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28화] 간계(間計) vs 반간계(反間計) (2)
<김정환의 아파트>.
회식을 마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길상파, 이길상을 잡겠다? 역시, 윤 부장다운 배포 군. 하지만 길상파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닌데…….
길상파는 그렇게 녹록한 존재가 아니었다. 방대한 조직도 조직이지만 엄청난 자금력을 확보한 기업형 조폭이었다. 표면적으로는 8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견실한 중견기업이었다. 게다가, 두목 이길상은 그의 특유의 친화력으로 인해 여수, 순천 지역의 정관계 인맥이 상당히 두터웠다. 사실, 이 지역은 그 만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단순한 조폭이 아니었다.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이길상을 잡겠다는 윤상원 부장의 배포가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킹 메이킹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메마른 목소리, 하지만 이젠 친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카드를 선택하시오]
홀로그램 화면에 카드가 랜덤하게 뿌려졌고 나는 카드 하나를 터치했다.
[인물 힌트권]
인물 힌트권?
뒤집힌 카드에 써진 단어였다.
[인물 힌트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YES!
[이메일을 확인하시오.]
이번엔 무슨 내용일까?
호기심이 생긴 나는 지체없이 컴퓨터 전원을 켰다. 역시 발신이 없는 메일이 도착해 있었고 파일 하나가 첨부돼 있었다.
딸각, 나는 첨부된 파일을 열어보았다. 동영상 파일이었다.
<인적이 드문 야산>.
한 남자가 검은색 비닐봉지에 얼굴이 가려진 채, 양팔과 다리가 묶여 흙구덩이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고 세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열심히 흙을 퍼 담고 있었다. 남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버둥거리며 지렁이처럼 꾸물거렸다. 어느새 흙더미가 그의 허리 높이로 차오르고 있었다. 온몸을 흔들며 자신의 몸 위로 떨어지는 흙을 털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제풀에 지쳤는지 거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
남자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비닐봉지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시 튀어나왔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꿈틀거렸다.
“야.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냐? 어디서 이런 게 수작질이야? 아주 나, 이도식을 호구로 본 모양인데. 너 사람 잘못 봤다. X새야!”
도식이란 이름의 남자가 구덩이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다그쳤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용 문신이 꿈틀거렸다.
“…….”
남자는 연신 고개를 흔들며 신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촤르르르.
도식이 옆에 있는 부하의 삽을 뺏어 들더니 흙을 한 움큼 퍼서 남자의 얼굴에 뿌렸다.
허억, 허억.
흙 세례를 받은 남자가 공포에 질려 머리를 흔들었다.
“너희 같은 대가리에 먹물 박힌 것들은 말로 해선 안 돼. 너희들은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는 족속들이야.”
도식이 다시 삽을 주워 들더니 흙을 퍼 담았다.
“아이고 허리야, 이것도 일이라고 졸라 힘드네. 담배나 하나 피워야 쓰겄다.”
도식이 건성건성 몇 번 삽으로 흙을 퍼 담더니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이 한 마디였었네…….”
도식이 몸을 삽에 의지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해 넘어간다. 얘들아 마저 묻어드려라.”
그가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구둣발로 짓이겨 버리고는 삽을 내던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네, 형님!”
그의 부하들이 삽을 들고 흙을 퍼 담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사… 살려주세요.”
남자가 필사적으로 목청을 높이며 울부짖었다. 비닐봉지에 가려져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분명,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꼴에 살고는 싶냐?”
도식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부하들에게 중지를 명령했다.
“야! 저 새끼 비닐봉지 풀어줘!”
“네.”
부하들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남자의 얼굴에서 비닐봉지를 벗겨주었다.
쿨럭, 쿨럭.
남자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거친 기침을 쏟아내며 흙더미를 뱉어냈다.
저… 정훈이!
그는 충격적이게도 내 친구, 한정훈 검사였다. 그 순간, 나는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정훈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나는 좀 더 동영상을 봐야 했다.
“그러니까 네 정체를 말하라고 그러면 그 아깐 목심은 살려준다고!”
도식이 다시 쭈그리고 앉아 또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 저는 순… 천….”
띠리리링.
그 순간, 도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네.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됐어?”
“이 방법을 써서 안 되는 놈은 지금껏 단 한 놈도 못 봤습니다. 지금 입을 열 것 같습니다.”
“차질 없이 처리하고 들어와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뭐라고? 다시 말해봐.”
남자가 전화를 뒷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순천지청 한… 정훈 검사입니다.”
정훈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검사? 시X, 감동적이네. 그렇지! 예상대로 검사 나부랭이였어. 어쩐지 짭새 냄새가 진동하더라니…… 가만있어 봐. 순천지청이면 너 김정환이도 잘 알겠군. 그놈이 시킨 거야?”
“네… 에.”
정훈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시켜? 이건 무슨 소리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개새끼, 역시 그 새끼 작품이었군. 역시 하늘은 무심치 않구먼. 신이 우리를 돕는구나. 좋아, 잘 됐어! 우리가 그 인간한테 빚이 있지 아마?”
도식이 부하들을 쳐다보며 비열한 미소를 흘렸다.
“네. 이번에야말로 망치 형님 그렇게 가신 거 복수해야죠.”
“야. 한정훈이! 들었지? 하느님이 보우하사 내가 여기서 널 꺼내줄 거거든. 운 좋은 줄 알아.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좀 도와야겠다.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훈이가 선택할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좋아, 좋아. 바로 그거지. 그래야 가방끈 답지. 그런데 우리가 널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뭐든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다한다고? 야. 저 새끼 끌어내.”
“네.”
부하들이 구덩이로 내려가 정훈이를 끌어올렸다.
“음… 어떻게 한다. 내가 웬만하면 너희 같은 것들한테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잘 믿질 못하는데, 어디 보자. 뭐가 좋을까?”
도식이 정훈의 지갑을 들춰보더니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너네 부모냐?”
그가 정훈에게 사진을 내보였다.
“네.”
“그래그래, 졸라 닮았네. 딱 봐도 붕어빵이야. 안 그러냐?”
도식이 부하들에게 사진을 내보이며 킥킥거렸다.
“나는 원래 의심이 많은 놈이라서 한 번 배신한 너 같은 놈을 도저히 믿을 수 없거든? 그래서 말인데, 내가 보험을 들어둘까 하는데 말이야. 일단 이 두 노친네를 내가 접수할 거야. 검사까지 할 정도로 똑똑한 놈이니까 그게 무슨 소린지는 알아먹겠지?”
“네? 제발, 우리 부모님은 건들지 말아주십시오.”
정훈이 도식의 발밑에 꿇어앉은 채 애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우리 말만 잘 들으면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시X, 이 사진 보니까 우리 엄마 졸라 보고 싶어지네.”
도식이 정훈의 몸을 일으켜 세워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하라는 대로 뭐든 할 테니 우리 부모님만큼은 건들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아놔. 이 새끼, 졸라 효자야. 멋지다. 멋져!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돼!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도식이 정훈의 뺨을 툭툭 치며 비아냥거렸다.
킹 메이킹 시스템이 나에게 제공한 파일은 여기까지였다.
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정훈이한테 저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사람들이 반팔 셔츠를 입고 있다면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뜻인데?
[순천시민을 위한 여름맞이 캠핑 축제]
게다가, 동영상 속에 언뜻 보이는 현수막은 매년 순천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 홍보 현수막이었다.
그렇다면 이 동영상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망치와 연관이 있다면 저자들은 길상파 조직원이 틀림없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파악해야 했다.
일단 김정환의 기억을 살펴보자!
[김정환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성화합니다.]
이심전심인가? 때마침, 킹 메이킹시스템이 김정환의 기억이 담긴 디렉토리를 화면에 띄웠다.
길상파, 이길상…….
인물별로 정리된 폴더를 터치하자 이길상과 관련된 사건 파일이 쏟아져 나왔다.
순천 XX 나이트클럽 살인사건, 여수 건설부지 강제 매입 사건 등등 이길상과 관련된 사건 내역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김정환 이 인간! 나름대로 자기 살길은 찾아놓고 있었군.
한상길과 김정환이 리베이트를 받고 이길상의 편의를 봐준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김정환은 문제가 될 만한 큰 사건에는 한 발짝 물러나 있었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선에서 그들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내가 볼 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날 밤, 나는 동영상을 수십 번 되돌려 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 * *
이튿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지청에 출근한 나는 정훈의 방을 찾아갔다.
“김 검사님?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아, 아냐! 별일 없지?”
“별일이 있겠어요. 이 촌구석에?”
정훈이 입을 삐죽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그래, 그럼 수고해ᆞ.”
“무슨, 말씀하시러 온 거 아니세요?”
정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그냥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들렀어. 그럼 일해!”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네에.”
다행히 정훈이는 별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동영상은 미래에 벌어질 일이라는 것이 확실해지는데,
왜일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얽혀 복잡해졌다.
<김정환 검사실>.
그날 오후, 장 검이 황급히 내 사무실에 찾아왔고 동영상 비밀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선배님! 부장님이 급히 찾으시는데 무슨 일이죠?”
장 검이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아. 지금 올라가려던 참이야.”
“선배님도 부르셨군요.”
“어.”
“무슨 일일까요?”
“가보자고. 올라가 보면 알겠지.”
<윤상원 부장실>.
“어서들 오게. 앉지!”
윤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장 검과 나를 맞이했다.
“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궁금했는지 장 검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허허, 뭐가 그렇게 급한가? 우선 차 한잔들 하면서 얘기합시다.”
“네.”
“와! 정말요? 진짜, 로맨틱하시네요. 사모님 진짜 좋으셨겠다.”
“그렇게 되나?”
우리는 차를 마시는 동안 그저 서로의 사적인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를 말해주겠네. 내가 이곳에 부임해 사건 기록을 살펴보니 이길상과 연관된 사건이 유난히 많더군. 그런데 이상한 게…….”
윤 부장이 본격적으로 이길상과 연관된 사건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역시, 윤상원 부장답군.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이미 이길상과 연관된 사건들의 상세 내역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길상파를 쳐내야겠어. 그들은 절대로 가만두면 안 돼. 독버섯처럼 이 지역에 퍼져나갈 거라고. 반드시 솎아내야 하는 암적인 존재야. 그래서 내가 두 사람을 부른 거야.”
“부장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저도 그 인간 언젠가는 잡아 처넣고 싶었어요. 이제야 검사복 입은 보람을 느낄 수 있겠네요.”
장 검이 반색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장 검!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야. 이길상은 이미 동네 양아치 수준이 아니라고.”
“선배님,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그 인간 이대로 뒀다가는 순천을 넘어 전라도 전체가 그 인간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장 검이 주먹을 불끈 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하하하, 좋아. 그 정도 패기면 이 게임 승산 있겠는데?”
윤 부장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길상과 전면전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직 특별한 건 없어. 하지만, 두 사람은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게 좋아."
윤 부장이 손으로 자신의 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네. 부장님!”
장 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일단 장 검은 가서 일 보도록 하고 김 검은 나랑 얘기 좀 하지.”
“헐, 부장님! 차별대우하시는 건가요?”
장 검이 아랫입술을 살짝 꼬집었다.
“차별은 무슨? 김 검이 여기 최고참이니까 업무상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농담이에요! 그럼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장 검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김 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장 검이 밖으로 나간 것을 재차 확인한 윤 부장이 내 눈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