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화] 진실 혹은 거짓 (4)
임신이라? 누가 임신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병원영수증 뒷면에 이연수 자필 필적까지 발견된 마당에 뭐 이건 보나 마나 뻔한 거 아닙니까?’
그 순간, 정형사의 말이 떠올랐다.
임신… 병원영수증?
맞아! 산부인과!
그 병원 영수증이 산부인과 영수증이라면 뭔가 퍼즐이 맞을 것 같은데?
내 심장이 점점 속도를 내고 있었다.
“공 수사관님! 이 영수증 어디서 발급한 것인지 좀 알아봐 주세요.”
“이게 뭐예요? 글자가 뭉개져서 잘 안 보이는데?”
그가 영수증을 들어 올려 형광등에 비춰보았다.
“그러니까요. 부탁을 드리잖아요. AC 카드사에 찾아가서 의뢰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입술에 침을 묻혔다.
“어? 검사님, 자…… 잠깐만요. 이거 뭐가 보이는 것 같은데?”
공 수사관이 뚫어져라 영수증을 살펴봤다.
“그래요? 뭐가 보이나요?”
“확실하진 않지만, 이거 무슨 병원 같은데…….”
형광등 불빛에 비친 영수증에서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나는 듯했다.
“그래요? 병원이 확실한 가요?”
“호… 산… 나?”
공 수사관이 천천히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왜요? 아는 곳이에요?”
“맞아요. 맞아! 순천 시내에 있는 호산나 산부인과! 우리 막내도 거기서 태어났어요! 맞아요. 확실합니다.”
짝짝, 공 수사관이 손뼉을 마주쳤다.
“확실합니까?”
“속고만 사셨나? 맞아요. 확실합니다.”
좋아! 뭔가 실마리가 풀릴 것 같군.
“그럼, 이 카드 명의자가 누군지 확인 좀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광주 교도소에 연락해서 김진웅 면회 신청 좀 해주세요. 제가 그 사람을 좀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넵.”
“아 참! 그리고 김진웅이랑 이연수 주변 관계 좀 파악해주시고요. 가족관계, 친구, 기타 등등 연관된 사람들은 전부 조사해 주세요. 특히 이연수 쪽을 집중적으로 조사해봐야 할 겁니다. 뭐라도 좋으니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은 모두 나열해주세요. 키우던 개나 고양이까지도 빼놓으시면 안 됩니다.”
헐! 이 인간이 정말 변해도 너무 변했어. 에이, 오늘 결혼 20주년인데 일찍 들어가긴 글렀네! 마누라 또 게거품 물겠구먼…….
까라면 까야지. 내가 뭐 힘이 있나….
중얼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후유, 네에.”
공 수사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이시군요. 후후, 오늘 결혼기념일이시죠? 이거 사모님 갖다 드리세요.”
드르륵, 나는 서랍을 열고 선물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네? 어떻게… 제 결혼기념일을….”
“그렇게 감동 먹은 표정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며칠 전부터 저 보라고 달력에 저렇게 떡 하니 동그라미 쳐놓으신 거 아니에요?”
사무실 달력, 오늘 날짜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굵게 쳐 있었다.
“아… 그게 아니라, 헤헤, 제가 나이를 먹어서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서…… 까먹으면 마누라가 난리를 치거든요.”
공 수사관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음…… 급한 건 아니니까, 오늘은 바로 퇴근하시고요. 내일 일찍 나와서 처리해 주세요.”
“아…… 니에요. 아닙니다. 그건 그거고 일은 해야죠.”
“괜찮아요. 내일 처리하셔도 됩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검사님이 정 원하신다면 뭐, 염치없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헤헤.”
“그 호산나 병원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십시오.”
“네. 그게 어디냐면요…….”
공 수사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호산나 산부인과.>
나는 공 수사관이 알려준 약도를 가지고 병원을 찾아왔다.
“선생님 혹시 이 사람을 진료하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의사에게 이연수 사진을 내밀었다.
“어디 보자. 글쎄요. 얼굴만 봐서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은 환자가 들락거려서 잘 모르겠군요.”
담당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좀 더 자세히 봐주시겠습니까?”
“음…… 글쎄요. 사진만 봐서는 도통 모르겠는데요. 혹시, 언제쯤 우리 병원에 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1월 8일에 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입니다. 이름은 이연수고 나이는 20살입니다. 꼭 좀 확인이 돼야 합니다. 선생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1월 8일이라….
“어이, 김 간. 진료 차트 좀 가지고 와봐.”
“네.”
“그나저나 의료 기록은 함부로 보여줄 수 없는데…… 무슨 일이신지?”
“이연수 씨가 살해당했습니다. 영장 여기 있습니다.”
나는 의사에게 영장을 내밀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쩌다 쯧쯧….”
“아, 여기 있네요. 이연수 환자!”
의사가 진료 차트를 뒤적거리다 이연수의 차트를 찾아냈다.
“찾았습니까? 이연수가 여기 왜 온 거죠?”
“흠…… 아!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이 환자 여기서 임신 검사를 했어요. 아, 맞네. 제가 임신 3개월 진단을 내렸습니다.”
킹 메이킹 시스템이 보여준 임신 테스트기가 이연수의 것이었어!
“임신이오? 그거 확실합니까?”
“네. 맞아요. 확실합니다. 좀 특이한 케이스라 제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이연수 씨. 긴 생머리에 이쁘장하게 생긴 아가씨! 저런 어린 아가씨가 어쩌다…….”
의사가 안타까운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이해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게 보통, 이 나이대 여자들이 병원에 임신 검사를 받으러 오는 경우는 대부분 원치 않는 임신일 경우거든요. 그래서 대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울고불고 난린데 이연수 씨는 좀 달랐어요.”
“달라요? 어떻게 달랐다는 거죠?”
“좋아했어요. 확실히 행복한 표정을 지었죠. 보통,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낙태 가능 여부를 문의하는데 그 사람은 오히려 임신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병원엔 다시 언제 오느냐 등등 오히려 임신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것 말하더라고요. 아무튼, 특이했죠.”
“그렇습니까?”
임신한 사실에 기뻐한다? 임신한 사실을 반겼다는 건 그 아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아니면, 어떤 이유이건 간에 아이가 필요했거나…… 자신이 극도로 혐오하는 남자의 아이를 배고 좋아할 리가 없잖아!
이 아이는 절대로 김진웅의 아이일 리가 없다! 분명 이연수 주변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이 진료 기록 한 부 카피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 간, 이거 검사님한테 한 부 복사해드려!”
“감사합니다.”
띠띠띠띠.
“공 수사관님, 이연수 주변 좀 철저히 조사 좀 해주세요. 특히, 남자관계를 파보셔야 할 겁니다.”
나는 급히 공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남자관계요?”
“네. 이연수가 만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주변을 탐문을 하든 이연수 친구들을 만나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찾아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김진웅 주변을 조사하다 알게 된 건데,
김진웅 부친이 경영하는 회사가 자금 문제로 거의 파산 지경에 있었는데 최근에 어디서 자금을 융통했는지 채무를 변제했다고 하더군요. 하루걸러 채권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난리를 쳤다는 주변의 제보도 확보해 뒀습니다. 검사님, 아무래도 냄새가 좀 나는데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저야…… 뭐. 검사님이 좋으시다면야. 뭐. 헤헤.”
“수사관님! 그 회사 부채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좀 확인해보시고 주 거래처나 주 채권자가 누군지 좀 확인해보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검사님! 그리고 선물 너무 감사합니다. 검사님 덕분에 마누라한테 점수 좀 땄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여자들 취향을 잘 아시는지….”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여자 맘을 잘 알아?’
‘맘에 들어?’
‘그럼, 맘에 들지. 보석 싫어하는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여자들 생일날, 꽃 한 송이라도 따뜻한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그러지? 그거다 개소리야. 성의는 성의일 뿐이지.’
모든 것은 쓰레기 김정환의 기억 덕택이었다.
휴,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의 기억이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좋아하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좀 서둘러 주세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오케바리!”
<장영은 검사실.>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장 검과 함께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장 검, 들어가도 되나?”
“아, 선배님.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바쁜가 봐?”
장 검의 책상 앞에 사건 서류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뭐, 나야 항상 그렇죠. 자질구레한 폭력 사건에 보이스 피싱에, 계주가 곗돈 떼먹고 도망친 사기 사건, 뭐, 기타 등등. 그나저나 김진웅 사건은 잘돼 가고 있는 건가요? 제가 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음……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장 검이랑 상의를 좀 하려고 왔어.”
나는 책상 위에 있는 마커를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그 사건 진 사항이 궁금했는데 잘됐네요. 어디 한 번 읊어 보시죠.”
장 검이 책상에 모을 비스듬히 기대며 팔짱을 꼈다.
“첫째, 사건 현장에서 김진웅을 목격했다는 최초 목격자의 진술은 거짓일 확률이 높아. 목격자 시력이….”
쓱쓱쓱.
나는 화이트보드의 그날의 날씨, 그리고 목격자들의 나쁜 시력, 최근 취조실에서의 그들의 반응 등등을 표기하며 그들의 진술이 거짓임을 설명했다.
“맞아요! 사실 저도 그 점이 수상했는데, 자수한 김진웅 진술과 목격자 진술이 정확히 일치하고 게다가 김진웅이 모든 사실을 인정해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죠!”
“그게 문제라는 거지. 그들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그날 보지도 못했던 김진웅을 봤다고 한 이유가….”
“음……. 볼 수도 있었지만. 선배님, 어쩌면 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장 검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봤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누군가를 봤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 누군가가 무조건 김진웅이 돼야 했어. 그러기 위해선 약을 쳐야 할 필요성이 있어야 했고?”
“그렇죠.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할머니들에게 약을 치기는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분명 누군가를 보긴 봤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배우를 썼다는 얘긴데, 그게 누굴까?”
“누구긴요. 이연수를 죽인 진범이죠.”
“빙고!”
나는 장 검을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
“게다가 내가 오늘 아주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됐는데 말이야.”
“그게 뭔데요?”
장 검이 호기심이 생겼는지 내 쪽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앉았다.
“죽은 이연수는 죽기 전에 임신한 상태였어.”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연수가 임신을 했다니요.”
“어쩐지, 딸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서둘러 화장을 하자고 하던 이연수 아버지 태도가 좀 수상했어요. 확실해요?”
“확실해. 내가 오늘 직접 담당 의사를 만났거든.”
“그… 럼, 설마 그 아이의 아빠가 김진웅이라는 소리는 아니죠?”
‘좋아했어요. 보통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낙태를 문의하는데 그 사람은 오히려 임신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병원엔 다시 언제 오느냐 등등 오히려 임신을 반기는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아무튼, 특이했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도 좋아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장담하는데 김진웅은 분명 아냐!”
“그럼 누구란 말씀이세요?”
“음…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띠리리링.
그 순간 공 수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 검! 지금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검사님! 저 공 수사관입니다. 어디 계세요?”
“아, 네. 저 지금 장 검 방에 있습니다.”
“아 네… 지금 대박 뉴스 하나 물어 왔는데 어떻게, 장 검사님 방으로 올라갈까요?”
“그래요? 네. 빨리 올라오시죠.”
“공 수사관님이세요?”
“어.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쾅, 잠시 후에 공 수사관이 황급히 장 검 방으로 올라왔다.
“수사관님! 대박 뉴스가 뭐죠?”
장 검이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 네. 숨 좀 돌리고요.”
벌컥벌컥, 공 수사관이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무슨 일이신데 이렇게 땀에 젖으셨어요?”
장 검이 티슈를 몇 장 뽑아 그에게 전달했다.
“아 네. 그…… 게. 제가 이연수 주변을 샅샅이 뒤져봤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이연수가 죽도록 쫓아다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네요.”
“네?”
“네? 그게 확실합니까?”
장 검이 반사적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네. 확실합니다. 근데, 그것보다 더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습죠!"
공 수사관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뭐죠?”
나보다 더 흥분한 모양이었다. 장 검이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그게, 정한수라고 김진웅하고 예전부터 친구더라고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정한수 아버지가 이쪽에선 알아주는 갑부인데, 그 사람 소유 정한 물산에 김진웅 아버지가 하청 하고 있었더라고요. 이건 뭐, 확실히 구린내가 진동하는데요?”
“둘이 친구요? 그리고 하청?”
어라, 이것들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