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53화] 거짓에 관한 진실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 (4)
<김정환 검사실>.
“검사님, 검사님을 뵙겠다고 누가 찾아왔습니다.”
박 수사관이 헐레벌떡 내 방으로 들어왔다.
“누구요? 누가 찾아왔다는 거죠?”
나는 하던 일을 멈추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연쇄 살인사건 7번째 피해자, 박정은의 동생이라는데 검사님께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는데요?”
“박정은의 동생요?”
당황스러웠지만 어쩌면 그녀가 중요한 단서를 가져올 것만 같았다.
박정은!
올 초에 잔혹하게 살해된 30대 초반의 7번째 피해자였다.
“네. 어떡할까요?”
박 수사관이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 * *
“앉으시죠.”
“네.”
박 수사관이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자와 함께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맘고생이 심했는지 초췌한 모습이었다.
“박정은 씨의 동생이시라고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네. 제가 얼마 전에 죽은 박정은의 동생, 박상은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그녀는 올 3월에 연쇄살인범에게 죽은 박정은의 동생이었다. 박정은은 남편과 사별 후, 노래방 도우미를 하며 근근이 생활해 왔으며 두 명의 아이와 동생 박상은과 함께 살던 중 변을 당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 게….”
상은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괜찮습니다.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검사님이 상은 씨를 도와줄 겁니다.”
상은이 잔뜩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박 수사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베테랑다운 행동이었다.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몰라서 가져왔어요.”
그녀가 가방을 열어 조심스럽게 USB를 내밀었다.
“이…… 게 뭐죠?”
“언니가 실종되기 바로 전 날밤에 저한테 보낸 사진이 들어있는 파일입니다.”
쿵!
그 순간, 양발이 땅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펜을 잡고 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확인해 보세요.”
“네.”
나는 노트북에 켜 USB 속에 담긴 내용물을 검색했다. USB 안에 담긴 것은 사진 한 장 전부였다.
사진 속에 등장한 인물은 분명 블랙 슈트를 입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물론, 사진을 찍은 사람의 손이 심하게 흔들렸는지 화면이 흐려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남자의 뒷모습이 확실했다.
“박정은 씨가 보낸 사진이 확실합니까?”
“네. 확실해요. 그날 제가 일을 하고 있어서 바로 확인을 못 했어요. 그때 바로 확인만 했어도 언니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너무 늦게 확인하는 바람에… 언니는 그날 이후, 실종됐고 며칠 뒤에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됐어요."
흑흑흑, 상은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혹시, 이 사실을 경찰에 말씀은 해보셨습니까?”
“네… 당연히 경찰서에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박 수사관도 긴장했는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시했어요. 언니가 노래방 도우미를 했다는 것만으로 성매매하려던 남자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우리 언니, 비록 노래방 도우미를 하긴 했지만 그렇게 함부로 성매매 같은 거 할 사람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상은 씨, 진정하세요.”
박 수사관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밖에 경찰 쪽에서 다른 얘기는 없었나요?”
“음… 그리고 범인이 잡혔으니 사진을 지우라고 했어요. 수사에 혼선을 가져올 수 있다면서….”
꿀꺽, 그녀가 침을 삼켜 넘겼다.
뭐? 지우라고? 충분히 결정적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도대체 뭘 하지는 건가?
“계속 말씀하시죠?”
“그래서 경찰이 보는 앞에서 사진을 지웠어요. 다행히, 혹시 몰라 컴퓨터에 백업을 받아 뒀는데, 너무 이상해서 이렇게 가지고 왔어요.”
“뭐가 이상했다는 거죠?”
“그러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TV를 봤어요. 언니를 죽인 범인이 잡혔고 TV에서 현장 검증을 하는 그의 모습이 나왔어요. 근데, 언니가 보내준 사진과는 너무도 달랐어요. 비록 사진이 흐릿하긴 하지만 키나 덩치가 전혀 그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녀가 연신 손톱을 물어뜯었다.
분명 지정수와는 다른 체격이다. 지정수는 키가 작지만, 사진 속 주인공은 대략 키가 180cm는 돼 보였다. 게다가, 확실할 순 없지만, 고급 블랙 슈트에 구두!
지정수의 경제상태를 고려했을 때, 그런 옷을 살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옷차림새가 평소 지정수의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의 과거 사진들을 봤을 때도 정장 차림을 하고 찍은 사진은 전무했다.
“혹시, 이 사진을 저 말고 또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까?”
“아뇨. 경찰서에 가져간 사진은 형사님 앞에서 삭제했어요. 아마 제가 백업을 받아 놓은 사실은 모를 게에요. 제가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검사님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박상은 씨, 이 사진을 이곳에 가져왔다는 소리는 어디에도 하시면 안 됩니다.”
눈치 빠른 박 수사관이 그녀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나를 쳐다봤다.
“…….”
나는 그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용기 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검사님, 꼭 진범을 잡아서 억울한 우리 언니의 한을 풀어주세요.”
흑흑흑, 그녀가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이걸로 좀 닦으시죠. 아직 100% 확신할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잠시 후,
“검사님, 경찰들 말대로 박정은이 성매매하려던 남자가 아닐까요?”
박상은을 배웅하고 돌아온 박 수사관이 코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뇨.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그녀는 단 한 번도 성매매해 본 적이 없어요. 그것 때문에 도우미 업체와 트러블이 상당했죠. 충분히 돈을 더 벌 수 있었지만, 그녀는 결코 성매매는 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그곳까지 알아보셨습니까? 대단하시네요.”
박수 사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검사님, 이거 뭔가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요?”
그녀를 내보낸 후, 박 수사관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음…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듯합니다.”
“음… 그렇다면 차장님의 촉이 맞아 들어간다는 소린데….”
박 수사관이 턱을 매만지며 천정을 응시했다.
“일단, 수사관님은 국과수에 의뢰해서 이 사진을 얼마나 복원할 수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네. 검사님!”
“그리고, 박정은이 죽은 날, 지정수의 행적을 반드시 살펴야 할 겁니다. 지정수는 술과 도박에 절어있던 인간이라 근처 술집이나 도박장, 아! 그날이 토요일이니 과천경마장이나 아니면 스크린 경마장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 뭔가 걸려도 걸릴 겁니다.”
뭐야? 이 사람 보통내기가 아니잖아?
“그렇군요. 네에….”
박 수사관이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묻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지정수 거주지로 가서 양복이나 구두가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상황이 급합니다!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탁탁, 나는 손바닥을 마주쳐 그를 독려했다.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3일이면 될까요?”
문을 열고 돌아가려던 그를 멈춰 세웠다.
“그… 게, 검사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죠.”
헤헤, 박 수사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부탁합니다.”
“넵! 일주일 안에 낱낱이 털어오겠습니다.”
한결 적극적으로 변한 모습의 박 수사관이었다.
차장님 말대로 죄를 처벌해야지, 그것을 이용하려고 들면 안 되는 거지!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주일 후,
<김정환 검사실>.
박 수사관은 그가 말한 대로 딱 1주일 만에 모든 자료를 취합해 내 방을 찾았다.
“검사님,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무엇을 기대하시든 그 이상일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박 수사관이 모든 정보를 펼쳐 놓고 꼼꼼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가 조사한 내용은 분명, 이 사건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킬 팩트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박정은이 사망한 사건일, 지정수는 과천경마장에 있었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검사님 말대로 지정수는 그날 경마장에서 돈을 좀 땄는지 지인들과 함께 룸살롱에서 진탕 술을 마셨나 봅니다. 분명, 사진이 찍힌 시각은 밤 11시, 사망 시각은 12시 전후로 확인했습니다. 그 당시, 장한평의 XX 룸살롱에 지정수가 밖으로 나간 시간은 새벽 한 시, 게다가 장한평에서 사망 지점인 신정동까지 거리는 택시를 타도 대략 30분, 타임머신을 타지 않고는 지정수가 사진에 찍힐 일은 없었겠죠.”
박 수사관이 양손을 모아 비비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지정수의 집은 가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이게 지정수의 신발장과 옷장을 찍은 사진인데 양복은커녕 비슷한 것도 없더군요. 신발들은 죄다 운동화와 슬리퍼뿐이었어요. 그 흔한 구두 한 짝 없었습니다. 아… 캐주얼 양복 같은 것이 하나 있긴 했는데 촌스러운 흰 바탕에 파란 줄무늬 양복이 다였습니다.”
박 수사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들 봐라! 이러면 안 되지!
“그래요? 음… 그럼 국과수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점점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데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음… 완벽하게 복원할 수는 없었는데 기존 것보단 확실히 선명해졌습니다. 보시죠!”
박 수사관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아래에서 위쪽을 향해 찍은 사진!
분명, 다리부터 어깨 부위까지만 찍힌 사진이었으나 분명, 지정수의 몸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명품일 것 같은 슈트와 구두!
분명 연쇄살인범은 지정수가 아니다!
“검사님, 제가 백화점에 가서 이 자가 입고 있는 양복에 대해서 좀 확인을 해봤는데요.”
역시! 공 수사관과는 차원이 다른 그였다.
“뭐라고 하던가요?”
“음… 아무래도 이건 기성복은 아니고 수제 양복과 구두일 확률이 높다네요? 게다가 상당히 고가일 가능성이 크다는군요.”
“확실합니까?”
“네. 제가 서울 유명 백화점은 죄다 돌아다녀 봤는데 한결같이 그러더군요.”
됐어! 이젠 잡았어!
“네. 수고많으셨습니다. 수사관님!”
<지검 소회의실>.
나는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브리핑하기 위해 전중호 차장의 방을 찾았다. 전중호 차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지금부터 지정수 관련 연쇄살인 사건에 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기대되는군! 시작하지.”
전중호 차장이 안경을 꺼내 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상기된 표정이 적잖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나는 기존의 분석 자료에 박 수사관이 조사한 자료를 더해 작성한 보고서를 그에 제출하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1시간 남짓, 나는 모든 조사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했고 말없이 매의 눈으로 나의 프레젠테이션을 지켜보던 전중호 차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김 검사! 그럼, 이젠 내가 좀 나서야 할 때인가?”
탁탁, 전중호 차장이 브리핑 자료를 책상에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