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13화] 진실 혹은 거짓 (2)
“네. 아닐 수도 있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김진웅이 범인이 아니라니?”
장 검이 놀랐는지 연신 눈꺼풀을 깜박였다.
“여기 있는 모든 증거나 증인들이 너무 퍼즐 들어맞듯이 완벽한 게 수상하지 않아?”
나는 수사 공판 자료를 장 검에게 내밀었다.
“그야 그렇긴 한데…… 증거가 불충분한 것이 문제지, 증거가 완벽한 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데… 게다가, 그건 어디까지나 선배님 심증이고요. 심증보다는 드러난 팩트에 집중하라고 방금 선배님이 말씀하셨어요! 잊으셨어요?”
“지금 바꿨어. 장 검이 심증이 중요하다면서?”
“헐, 뭐예요. 진짜!”
“그건 그렇고, 장 검! 이것 좀 봐. 이상하지 않아?”
휘리릭, 나는 장 검에게 이연수의 필적이 담긴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전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그건 분명 이연수의 필체가 틀림없어요. 다이어리 필체랑 같거든요.”
장 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야. 똑같아도 너무 똑같아. 잘 봐봐. 그래도 모르겠어?”
[나는 지금 강간당했다. 너무 두렵다. 김진웅 그는 악마다.]
장 검이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끼고는 천천히 글자를 읽었다.
지금… 두렵다…… 악마…?
“맞아요. 선배님! 글씨체는 휘갈겨 쓴 건 틀림없는데 글자 끝에 미세한 떨림이 없네요? 그런 긴급한 상황이었으면 분명 심적 동요가 굉장히 심했을 텐데요?”
장 검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빙고, 바로 그거야. 어때, 좀 냄새가 나지 않아?”
“그렇긴 한데… 내일이 결심 공판이고 그 정도로 재판을 연기할 순 없을 것 같은데요? 어디까지나 선배님 심증일 뿐이고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제가 설득되질 않는데 판사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 싶네요.”
장 검이 고개를 내저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
저 사람 눈빛이 이렇게 진지해 보인 적이 있었나? 왜 저래 진짜! 마음 설레게…….
“결코, 이 정도로 재판을 뒤엎을 수는 없어요. 게다가, 선배님! 이거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란 것 알고 계시죠? 우리 스스로가 수사를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지청장님이 아시면 가만있지 않을걸요?”
장 검이 코끝을 찡그렸다.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
“다만!”
장 검이 검지를 들어 올리며 말허리를 잘랐다.
“다만?”
“네, 다만! 지금부터 24시간 이내에 선배님의 심증이 확증으로 바뀔 수 있을 만한 킬러 팩트를 찾아오세요. 이 사건을 맡은 담당 검사로써 정말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든 판사님을 설득해보죠.”
“진짜?”
“속아만 사셨어요? 네. 진짜요.”
“그럼 저거 좀 가져가도 되나?”
“이거 없이 뭘 하시게요. 자요.”
장 검이 수사공판기록을 내게 넘겨주었다.
“고마워. 장 검!”
“선배님 명심하세요.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에요. 어설픈 추론으로 내 맘 바꿀 생각은 꿈에도 마세요.”
* * *
정밀 부검도 하지 않고 서둘러 화장을 해버린 아버지!
아무리 가해자가 자수했다 해도 석연치가 않다! 자신의 하나뿐인 딸이 무참히 살해를 당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냄새가 나!
후유, 일단 소설을 한 번 써보자.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누군가가 김진웅을 배우로 시나리오를 쓴 것이라면? 그 시나리오에 맞춰 소품들을 배치하고 엑스트라를 고용했다면? 그럼, 이걸 지휘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따로 있다는 소린데….
배우 김진웅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감독이 누군지를…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무모한 연기를 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내일이 결심 공판이다. 일단, 나는 공판 기일을 연기할 명분을 오늘 밤 안에 반드시 찾아야 한다. 반드시!
나는 한참 동안 사진 속 이연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억울합니다!’
마치, 사진 속의 그녀가 나를 향해 흐느끼며 우는 것만 같았다.
복부, 가슴, 목에 생긴 치명적인 자상! 외관상으로는 분명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가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그 화살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왜 이 사진을 가리키고 있었던 거지?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갈증이 나는군.
딸각, 나는 거실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고 캔 맥주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미끌, 푸슉!
다시 서재로 돌아가려는 순간, 발밑에 무언가 물컹거리는 것이 밟혔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검붉은 액체가 쏟아져 나온 듯했다.
으악, 이게 뭐야? 뭘 밟은 모양인데, 마요네즌가? 토마토케첩인가?
나는 즉시 거실 조명 스위치를 켰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밟았던 것은 토마토케첩 튜브였고 속을 꽉 채우고 있던 붉은 케첩이 꿀렁거리며 튀어나와 온 거실을 뒤덮고 있었다.
아이 씨, 망했네. 이게 여기 왜 떨어져 있는 거야?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쪼그려 앉아 케첩을 닦아냈다.
그건 뭐, 누가 보면 피를 흘린 것 같은데?
피?
압력?
나는 반쯤, 케첩이 새어나가 쭈그러져 있는 튜브를 들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음…… 어떤 물체에 압력이 순간적으로 가해지면 부피는 줄어든다. 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하니까, 그럼, 그 폐쇄된 공간 안에 든 물질의 밀도는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역시 밀도는 부피와 반비례하기에…… 결국, 높아진 물질의 밀도를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떻게 되지?
가장 약한 곳을 뚫고 나온다!
결국, 팡, 터지는 거야.
그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등골이 오싹했다.
바로 이거야!
나는 정신없이 서재로 뛰어가 이연수의 시체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참혹하게 일그러져 형체를 알아보고 힘든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데군데 검푸른 울혈과 점 출혈 현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일 경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나는 황급히 관련 서적을 꺼내 확인해야 했다.
[울혈: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경우 흔히 나타나는 현상.]
이거였군!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봐. 김 검. 어떻게 저 사람이 질식사라고 그렇게 단정해!”
“내가 검사 생활 8년에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죽은 사람들을 거짓말 좀 보태면 한 트럭은 되거든? 그냥 딱 보면 알아. 이리 와 봐. 박 검, 여기 이 사진 좀 봐. 얼굴 곳곳에 울혈이 보이지? 게다가 점 출혈까지, 보여, 안 보여?“
“어? 정말 그러네.”
“이게 빼박 증거야. 이 사람 목이 졸려 죽은 게 틀림없어.”
그 순간, 또다시 김정환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헐,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내가 이 인간의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네.
아무튼, 수사 자료를 아무리 살펴봐도, 이연수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의심된다는 소견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연수의 직접적 사망원인은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건 분명 누군가가 시나리오를 쓴 것이 틀림없다!
* * *
<장영은 검사실.>
쾅!
“헉헉, 장 검, 장 검이 원하는 것 가져왔어.”
이튿날, 나는 부리나케 장 검의 방을 찾았다. 시계는 8시를 가리켰고 그 시각은 결심 공판 5시간 전이다. 나는 장 검에게 어젯밤, 밝혀낸 모든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정말, 날 어디까지 놀라게 할 셈이세요? 김정환 선배님!
“이쯤 되면, 제가 선배님을 믿어야 하는 거죠? 그렇죠?”
“아마도…….”
“그러니까 이연수가 자상에 의한 과다출혈이 아니라 질식사라는 거죠?”
“아마도….”
“휴, 미치겠네. 그럼 제가 수사를 잘못한 것이 되네요?”
장 검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마도?”
“그러네요. 제가 이 사건을 너무 간과했던 것 같네요. 제 불찰이에요. 정황 증거가 너무나 확실했고 게다가 피의자가 자수했으니….”
푸르르르, 그녀가 숨을 급히 내쉬며 양 입술을 부딪치며 연신 떨었다.
“아냐 아냐. 이건 농담이고 이런 정황 증거에 피의자가 자수까지 했는데 분명, 나라도 장 검과 다르지 않았을 거야. 어려울 것 없어. 다시 바로잡으면 되는 거야. 근데, 이 사건 재수사 들어가면 장 검이 좀 곤란해질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지자스! 저 배려 어쩔?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할 순 없잖아요. 그나저나, 어쩌죠? 이 일을 알면 지청장님이 노발대발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판사님이 공판 연기를 받아들여 주실까요? 절대 쉽지 않을 텐데요.”
“하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봐야지.”
“음… 좋아요. 지금 당장 쳐들어갑시다.”
“오케이!”
<광주 지방 법원- 이종호 판사실.>
나는 장 검과 함께 부랴부랴 담당 판사실을 찾았다.
“판사님, 아무래도 공판을 연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봐. 장영은 검사. 공판 3시간 전에 와서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지금 장난해?”
이종호 판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그게 아니라, 증거 자료가 미흡합니다.”
“왜? 사형이라도 구형하게? 아무리 생각해도 무기 가지고는 부족해? 장 검! 김진웅이 초범에 자수도 했고 그런데 좀 너무 야박한 것 아냐?”
“아뇨. 그 반대입니다. 김진웅이 무죄라는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불쑥, 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라고? 지금 자네 지금 무죄라고 그랬나? 허허, 얘네들이 쌍으로 미쳤나?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제 뭘 잘못 먹었어? 그리고 김 검사! 너는 여기 온 거야?”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이 사건 저와 같이 수사하기로 했습니다.”
장 검이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너희들 지금 지청에 보고는 하고 이러는 거냐? 지금 너희들 이거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알아?”
“알고 있습니다.”
“얼씨구? 알아?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딱 30분 줄 테니까 너희들은 나를 반드시 설득해야 할 거다. 어디 한 번 씨불여봐.”
나와 장 검은 온 힘을 다해 이 판사에게 열변을 토했다.
“허허, 재밌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이냐? 내 판사 생활 10여 년에 너희 같은 미친놈은 첨이다. 이쯤 되면 내가 너희들을 믿어줘야 예의라는 거지?”
이 판사가 짙은 눈썹을 씰룩거렸다.
“넵. 믿어주십시오.”
“분명, 나도 심증은 간다만, 이거 가지고 재판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야. 모든 증거가 김진웅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판사님, 눈에 보이는 팩트가 전부 진실은 아닙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내가 한 말이잖아!
순간, 장 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간? 좋아. 얼마나 주면 돼?”
이 판사의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3주, 3주만 주십시오. 반드시, 그 안에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 오겠습니다.”
“3주라…… 좋아! 너희들 무모한 정의감에 솔직히 살짝 감동했다. 3주 안에 진범 잡아 와라. 반드시!”
이 판사가 눈을 부라렸다.
“감사합니다. 판사님!”
“참! 야. 장 검! 여기 공판 연기 신청서 써놓고 가. 나머진 내가 알아서 처리해 놓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판사님!”
“그나저나, 이거 나 모르는 일이다. 알아들어?”
“네. 물론이죠. 모르셔야죠.”
변호사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증거 불충분이라고 하면 뭘 더 수사하냐고 길길이 날뛸 텐데….
이 판사가 혼잣말하며 중얼거렸다.