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60화] 윤곽(輪廓) (1)
장 검이 보내준 자료의 내용은 H 그룹의 후계구도였다. 최근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H 그룹의 송 회장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시종일관 장자 상속을 고집했었다. 당연히, 그룹 승계의 1순위는 장자이자 H 건설 대표이사 송민규였고 2순위는 H 패션의 대표이사 송민주, 송 회장의 장녀이자 이현우 검사의 부인이었다. 물론, 차남 송민준은 애초부터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 의학을 전공해 미국의 존스홉킨스에서 흉부외과 전문의 생활을 했으므로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배다른 형제였기에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변수가 발생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송민규가 사망하자 그룹의 후계구도의 추는 장녀 송민주로 급격히 쏠렸다. 항간에는 여걸인 송민주가 송민규를 교통사고로 가장해 제거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했다.
어쨌든,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송민준이 급하게 귀국했고 잠잠하던 후계자 싸움에 불이 붙은 것이다. 비록, 배가 다른 형제였지만 송민주와 송민준은 남매지간이었다. 그러나, 그룹 승계라는 대의 앞에 서로 피 튀기는 경쟁할 수밖에 없었고 둘 사이는 그로 인해 급격히 악화된 상황이었다.
여기까지가 장 검이 보내준 내용이었다. 미처 내가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분명 얘기는 180도 달라진다!
송민준이 범인이라면 아니, 범인이 되어 준다면 가장 웃을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김 검,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 좀 해봐.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며칠 전, 나를 찾아왔던 이현우 검사를 떠올렸다.
이현우 검사가 목소리 톤을 높였지만,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 떨림조차 없었다. 오히려, 또렷한 발음이었다.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심장이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뭐? 미쳤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처… 아니 송 상무가 뭐가 아쉬워 사람을 죽인다는 거야?’
게다가, 송민준이 박정은 살해 용의자란 말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우 검사는 송민준을 용의자로 단정 지어 말했다.
‘내가 알기론 이미 위쪽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거 명심해. 만약, 결정적 증거를 잡지 못하면 당신 옷 벗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를 무시하며 협박하는 태도로 보였지만, 이미 윗선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주었다. 게다가, 이 정도 증거로는 송민준을 잡을 수 없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기까지 했다.
나는 차근차근 얼마 전, 내방을 찾아왔던 이현우의 태도를 떠올리며 정리해 나갔다.
그는 지금 송민준을 변호하는 게 아니었어!
게다가, 이현우 역시 송 회장의 일가에 속한다. 분명 그도 세기 양복점에서 만든 슈트를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벽에 붙여둔 박정은이 찍은 사진을 떼어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체격 또한 이현우 검사와 흡사했다.
“장 검! 이 자료 확실한 거야? 출처가 어디지?”
나는 급히 장 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확실할 거예요. 주간 경제신문사에 다니는 친구한테서 나온 소스거든요. 아마도 언론에 노출된 자료는 아닐 거예요. 경제부 기자들만 암암리에 유통되는 증권가 지라시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요?”
“그래? 내가 미처 몰랐던 자료라서, 암튼 고마워! 수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진짜 조만간 순천 내려가서 밥 한번 살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뻐요.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신문 보면서 선배님 응원할게요. 파이팅! 아! 그리고 송민준 상무가 낯을 많이 가려서 친한 사람이 없는데 매형인 이현우 검사와는 사이가 좋았나 보더라고요.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고 하네요.”
둘 사이가 친할 리가 없는데?
“그래? 아무튼, 너무 고마워!”
“네. 선배님 힘내세요!”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양 볼에 상큼한 보조개가 피었을 것이리라!
장 검 덕분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서울 외곽, XX 카페>.
나는 모든 것이 오픈된 합동 수사본부를 피해 극비리에 한적한 곳으로 강상중 팀장과 박 수사관을 호출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설명했다.
“서…… 설마? 이현우 검사가 그럴 리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검사님! 그 인간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끔찍한 일을…….”
박 수사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저도 아직 100%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사관님과 팀장님도 극비리에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절대 우리의 동선이 노출되어서는 안 돼요.”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짐을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네. 검사님!”
“이거 참,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박 수사관이 볼을 부풀리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선, 박 수사관님은 최근 2년간 확인되는 이현우 검사의 모든 행적을 조사해 주세요. 친구를 만나든, 가족여행을 떠났든 사소한 것이라도 잡아낼 수 있는 건 잡아내야 합니다. 특히, 피해자들이 죽은 시점에 초점을 맞춰야 할 거예요. 비밀이 새나가지 않게 특히 신경을 쓰셔야 할 겁니다.”
“후, 네.”
“그리고 강 팀장님은 피해자들 주변에 연관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을 탐문해 주십시오. 역시,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취합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검사님!”
강상중 팀장 역시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두 분 다 절대로 이현우 검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각별하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나, H그룹 기조실에서도 우리를 주목하고 있을 거예요. 절대 수사가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두 사람의 눈을 응시하며 눈을 맞췄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검사님!”
박 수사관과 강상중 팀장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우 검사실>.
나는 전중호 차장의 당부도 있고 그의 의중도 살펴볼 겸 이현우 검사실을 찾았다. 마침, 이현우 검사가 자신의 방에 있었다.
“선배님, 저 김정환입니다.”
“어, 김 검사! 들어와.”
생각외로 이현우 검사가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선배님, 이번 일은 제가 좀 경솔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아냐 아냐. 수사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나도 너무 흥분했어! 김 검이 이해해줘.”
탁탁, 이현우 검사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그러면 이제 우리 송 상무는 결백하다는 것이 증명된 건가?”
이현우 검사가 턱을 매만졌다.
“음…… 완전히 용의 선상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 정도면 된 거지. 우리 처남이 앞으로 H 그룹을 이끌어갈 사람인데 이런 일에 휩쓸리면 되나? 아무튼, 잘 좀 마무리해줘.”
“…….”
“그나저나, 우리 처남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거든. 물론, 결론적으론 무죄 판명이 나긴 했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 이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잠잠해질 만하니 이런 일이 일어난 거 아닌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
이현우 검사가 코끝을 찡그렸다.
지금 이현우 검사는 묻지도 않은 그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털어놓고 있다! 송민준의 과거를 뒤져보면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음…… 그러니까 알아서 잘 좀 마무리해줘. 앞으로 김 검사 앞날에 우리 처남이 도움이 될지 어떻게 알겠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이현우 검사가 손잔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도움을 준다? 마치 그가 진범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 * *
일단, 현재로서는 이현우 검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심증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박 수사관과 강상중 팀장이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 온다면 의외로 편한 수사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나는 전중호 차장의 조언대로 강상수 부장을 만나 보기로 결심했다.
“박 수사관님, 저 오늘 강 부장님 면회를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강 부장님이요? 아, 맞다! 부장님 아직 병원에 계시지?”
박 수사관이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 이곳으로 온 후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한번 찾아뵈려 합니다.”
“음… 부장님, 급성신부전이라고 하던데, 회복은 하셨나 모르겠네요. 그게 쉽게 낫는 병이 아니라던데….”
박 수사관이 걱정스러운 듯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튼, 다녀올 테니 제가 부탁한 일은 차질 없이 처리해 주세요.”
“네. 지금, 모든 안테나를 동원해서 조사 중입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 가져오겠습니다. 검사님!”
박 수사관이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천광역시, XX 종합병원>.
나는 강 부장을 만나기 위해 인천에 있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그는 급성신부전으로 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이분을 만나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를 거야!
1003호실이라….
나는 호실 안내판을 두리번거리며 병실을 찾았다.
“1003호, 강상수… 여긴가보군.”
“부장님, 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십니까?”
그 순간,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 부장이었다.
“아… 강상수 부장님이십니까?”
“네. 제가 강상수입니다만 누구신지…….”
“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중앙지검 강력부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이번에 순천지청에서 우리 쪽으로 발령받은 김 검사군요.”
그가 가볍게 이마를 두드렸다.
“네….”
얼굴이 부종으로 퉁퉁 부어 있는 모습이 중증 환자가 틀림없었다.
“이거 받으시죠.”
나는 그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남사스럽게 뭔 이런 걸 가지고 오나?”
강 부장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을 몰라서 가져왔습니다.”
“음… 이런 걸 주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용건이 있어서 왔을 테니 밖으로 나감세. 여기 너무 답답해서 말이야.”
강 부장이 바깥쪽 정원을 가리켰다.
“네.”
.
“이거 마시게. 김 검사.”
강 부장이 캔 음료 두 개를 가져와 나에게 내밀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으신 겁니까?”
“신부전증이 다 그렇지 뭐. 음, 어쩜 이렇게 병을 얻은 것이 행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강 부장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암 것도 아닐세. 그나저나 차장님은 잘 계시나?”
“네.”
“그 양반이야 일 중독이니 여전하겠지. 그나저나, 나를 찾은 이유가 뭔가? 단순히 인사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강 부장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게,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을 강 부장님께서….”
“음… 그 일 때문이라면 돌아가게,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어!”
강 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뭔가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다는 건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