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화] 윤곽(輪廓) (2)
“그 일이라면 내가 자네에게 해줄 말이 없다는 뜻이야.”
강 부장이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부장님이 그 사건을 진두지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더 내가 할 말이 없다는 거야. 그만 돌아가게.”
강 부장이 내 시선을 외면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혹시, 외압 같은 것이 있었던 겁니까?”
“흠, 외압은 무슨? 그런 거 없어. 자네도 내가 인수인계한 수사 자료를 검토해 해봤으니 알겠지만 말이야, 나 역시 자네가 알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네. 그러니 내가 무슨 조언을 할 수 있겠나?”
강 부장이 몸이 불편하지 어깨를 좁히며 인상을 찡그렸다.
“몸이 많이 불편하십니까?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이렇게 투석을 한 번 하고 나면 기운이 없어. 나 좀 쉬어야겠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강 부장이 배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네… 빨리 병실로 들어가시죠.”
“고맙네.”
나는 일어나 그의 팔을 부축해 병실 침대에 뉘어주었다.
<병실>.
“부장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만? 아니, 앞으로도 오지 말게. 나를 그냥 좀 놔두게. 부탁이야. 김 검사!”
강 부장이 연신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기색이 무척 아픈 듯 보였다.
이 사람은 분명 뭔가를 알고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흠… 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김 검사!”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자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네?”
“자네 혹시, 도광양회(韬光养晦)라는 말을 아나?”
강 부장이 뜬금없이 한자성어를 들먹였다.
“네? 알긴 하지만…….”
“흠……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란 뜻이지. 좋은 말이긴 한데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것이 독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 그것도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단 말이지.”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흠…… 자네 정말 이 사건, 감당할 수 있겠나? 내 생각엔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은데 말이야.”
강 부장이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뇨.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는 막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대로 놔두면 어떤 일이 더 벌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범인을 검거해야 합니다.”
나는 침대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단호히 말했다.
“음… 그렇다면 할 수 없군. 내가 한 가지 힌트를 줄 테니 더 날 괴롭히지 말게. 그럴 수 있겠나?”
강 부장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말해 줄 테니 그다음은 자네가 알아서 해결하게. 송민준의 미국 생활을 좀 들여다보시게. 아마도 그게 도움이 될 거야.”
“송민준의 미국 생활이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야. 더 알려고 하지 말게. 아무튼, 난 지금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니 더 날 찾지 말아 줘. 진심으로 부탁하네.”
강 부장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동자에 왠지 모를 공포가 베여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더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눈빛, 나는 더 그에게 질문할 수 없었다.
“고맙네. 아무튼, 자네도 몸조심하게나.”
음… 천하의 서울중앙지검 강력부 부장검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존재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현우 검사? 아니면 그의 아내, 송민주?
나는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분명, 강 부장은 뭔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심적 압박을 받고 있어.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버스 창가에 앉아 손톱으로 창을 툭툭 치며 생각을 정리했다.
도광양회라…… 이 말은 분명 송민준을 뜻하는 말일 거야.
그런데 그것이 독이 된다? 송민준이 잠행을 마치고 경영일선에 올라선 것을 뜻하는 것일 거야. 그런데 그것이 독?
송민주로선 송민준의 귀환이 당연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룹의 승계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상대! 그녀로서는 송민준을 가만히 둘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강 부장이 독이라고 말한 거야.
강 부장 역시, 송민준이 범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비록 배다른 형제라 해도 피를 나눈 형제인데 자기 동생을 이런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만큼, 권력 승계가 대단한 것인가? 하긴, 수양도 권력을 위해 조카와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지 않은가?
‘그나저나, 우리 처남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거든. 물론, 결론적으론 무죄 판명이 나긴 했지만 말이야.’
그 순간, 이현우 검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현우 검사가 분명 송민준이 미국에서 어떤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고 했다. 좀 전에 강 부장 역시 그의 미국 생활을 살펴보라고 했고, 그래. 분명, 두 사람의 말에 접점이 있을 거야.
띠리리링.
“박 수사관님, 저 김정환입니다.”
“네. 검사님! 병원은 다녀오셨습니까?”
“네. 지금 지검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죄송한데 수사관님, 급히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말인데요.”
“자료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송민준이 미국에 있을 때, 어떤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나 봅니다. 그 자료 좀 알아봐 주세요. 경찰 조사를 받았거나 아니면 법정에 섰던 경험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정도 자료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최대한 빨리 취합해 보고 올리겠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좀 부탁할게요. 그리고, 최대한 보안 유지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분명, 뭔가 접점이 나올 거야!
어느새, 버스는 지검 앞에 도착해 있었다.
* * *
<전중호 차장실>.
나는 강 부장 면회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전중호 차장을 찾았다.
“그래? 강 부장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의외로군.”
나는 강 부장이 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 물론, 송인준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전중호 차장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혹시, 강 부장님이 이번 수사를 맡으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글쎄.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아, 원래 강 부장이 거친 사건을 많아 맡아서 처리해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 적을 안 하는데, 사실 이 사건 맡으면서 살도 부쩍 빠지고 얼굴도 많이 야위었었어. 난, 그냥 일이 좀 되나 보나 했지. 특별한 낌새는 전혀 없었거든.”
전중호 차장이 턱 주위를 긁어내렸다.
“그 밖에 다른 건 없었습니까?”
“특별히 티가 나는 건 없었어. 그러다 갑자기 급성신부전이 와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지. 참, 오히려 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부터 몸은 아파도 표정은 한결 나아지긴 했지. 수사도 지지부진해서 스트레스가 많았거든. 그래서 차라리 병원에 드러누운 것이 편했나 싶었지.”
“그렇군요.”
“그래서, 허탕을 친 겐가?”
“아뇨.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수사는 어떻게 진전이 좀 있나?”
“음…… 지금 조사 중입니다.”
“그래. 천천히 차근차근 가자고. 너무 서두르면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야. 그럼 수고하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
전중호 차장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참, 식사는 한 겐가? 난 지검장님과 식사 약속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전중호 차장이 손목시계를 내려보며 말했다.
“네. 정리할 일도 좀 있고 해서 조금 있다 간단히 시켜 먹으려고 합니다.”
“그래그래. 끼니 거르지 말고 몸 챙겨가면서 일해. 강 부장처럼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안되는 거야.”
강 부장, 이 사람,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니 진저리가 나나보군!
허허허, 전중호 차장이 허탈하게 웃으며 옷을 챙겨 입었다.
<김정환 검사실>.
똑똑똑!
“검사님, 접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박 수사관이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검사님, 벌써 10시예요. 일도 중요하지만, 이거라도 좀 드시죠.”
박 수사관이 테이블 위에 신문지를 깔고 초밥 도시락을 올려놓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나는 기지개를 켜며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네. 아무리 수사도 중요하지만 그러시다 병나실까 걱정입니다. 이거 한 시간은 줄 서야 겨우 먹을 수 있는대서 사 왔습니다. 좀 드셔보세요. 맛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박 수사관이 엄지를 추켜올렸다.
“네. 수사관님이 저 때문에 고생이 많네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야 이 짓이 천직인데요. 밤새는 거야 이젠 이골이 났습니다. 뭐….”
박 수사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송민준 자료는….”
“검사님! 체하겠습니다. 일단 드시죠. 아무래도 비밀리에 자료를 확보하려니 좀 시간이 걸리네요. 제가 알아서 완벽히 취합해 보고 올리겠습니다. 자자 드세요. 이거 오래되면 맛없어요.”
박 수사관이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여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같이 드십시다.”
“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박 수사관의 말대로 맛이 기가 막힌 초밥이었다.
"그렇죠? 진짜 살살 녹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을 내려놓고 박 수사관과 잡담을 하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이거 뭐야?”
그렇게 식사를 하는 도중, 갑자기 박 수사관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세상에 인면수심이 따로 없지. 이런이런….”
끌끌끌, 테이블 위에 깔린 신문기사를 읽던 박 수사관이 혀를 차며 도리질을 했다.
“무슨 기사인데 그러세요?”
“아…… 네. 보험 사기 관련 기사인데, 보험금을 타려고 자기 동생을 죽였네요? 평소엔 그렇게 우애가 돈독했다고 하더만… 어휴, 진짜! 세상 무섭네요.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박 수사관이 초밥을 우물거리며 인상을 썼다.
“그러게 말입니다. 점점 사회가 삭막하게 변해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거겠죠?”
“맞아…… 요.”
‘아! 그리고 송민준 상무가 낯을 많이 가려서 친한 사람이 없는데 매형인 이현우 검사와는 사이가 좋았나 보더라고요.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고 하네요.’
그 순간, 장 검이 내게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우애가 돈독해?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그렇다면…… 분명 그곳일 거야!
“재즈 카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네? 재즈 카페요? 갑자기 거긴 왜요?”
“아… 아니에요.”
“수사관님, 저 지금 급히 가볼 데가 있어서요.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일어났다.
“네? 이 밤중에 어딜 가시려고요. 아무리 급해도 식사는 마저 하시죠.”
깜짝 놀란 박 수사관이 도시락을 든 채, 따라 일어났다.
“아니에요. 많이 먹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밥 한번 살게요. 수사관님.”
“어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박 수사관이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아뇨. 밤늦었는데 수사관님은 이만 퇴근하세요.”
“뭐. 저야 상관없지만, 네…… 알겠습니다.”
이거 어떡하죠? 제가 치워야 하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도시락을 가리키며 난감해 했다.
“아냐 아뇨. 놔두세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신데….”
박 수사관이 도시락을 치우며 물었다.
“음…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요. 나중에 다녀와서 정리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곳에서 뭔가 나온다! 반드시!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