을 때까지!

지이이잉.

그 순간, 정 검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 검사님, 무슨 일이죠?”

“부장님!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정 검사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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