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화] 정환의 각성 & 간계(間計) vs 반간계(反間計) (1)
[주문 : 피고인 정한수를 무기징역에 처한다. 피고인 정한수는….]
법정 공방이 치열했던 김진웅 사건의 최종 선고는 무기징역이었다. 정한수는 간신히 사형은 모면했지만 결국, 중형을 선고받았다. 워낙 명백한 증거와 증인이 확보된 터라 정한수 측에서도 항소도 포기한 상황이었다.
“김정환 검사, 진짜 사람 많이 변했네.”
“재판 봤어? 난, 찌릿찌릿해서 바지에 지릴 뻔했다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점점 사람들은 나를 달리 보게 됐고 나? 아니 김정환은 정의로운 검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 * *
<아파트 앞 놀이터>.
격동의 재판이 끝나고 나는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상우야!”
어디선가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엄… 마.”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한 아이가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 그의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
“어 그래, 우리 상우! 학원 잘 다녀왔어?”
“어. 엄마. 나 오늘 학원에서 시험 봤는데 100점 맞았다!”
아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시험지를 내밀었다.
“정말? 우리 상우 최고네!”
나는 한참 동안을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렇다! 나는 박상우가 아닌 김정환이었다.
그날 밤, 침대 위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후, 술이나 한잔 마셔야겠다.
술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밤이었다.
벌컥, 벌컥.
냉장고에서 캔맥주 5개를 꺼내 마신 난, 간신히 눈을 붙였고 희한한 꿈을 꾸었다.
끼이익, 쾅!
마주 오던 트럭이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빗길에 미끄러지며 횡단보도를 덮쳤다.
‘어머 어머, 저걸 어째? 죽었나 봐!’
‘쯧쯧, 젊은 사람 같은데 어떡하니, 어떡해!’
지나가던 행인들이 멈춰 서서 웅성거렸다.
이게 뭐지?
내가 교통사고로 죽었던 바로 그 장소, 집 앞 건널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몸을 더듬어보았다. 멀쩡한 내 몸, 차에 치인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내…… 가 아니잖아?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져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내 뒤를 따라 길을 건너던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꿈속에서만큼은 나는 간신히 사고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형사소송의 절차는…….’
이어지는 다음 장면,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화면이 바뀌었고 수많은 수강생 앞에서 내가 강의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다음 화면은 길거리에서 내가 청중들을 향해 유세하는 장면.
그리고, 그다음은…… 광화문 광장, 그리고 수많은 촛불들! 사람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듯 이어진 화면은 내가 TV 토론에 나와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청와대, 그리고 수많은 청중,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화답하는 나!
마치 파노라마처럼 화면들이 스치며 지나갔다.
허억!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는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나?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내가 이런 꿈을 꾼 걸까? 내가 너무 간절해서였을까?
꿈에서처럼 그날 내가 교통사고를 모면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이 꿈이 내게 뭔가를 알려주려 한 거라면? 만약에 그 사고로 내가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가 본 장면은 나의 미래일 수도 있단 말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심기를 어지럽혔다.
분명히 정치하는 모습이었어. 정치하는 나의 미래!
그것은 나의 오래된 꿈이었다.
그래! 분명 뭔가에 의해 내 인생이 뒤틀렸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전능자가 있다면 그가 실수했던 것이 틀림없어! 난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거야!
꿀꺽, 나는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확실해. 내가 김정환의 몸속으로 들어온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야.
신의 실수에 대한 보상!
내 몸은 이미 망가졌으니 다시 돌려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겠지. 그렇지 않다면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허무맹랑한 상상이었지만 이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킹 메이킹 시스템은 내 주변을 맴돌며 나를 돕고 있다. 이건 분명 그들의 실수에 대한 보상이 틀림없다는 증거! 그렇지 않고는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론은?
신의 실수로 내가 뜻하지 않게 죽은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는 김정환의 몸속으로 들어온 것. 하지만, 내 미래는 그 사고로 인해 뒤틀리고 말았고 결국 그것을 보정하기 위해 킹 메이킹이란 시스템이 가동된 것이다!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킹 메이킹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오랜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군!
[지금부터 김정환의 모든 기억을 데이터베이스화하겠습니다.]
데이터베이스?
[시간별, 사건별 김정환의 모든 기억은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디렉토리 별로 저장됩니다. 또한, 필요 시 언제든지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불쑥불쑥 그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가?
촤르르.
유년 시절, 청소년기, 20대…….
그 순간, 홀로그램 상태창 디렉토리 별로 정리된 폴더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어!
지금부터 김정환이 나고 내가 김정환인 거야! 김정환은 껍데기일 뿐, 나 박상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이제부터 제대로 내 신념을 펼쳐보는 거야!
나는 양 주먹에 힘을 주며 상태 창을 응시했다.
* * *
<순천 시내 모 선술집>.
어느덧 세월은 흘러 2008년 봄, 검찰의 상반기 대규모 인사이동으로 인해 순천지청도 크고 작은 인사이동이 있었다. 우리 형사 3부도 이 검사가 청주지청으로 발령받는 인사이동이 있었다.
우리는 형사 3부를 떠나는 이 검을 위한 환송회를 조촐하게 준비했다.
“이 검! 그동안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앞으로 우리 형사 3부는 김 검이 접수하는 거야!”
이 검사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검사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른 건 하나도 아쉽지 않은데 우리 어설픈 윤아, 장 검을 못 보는 건 쪼금 아쉽네.”
이 검사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선배님, 뭐예요 진짜! 솔직히 제가 윤아보다 못 한 게 뭐가 있어요? 얼굴 되지, 몸매 되지, 게다가 성격… 음…… 그건 좀 아니네!”
장 검이 얼굴을 내밀며 입을 삐죽거렸다.
“하하하, 차마 성격 좋다는 소린 못하는가 보군.”
“자! 그건 그렇고 우리 거국적으로 한 잔들 하자고! 순천지청 최강 형사 3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박 검사가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위하여!”
오랜만에 뭉친 우리 형사 3부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꽃을 피웠다. 밤이 깊었지만, 그 누구 하나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 후임은 누가 오는 거야?”
“그게, 특이하게 서울서 오나 봐”
“그래? 서울 살다 여기 오면 적응하기 힘들 텐데 고생 좀 하겠군.”
“이름이 뭐래?”
이 검사가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게, 뭐라더라? 들었었는데….”
“한정훈! 한정훈 검사라고 그랬어요. 음… 제가 아는 개진상 중에도 한정훈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만 아니길 바랄 뿐이죠!”
딸꾹! 장 검이 숟가락을 들어 올리며 비틀거렸다.
헐! 한정훈?
푸웁, 하마터면 입속에 있던 술을 뿜을 뻔했다.
“선배님 왜 그러세요? 속 안 좋으세요?”
“아냐 아냐, 신경 쓰지 마.”
서…… 설마 내 친구 한정훈은 아니겠지!
“참! 이번에 부장도 온다는데 누군지 알아? 아마 김 검도 깜짝 놀랄걸?”
박 검사가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누군데 그렇게 뜸을 들여?”
“윤상원 검사!”
“네? 정말요?”
장 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골 특수통 출신, 윤상원 부장!
사법 연수원 19기 출신으로 대학교 1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천재형 검사였다. 대학 동기이자 사법 연수원 동기인 우현우 검사와 향후, 검찰을 이끌어갈 인재로 총망 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과 업무 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우현우는 명석한 두뇌와 통찰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반면에 윤상원은 호탕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남자다운 성격 탓에 주변의 신망이 투 더웠다. 하지만, 그의 그런 성격이 결국 발목을 잡고 말았다. 중수부 제2과장으로 재직 시절 재벌수사하는 과정에서 윤상원 감사는 검찰 수뇌부의 목에 칼을 겨눴지만 그 대가는 처절했다. 결국, 미운 털이 박힌 그는 이곳 순천지청으로 좌천된 것이다.
아무튼,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분 중에 한 분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 지난번에 재벌을 건드렸다가 제대로 찍혔나 봐.”
“정말? 그럼 좌천된 거네. 캬, 진짜 오지네. 결국, 이렇게 밀려나는 건가?”
이 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한 부장하곤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
“우리 이러다 과로사로 죽는 거 아냐?”
“몰라.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고, 오늘은 먹고 죽자!”
“건배!”
* * *
얼마 후,
<시내 선술집>.
예상대로 윤상원 검사가 우리 팀, 부장으로 왔다.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호탕한 성격은 어느새, 우리 팀에 녹아들어있었다. 어느 정도 업무를 파악한 윤상원 부장이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술자리에서 설왕설래하며 하마 평에 올랐던 두 사람은 여지없이 맞아 들어갔다.
강골 특수통 출신, 윤상원 부장은 그렇다 치고, 또 한 사람…….
“자… 한 잔씩 합시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윤상원 부장이 잔을 높이 들었다.
“건배!”
“환영합니다. 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윤상원 부장이 잔을 높이 들었다.
“건배!”
“환영합니다. 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난히 장 검의 표정이 밝았다. 그녀 역시, 윤상원 부장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야, 영은아! 이런 데서 너를 보다니 진짜, 이게 무슨 인연 이래니?”
그 순간, 낯선 남자 하나가 장 검에 옆에 떡하니 붙어 치근덕거렸다.
“어휴, 내가 여기서 선배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진짜 어이없다.”
장 검이 살짝 비켜 앉으며 혀를 내둘렀다.
대학 동기, 한정훈! 나 역시, 네놈을 이렇게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 검은 대학 후배였다. 나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바로 입대했으니 그녀를 만날 일이 없었지만, 군 면제였던 정훈이는 그녀와 학교생활을 줄곳 같이 했었다. 장 검의 반응으로 볼 때, 둘 사이가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정훈이 가끔 그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당시엔 관심이 없어 지나쳤는데 지금보니 그 여학생이 장 검이었던 모양이다. 세상 참 좁다!
“선배님, 제 잔 한잔 받으시죠?”
어느새, 취했는지 정훈이 비틀거리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여전하구나. 한정훈!
“어…… 그래.”
그가 내 잔에 소주를 채웠다.
“딸꾹, 자… 알 부탁합니다.”
“어? 이거 어디서 났어요? 내 친구가 가지고 있던 건데? 좀 자세히 봐도 돼요?”
그 순간, 정훈이가 내 포켓 속에 꼽혀진 만년필을 가리켰다.
“어… 어, 그냥. 별거 아냐! 그냥 문구점에서 산 거야.”
화들짝 놀란 나는 만년필을 꺼내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정훈이도 이 만년필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거 내 친구 거랑 똑같은데… 그 만년필 보니까 그놈 생각이 나네요.”
“왜? 그 친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어?”
박 검사가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죽었어요. 교통사고로… 똑똑한 놈이었는데…….”
“그렇구나. 쯧쯧, 안됐네.”
야, 인마. 내가 네 친구, 박상우야!
하마터면 이럴 뻔했다.
잠시 후,
후후, 여전히 넉살은 어디 내다 버리지도 않았네!
“자자! 선배님들 제 술 한잔 받으시죠!”
침통했던 표정도 잠시, 정훈은 소주병을 들고 돌아다니며 동료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나저나, 선배님! 대학은 어디 나오셨어요?”
다시 내 옆자리로 돌아온 정훈이 뜬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이미, 상당히 취한 모습이었다.
“…….”
“정훈 선배! 지금 취했어요? 그런 걸 여기서 왜 물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민망했는지 장 검이 정훈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 뭐,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잘못이야? 혹시 우리 선배일지도 모르잖아!”
“XX 대학교 나왔습니다.”
“에이, 거짓말! 거기 나와서 어떻게 검사를 해요?”
그 순간, 술자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흠흠흠!
박 검사가 내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자네는 지금 검사가 무슨 귀족이라도 되는 줄 아나? 자네 지금 실수한 거야. 당장 사과해!”
가만히 지켜보던 윤상원 검사가 입을 열었다. 묵직한 목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아…… 전 그냥, 궁금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정훈이 눈치를 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아냐. 괜찮아. 지방대 나온 것 맞는데 뭐. 신경 쓰지 마.”
나는 정훈에게 손을 들어 올려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잠시 후, 술자리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윤상원 부장이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자네 담배 피나?”
그가 내게 담배 한가치를 내밀었다.
“아뇨. 피우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담배 좀 피워도 되겠나?”
“네. 그렇게 하십시오.”
후우, 윤 부장이 담뱃불을 붙여 입에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 넘겼다.
“김 검사! 올해가 검사 몇 년 차지?”
“이제 9년 차 돼갑니다."
“그렇구먼.”
“김 검사, 나랑 일하나 같이 하자!”
윤 부장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별거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할 건 없고, 다름이 아니라 이길상을 잡아야겠어!”
길상파, 이길상?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