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사생결단(死生決斷), 최후의 공방전 (3)
“뭐…… 뭐야? 김 비서 저… 게 어떻게 된 건가?”
정 회장이 손을 떨며 손가락으로 박선출을 가리켰다.
“저도 지금 이게 뭔지 자…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몰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저… 저자가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김상현이 어쩔 줄을 모르며 당황했다.
“나가. 당장, 나가 버렷!”
* * *
“그럼, 증인! 이 종이에 좀 전에 보셨던 이연수의 필체를 재현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어렵지 않습니다.”
쓱. 쓱. 쓱.
박선출이 망설임 없이 종이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비 오는 날, 진웅 오빠가 우산도 없이 종일 창밖에 서 있다. 무서워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진웅 오빠가 불쑥 찾아와 같이 죽자고 했다. 이젠 무서워서 잠을 잘 수도 없다.]
[진웅 오빠는 악마다. 오늘 나는 그에게 강간당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필체였다. 도무지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탁, 박선출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볼펜을 내려놓았다.
“여러분! 보십시오. 완벽히 동일한 필체입니다.”
나는 종이를 들어 올려 방청석에 내보였다.
“흠. 흠. 흠.”
“뭐라고? 알았어. 지금 당장 갈게.”
사람들이 울리지도 않은 휴대전화를 들어 올리며 통화를 하는 시늉을 했다.
“흠, 그러게, 조심하지. 알았어. 당장 갈 테니 기다려!”
그 순간 그토록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그들이 슬금슬금 일어나 법정을 빠져갔다. 정한수를 지켜주던 마지막 원군들마저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피고, 반대 신문하시겠습니까?”
“…….”
황 변호사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모든 군사를 잃고 전의를 상실한 패장의 처참한 몰골이었다.
“변호인! 반대 신문 안 할 겁니까?”
재판장이 신경질적으로 재차 물었다.
“반대 신문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검사! 본 증거물은 국과수 감식 후에 보고서를 서면으로 제출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이상 신문을 마치겠습니다.”
“피고, 추가로 신문할 증인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황 변호사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검사! 추가 증인 신문하실 겁니까?”
“네.”
나는 간신히 붙어있던 황 변호사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려야 했다.
“서울 국과수의 연구원 이진선 씨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이진선은 장 검의 친구였다.
“채택합니다.”
“증인! 증인은 광주 국과수에서 제공한 감식 자료를 확인하셨습니까?”
“네. 확인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광주 국과수에서 나온 자료에 의하면 이연수의 직접적 사인은 장간막 대동맥 파열에 의한 쇼크사라고 하는데 증인도 같은 생각입니까?”
“아뇨.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그래요? 어떻게 다르다는 거죠?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PT 자료를 준비했는데 괜찮다면 화면을 보면서 설명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재판장님! 증인의 자료는 본 재판의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채택하여 주십시오.”
“채택합니다. 증인 설명해 보세요.”
재판장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몸을 앞쪽으로 바짝 숙였다.
재판장의 허락과 함께 스크린에 이연수의 시체 사진이 클로즈업되었다.
온몸에 칼자국과 멍이 들어있는 참혹한 사진이었다.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언뜻 보면 흐릿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사진을 살펴보면 얼굴에 점 출혈과 뚜렷한 울혈 자국이 보입니다.”
이진선 연구원이 스크린 쪽으로 다가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울혈이 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보통 목이 졸려 경부 압박으로 사망할 때, 흔하게 나타나는 흔적입니다.”
“확실히 울혈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미국에 자료를 보내 검증까지 마쳤습니다. 여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녀가 보고서를 나에게 전달했다.
“재판장님! 본 문서는 미국 CSI 범죄 연구소에서 작성한 문건으로 본 재판의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본 문건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채택합니다.”
“아무리 증거를 인멸하려 해도 시체에 남은 흔적은 모든 진실을 말하는 법이지요.”
나는 정한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가 눈이 반쯤 풀린 모습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아버지 정 회장의 얼굴 역시 비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하나 더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연수 몸에서 발견된 칼자국은 무엇입니까?”
“보통, 피해자가 살아있을 때 찔린 경우와 죽은 상태에서 찔린 경우의 양상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상처의 깊이나 피부가 찢어진 형태 및 각도, 피부의 수축 정도를 고려할 때, 이연수의 몸에서 발견된 흉터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 칼에 찔려 생긴 흉터일 확률이 높습니다.”
“증인! 확실합니까?”
이번엔 오히려 이종호 판사가 더욱더 관심을 보였다.
“네. 국과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확실합니다.”
그녀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 재판의 승패는 이것으로 끝난 듯 보였다.
“그렇군요. 증언 감사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연수의 몸에 생긴 흉터의 방향 및 각도 등을 고려할 때, 범인은 초보인 것이 틀림없습니까?”
“네.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그 미숙한 범인이 이연수를 찌를 때, 손에 상처가 생길 개연성이 있겠군요?”
나는 황 변호사와 정한수의 숨통을 끊을 마지막 한 방을 날려야 했다.
“칼끝이 떨어져 나간 점, 흉터의 깊이 등을 고려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범인은 손바닥에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알겠습니다. 이상 신문을 마치겠습니다.”
“피고 측 변호인, 반대 신문하겠습니까?”
“아니오.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황 변호사의 목소리가 한없이 기어들어갔다. 이미 수건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검사, 추가 신문하시겠습니까?”
“음…… 없습니다. 다만,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피고 정한수의 손을 한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나는 정한수가 앉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검사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피고의 신체를 건드는 것은 인권에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변호인! 검사,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네! 정한수의 손에는 분명, 칼에 베인 흉터가 있을 겁니다. 만약에! 만약에 제 말이 맞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이 검사복을 벗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양 주먹에 힘을 주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킬 수가 없었다.
“검사! 진정하세요. 서기! 이 부분은 기록에서 삭제하세요.”
“네.”
“허락합니다. 본 재판에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변호인! 인권문제가 문제가 된다고 판단한다면 추후에 서면으로 항의문을 제출하세요. 피고! 오른손을 펼쳐 보십시오!”
재판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
정한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 돼! 절대 안 돼!’
황 변호사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정한수 씨! 빨리 손바닥을 펼쳐 보세요!”
정한수가 꾸물거리자 재판장이 언성을 높이며 재촉했다.
“…….”
정한수가 계속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보십시오. 이 선명한 칼자국!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러분들이 더 명확히 알고 계실 겁니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정한수에게 달려간 나는 그의 팔을 비틀어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손바닥엔 선명한 칼자국이 남아있었다.
돈만 있으면 사람의 목숨도 살 수 있다는 그의 잘못된 가치관에 철퇴를 내려야 했다. 또한, 이 사회에 만연한 갑질, 강한 자에겐 비굴하게 굴복하고 약한 자는 무자비 짓밟은 비겁한 사회 기득권층의 얼굴에 어퍼컷을 날리고 싶었다. 나는 그의 손을 더욱더 움켜잡으며 방청석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흩뿌렸다.
이 사람의 모습이 당신들의 모습이 될 겁니다!
이것으로 치열했던 법정 공방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공 수사관의 말대로 게임 셋이었다.
잠시 후,
“피고 측 변호인 최후 변론하십시오.”
모든 증인 신문을 마치고 재판장이 피고 측 변호인에게 최후변론을 명령했다.
“네. 검사 측의 공소사실을 인정합니다. 다만 피고는 술을 마시고 심신미약의 상황에서 우발적인 충동에 의해…….”
최후 변론을 하는 황 변호사의 표정은 침통했다.
그때였다.
“씨X, X까고 있네.”
갑자기 정한수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앉으세요!”
당황한 재판장이 소리쳤다.
“그래그래! 시X! 내가 죽였다. 그래서 뭐? 뭐가 문젠데? 저것들은 내 거야! 내 장난감 같은 거라고! 아버지가 가지고 놀라고 사준 장난감! 몰라? 너덜 장난감이 뭔지 모르냐고! 고장나거나 싫증 나면 버리는 게 장난감이야. 그러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 아냐? 시X, 내 물건 내 맘대로 하는데 너희들이 뭔 상관이야!”
정한수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발악 거리며 김진웅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기세였다.
“교도관, 교도관! 피고 제지하세요.”
“네.”
두 명이 교도관이 황급히 피고의 양팔을 붙들었다.
“놔, 안 놔. 개새끼들아 놓으라고! 나 정한수야! 나… 나는 아무 잘못 없다고 저것들은 내 노예들이라고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놔놔! 다 죽여버릴 거야!”
정한수가 얼굴이 시뻘게진 정도로 악다구니를 부리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교도관들은 더욱더 그의 몸을 압박했고 결국, 정한수는 질질 끌려 법정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회장님!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얼렁, 구급차 불러! 어서!”
그 순간, 정 회장이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삐뽀 삐뽀, 구급차가 도착하자 그의 수행비서들이 정 회장을 등에 업고 황급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 * *
“검사, 구형하세요.”
소란스러웠던 법정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재판장이 나에게 구형을 명령했다.
“네. 그럼, 구형하겠습니다. 피고 정한수는 술을 마시고 만취한 상태에서 그의 연인 이연수와 그녀의 임신 문제로 다투던 중, 목을 졸라 잔혹하게 살해한 후, 만취해 자고 있던 그의 친구 김진웅에게 덮어씌웠습니다. 게다가, 이미 죽은 이연수를 수차례 칼로 찔러 사체를 훼손할 만큼 그 죄질이 상당히 무겁습니다. 그러나, 피고 정한수는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돈과 권력을 이용해 증거를 위조했으며 증인들을 협박, 공갈하고 돈으로 매수했습니다. 이는 법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반 인륜적인 행위입니다. 비록 피고 정한수가 초범임을 고려하다라도 용서할 수 없을만큼 죄가 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본 검사는 피고 정한수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하는 바입니다. 또한, 본 사건에 살인죄로 기소된 김진웅은 명명백백 죄가 없음이 밝혀진 바, 무죄임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한수의 죄에 대한 응징이었지만 이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부조리에 대한 단죄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검사님! 감사합니다.”
흑흑흑.
방청석에서 가슴을 졸이며 재판을 지켜보던 김진웅의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김진웅이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진웅 씨!’
씩,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저 환하게 웃는 것뿐이었다.
“자자, 정숙하세요. 이것으로 결심 공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에 이곳에서 선고공판을 하겠습니다. 이상 공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재판 종료를 알렸다.
“저 쏟아지는 오라를 어쩔? 숨이 막히네.”
뒤쪽에 서서 나를 지켜보던 장 검이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