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사생결단(死生決斷), 최후의 공방전 (2)
“김진웅 씨, 당신은 사망한 이연수 씨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황 변호사가 서류를 들추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연… 수는 고등학교 후배입니다.”
힘없이 어눌한 목소리였다.
“그렇군요. 주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에 이연수 씨를 좋아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네…… 에. 좋아했습니다.”
김진웅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다.
“그럼, 이연수 씨도 증인을 좋아했습니까?”
“그… 건.”
그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말씀하시기가 곤란한가 보군요. 그럼, 제가 말씀드리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죽은 이연수는 증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혐오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군요. 볼품없는 외모와 무능력한 증인을 어떡하든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그녀가 좋아할 일이 없을 테니까요. 주변 지인들에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이 심하게 다퉜던 적이 많았다는데, 맞습니까?”
황 변호사가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하며 김진웅의 심리상태를 흔들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피고 측 변호인은 증인을 인신공격하고 있습니다.”
“원고! 가만히 있으세요. 이건 이연수 살인의 직접적 동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재판장님! 반드시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목덜미에 심줄이 불거져 나왔다. 황 변호사가 작정한 듯 목소리 톤을 높였다.
“피고 측 의견을 일부 인정합니다. 피고 측 변호인! 다만, 증인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발언은 자제하세요.”
“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증인은 평소에 짝사랑하던 이연수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피고 정한수를 마음을 주자 계속해서 이연수를 스토킹하지 않았습니까? 본 변호인이 주변 지인들의 진술을 확보한 상황입니다. 솔직히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황 변호사가 공세의 고삐를 더욱더 잡아챘다. 진술을 확보했다는 말로 김진웅의 심리를 더욱 압박하겠다는 술책이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저…… 는 연수를 스토킹한 적 없습니다.”
김진웅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원래 스토커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스토킹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그들은 어이없게도 그것을 사랑 또는 애정이라 칭합니다. 내면의 그릇된 집착과 욕정을 사랑이라 믿고 싶을 뿐이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황 변호사의 인신공격의 강도가 더욱 거세졌다.
김진웅이 심적 부담을 느껴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을 노린 저열한 짓!
마치 복싱에서 코너에 몰린 선수가 심판 몰래 머리로 상대를 들이받아 게임을 끝내려는 더럽고 치사한 수법이었다.
“…….”
그의 의도대로 감정에 동요가 있었는지 김진웅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올린 양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할 말이 없으신가 보군요? 이것은 본 변호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황 변호사의 궤변에 김진웅이 흔들리며 당황해하자 정한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억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떡하든 김진웅이 실수할 상황을 막아야 했다.
“피고 측 변호인! 물증 없는 심증은 자제하세요. 서기! 지금 변호인 진술 삭제하세요!”
“재판장님, 김진웅이 평소에 이연수를 스토킹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출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렇지! 그것밖에는 없겠지!
이미 예상했던 순서였다.
“채택합니다.”
황 변호사가 제출한 자료를 좌우 배석 판사들과 검토한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 변호사가 스크린을 내리고 사전에 준비한 화면을 띄웠다.
[비 오는 날, 진웅 오빠가 우산도 없이 종일 창밖에 서 있다. 무서워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진웅 오빠가 불쑥 찾아와 같이 죽자고 했다. 이젠 무서워서 잠을 잘 수도 없다.]
[진웅 오빠는 악마다. 오늘 나는 그에게 강간당했다.]
점점 자극적인 문구가 연속해서 등장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제 아들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겁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동안 죄인처럼 숨죽이며 재판을 지켜보던 김진웅의 모친이 울부짖었다. 반면에 피고석에 앉아 있던 정한수와 방청석에 있는 정 회장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승기를 잡았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정숙하세요. 정숙! 자꾸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법정모독죄로 구속될 수 있습니다.”
순간, 법정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재판장이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교도관들의 제지로 간신히 상황이 정리될 수 있었다.
“피고 측! 계속 신문하세요.”
얼마간의 소란 후에 황 변호사가 다시 신문에 들어갔다.
“네.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증인 김진웅은 삐뚤어진 애정으로 이연수에게 집착했지만, 그녀가 점점 멀어지자 그러한 그의 빗나간 애정은 결국 분노로 바뀌었고 피고 정한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술김에 이연수를 칼로 잔혹하게 살해한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피고 정한수는 친구로서 그를 돕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친구로서 김진웅이 자수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김진웅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알게 된 피고는 그의 부친으로 하여금 금전적인 원조까지 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따라서 동정과 배려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피고 정한수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황 변호사가 어처구니없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증인 신문을 마쳤다.
속이 메스껍군. 저 더러운 거짓말을 이젠 더는 못 듣겠어!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카운터 펀치를 날리기로 했다. 이쯤 해서 황 변호사의 숨통을 끊어야 했다.
“검사! 반대 신문하겠습니까?”
“재판장님, 반대 신문하기 전에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채택합니다.”
“사전에 출석하기로 되어 있던 증인이 개인 사정으로 출석할 수 없으므로 그가 남긴 동영상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원고, 계속하세요!”
그 순간, 긴장된 표정의 황 변호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한수와 귓속말로 무언가 대화를 나눴다.
드디어, 중앙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비디오가 재생되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오른팔을 심하게 다친 김진웅의 수술을 집도한 신경외과 전문의 전상도의 진술 내용이 담긴 비디오 영상이었다.
“김진웅 씨, 수술을 집도하신 전 박사님이 맞으십니까?”
“네. 제가 전상도입니다. 김진웅 씨 오른팔 수술을 집도했습니다.”
“김진웅 씨 오른팔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네. 당시 환자는 교통사고로 인해 Median Nerve가 심각한 손상을 입어 신경 접합 수술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면, 그 수술을 하게 되면 후에 정상적으로 팔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아뇨. 원래 신경이란 조직이 한 번 손상되면 재생 불가능하죠.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팔 사용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김진웅 환자도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오른손 검지부터 네 번째 손가락까지 거의 마비가 와서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디오가 재생되자 황 변호사의 얼굴이 점점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런 오른손으로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 사망케 한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뇨.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숟가락 들기도 힘든 손으로 사람을 어떻게 찌를 수 있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꾹, 나는 stop 버튼을 눌러 비디오 재생을 멈췄다.
어떻게? 좀 더 발악해 보시겠습니까? 황상만 씨!
“오른팔 신경이 절단돼 숟가락도 들기 힘든 김진웅이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멀쩡한 상태의 이연수를 찔러 죽일 수 있었을까요? 장 박사님의 진술을 토대로 본 검사는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이상, 증인 신문을 마치겠습니다!”
‘힘을 내요. 김진웅 씨!’
나는 자리로 돌아가며 김진웅을 쳐다보며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마치 도장 깨기를 하듯 나는 황 변호사가 준비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깨부쉈다.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황 변호사의 술책에 철퇴를 내리고 싶었다.
진실은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지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을 뿐이지요! 이 넓은 하늘을 말이에요!
결코, 당신들의 뜻대로 세상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는 방청객으로 고개를 돌려 당황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수많은 기득권층에게 보란 듯이 냉소적인 시선을 흩뿌렸다.
“재… 판장님, 잠시 휴정을 요청합니다.”
황 변호사의 이마에서 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변호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 *
휴정을 요청한 황 변호사의 제안이 수용되고 약 30분이 지나 본격적인 공판이 재개되었다.
“재판장님! 증인 박선출을 신청합니다.”
나는 지금이 본 재판의 승부처라 생각했고 더욱더 공세의 강도를 높였다.
‘저… 저거 뭐야? 저… 인간이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박 선생이 증인 선서를 위해 단상에 올라가자 정 회장의 수행비서 김상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검사, 신문하세요.”
황 변호사가 안경을 벗고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재…… 판장님 저 증인은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증인입니다.”
땀에 흠뻑 젖은 모습이 이미 그로기 상태의 복싱선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황 변호사가 마지막 발악을 했다.
“기각합니다. 정황상 필요한 증인입니다. 검사! 계속하세요.”
그의 마지막 발악도 소용이 없었다.
“네. 증인의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는 박 선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박선출입니다.”
“그럼, 박 선생이 본명이 아니군요.”
“네.”
“그럼, 그 별명은 어떻게 얻게 되신 거죠?”
“그게. 저는 음… 뭐랄까?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을 성대모사라고 하듯이 필체를 모사하는 예술가입니다. 제가 워낙 능력이 출중해 놔서 하도 똑같이 그려내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박선출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군요. 그럼 좀 전에 피고 측에서 제출한 이연수 필체도 모사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거, 제가 쓴 겁니다!”
‘뭐… 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리도 이쯤에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박쥐 같은 인간들!
좀 전까지만 해도 정 회장에게 입속에 사탕처럼 굴던 지역 유지들이 슬금슬금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저… 기 저 사람이 찾아왔어요.”
박 선생이 무심히 손가락으로 김 비서를 가리켰다.
“네? 누구요?”
“저기 뒤에 서 있는 사람이요.”
박선출이 고개를 내밀어 김비서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의 있습니다. 지금 증인은 신빙성 없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신빙성 있습니다! 재판장님! 정한물산 김상현 비서가 증인 박선출과 만나는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을 증거물로 제출하겠습니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꾹꾹 눌러 말했다.
“채택합니다.”
곧이어, 박선출과 김 비서가 은밀히 만나는 영상이 재생되자 정 회장의 동공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